2016년 6월 21일 화요일

쿠테시폰

쿠테시폰

쿠테시폰(Ctesiphon)은 이라크에 있는 고대 도시유적.바그다드의 남동, 치그리스 가와히가시기슭에 위치한다.

목차

개요

기원 전 1 세기무렵에 이 지역 일대를 지배한 파르티아 왕국에 의해서 건조되어 그 수도로서 번창했다.고대보다 풍부한 토양으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으로서 또 동서 교역의 중요한 중계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파르티아 멸망 후에 서서아침 페르시아의 시대가 되어도 수도가 놓여져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로 계속 되었다.이슬람 지배기 이후는 쇠약해져 폐허가 되었다.

사막 지대에 많은 일조 벽돌이나, 로마스이도교 등에 볼 수 있는 아치를 짜는 기술 등, 확실히 동서의 교역의 중심지인것 같은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호칭

치그리스강을 사이에 두어 대안에 있던 세레우키아(세레우케이아)와 아울러 쿠테시폰・세레우키아등이라고도 칭한다.쿠테시폰의 이름은 고대그리스어의 것Κτησιφ□ν에 유래한다.Ktesiphon은 그리스어화 된 발음이며, Tosfon 또는 Tosbon이라고 하는 발음을 복원음으로 하는 설이 있는[1].중기 페르시아어(파후라비어)나 마니교문서, 소그드말로 기재된 기독교 문서에서는 Tyspwn / Tisfon이라고 기재되어 근세 페르시아어로는□□□□□□(tysfyn)과 표기된다.시리아어로는□□□□□□□Qtesfon이라고 기재되었다.압바스아침 이후의 아라비아어 자료로는□□□□□□(Taysafun) 또는□□□□□□□(Qataysfun)표기되어 더욱 「도시(□□□□□Madina)」의 복수형인 「알=마다인」□□□□□□□al-Mada'in라고도 불렸다.아르메니아어 사료로는 Tizbon (□□□□□□)과 표기되었다.쿠테시폰이 등장하는 최초의 사료는 구약 성서에즈라서[2]이며, Kasfia/Casphia와 표기되었다.

역사

쿠테시폰・세레우키아(al-Mada'in)의 전체도

쿠테시폰은 기원 전 1 세기의 파르티아 왕국의 시대에 각광을 받게 되어, 대부분의 왕은 여기를 도로 했다.그 중요성을 위해서, 로마 제국이 동방을 정복할 때의 군사적인 목표가 되었다.쿠테시폰은 로마 제국(또는 동 로마 제국)에 의해 5회 점령되었지만, 그 중 3회는 기원 2 세기의 일로이다.호랑이 야누스제는 116년에 쿠테시폰을 점령했지만, 1년 후에 하드리아누스제는 평화를 위해서 반환 하지 않을 수 없었다.로마의 장군 아위디우스・카시우스는 164년, 대파르티아 전쟁동안에 쿠테시폰을 점령했지만, 평화에 의해 방폐했다.197년, 세프티미우스・세웨르스제는 쿠테시폰을 약탈해, 수천인(아마 최대로 1만명)의 거주자를 데리고 가고 노예로 했다.

3 세기의 마지막에 서서아침이 파르티아에 취해 대신하면, 쿠테시폰은 다시 로마와의 계쟁지가 되었다.295년, 가레리우스제는 쿠테시폰의 근처에서 페르시아에 패배했다.굴욕을 풀기 위해 가레리우스는 1년 후에 되돌아와, 전쟁에 대승해 4번째의 점령을 실시했다.가레리우스는 아르메니아와 교환에 쿠테시폰을 나르세 1세에 반환했다.325년즈음과 410년, 쿠테시폰(또는 대안의 그리스인 이주지)으로 압사 리어 동방 교회의 회의가 개최되었다.

363년, 유리아누스제는 샤프르 2세와의 전쟁중에, 쿠테시폰의 시벽의 밖에서 죽었다.

627년, 니네베의 싸움으로 서서아침에 승리한 동 로마 제국의 헤라크레이오스제가 서서아침의 수도인 쿠테시폰을 포위했지만, 평화를 묶어 돌아왔다.637년, 정통 칼리프우말의 시대에 아랍제부족으로부터 완성되는 이슬람교군에 의한 대서서아침과의 전쟁은 마침내 이라크(메소포타미아)에까지 및, 이라크 지방에 진공한 사아드・분・아비-=왁카스(영문판)가 인솔하는 부대는 서서아침 마지막 군주 야즈데기르드 3세가 파견한 총사령관 로스탐휘하의 서서조군에 대해, 카디시야의 싸움에 대해 승리했다.사아드 인솔하는 이슬람교군은 치그치스 동해안의 제도시를 잇달아 정복해 쿠테시폰 근교까지 강요했기 때문에, 이것에 의해서 야즈데기르드 3세는 북동에 있던 후르워까지 도망했다.압바스아침 시대의 기록 밤과 이 해는 기아와 악역에 돌아 볼 수 있는 방위 전력의 저하에 골치를 썩이고 있었지만, 쿠테시폰의 수비군은과 치그리스강에 걸리는 모든 후나바시를 떨어뜨려 이슬람교군의 침공을 막아 항전 했다.그러나 이슬람교군은 인마 모두 수류를 타 도하 하는 작전에 나왔다.쿠테시폰의 각지구는 이슬람교군에 대해서 각각 항전 해 혹은 귀순했지만, 마침내 쿠테시폰의 전지구는 함락 했다.정복에 의해서 인구가 줄어 들 것은 없었지만, 정치적・경제적인 중심지가 그 밖에 옮겨, 8 세기 초에 압바스아침의 수도가 바그다드에 정해지면, 도시는 급속히 쇠약해져 이윽고 고스트 타운이 되었다.「천야일야 이야기」에 나타나는 도시 「이스바닐(영문판)」는, 쿠테시폰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139화, 제667-79밤).

1915년 11월, 쿠테시폰의 유적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장이 되었다(쿠테시폰의 싸움(문판)).오스맨 제국군이 바그다드를 빼앗으려고 한 영국군의 부대를 격파해, 40마일 후퇴 시켜 항복시켰다.

각주

[헬프]
  1. ^ E.J. Brill's First Encyclopaedia of Islam 1913□1936, Vol. 2 (Brill, 1987: ISBN 90-04-08265-4), p. 75.
  2. ^ Ezra 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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