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에학옹
와 력
성은 오에, 속명은 미상.이세노쿠니 야마다(현재의 미에현 야마다)의 흔정사의 주직으로 하과효재의 문인이기도 했다.그림이나 책을 좋아해 특히 불화를 자랑으로 여기고 있어 주로 원 공고승도등을 그렸다.메이지 10년(1877년) 9월, 아이치현 호이군 오토하마치 아카사카(현도요카와시 아카사카초)의 쵸후쿠지의 주직겸교도직중 강의때에, 이세노쿠니의 폐사인 흔정사의 본존이나 일륜묘고우, 엥코우 대사 만월상 등 절의 보물을 지은원에 맡겨 흔정사의 재흥 운동을 시작한다.메이지 15년(1882년) 1월에는 흔정사재흥의 관허를 이득, 우선 이세노쿠니 야마토쵸의 죠묘지의 경내에 가당을 마련하고 지은원으로부터 맡기고 있던 절의 보물등을 환천, 이 절의 주직이 되어 본당 건설을 위해서 정재를 모집하면서 각지를 순회하기 시작한다.
「하과효재회일기」에 의하면, 메이지 20년(1887년)의 5월과 6월분을 정리한 책의 모두 부분에 「세이슈 야마다흔정사오에학옹」이라고 기록된 메모나, 동년 6월 6일, 6월 11일, 6월 16일등의 부분에 「이세」, 「이세 오에학옹」, 「줄여가며 꿰매어 야마다」 등 학 옹에 관한 기술이 보인다.이것에 의해 동년무렵, 시주에의 답례 휘호에 대응하기 위해서 효재에 입문해, 불화등을 학습했다고 여겨진다.이 해의 8월 22일의 부분에는 효재택을 떠나는 학 옹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어 이전에 효재로부터 주어진 표본을 가져 한 번 이세로 돌아가, 또 각지 순회가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다음 메이지 21년(1888년) 5월 22일, 네기시로 옮긴 효재의 집을 다시 방문 상경의 인사를 해, 의뢰한 표본의 선금 50전을 건네주었다.다음날 「중국 성현도」라고 볼 수 있는 표본을 받고 있다.「하과효재회일기」에 학 옹이 그려져 있는 것은 여기까지여, 효재 마지막 문인이었던 것 같다.학 옹은 많은 불화, 화조화를 그려 시주에 주었다고 여겨지지만, 그러한 작품은 남지 않았다.학 옹에 의한 자기 저서 자료로서는 쵸후쿠지 주직 시대의 서명과 홍경테라도코창고의 「불조심」이라고 기록된 판목뿐이다.이 이면에는 「후광 대사입5 영지 순례가」라고 쓰여져 있다.
「효재화담외편」권지상에는 효재화의 「오에학옹스님 불화를 그리는 것 그림」으로서, 학 옹이 겉옷차림으로 간단하게 목도리를 목에 휘감고 불화를 그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배후에 걸칠 수 있었던 표장전의 왜가리도, 연꽃에 앉아 염불 하는 호넨 고승의 그림도 학 옹의 작품으로 보여진다.언뜻 봐 60세 전후라고 보여져 짧은 턱수염이 눈에 띄어 풍채의 좋은 스님인 것 같다.
그 후 메이지 22년(1889년) 9월, 점구야마토쵸에 흔정테라모토당이 락 이루어, 흔정사재흥 제일세・일예학옹고승이라고 칭해진다.다음 메이지 23년 4월 10일에는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카지야쵸의 다이온지의 제19세주직에 전임이 되어, 메이지 27년(1894년) 9월 5일에는 이바라키현 미츠카이도시(현조소시) 토요오카의 홍경사에 부임, 홍경사제7십이세주직이 되고 있다.그 3년 후의 메이지 30년 2월 1일, 홍경사에서 사망.향년 미상.위패에는 「호렌사권 승정일예고승관아무애학옹대화상」이라고 적는다.
참고 문헌
- 이이지마 허심 「하과효재옹전」〈「일본 예술 명저선」3〉페리카응사, 1984년
- 야마구치 세이이치 「아키라 금기의 문인 오에학옹에 대해」 「효재하과효재연구잡지」 제90호하과효재기념 미술관,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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