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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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미치(치우 어떻게, 범: Madhyama-marga, 마디야마・마르가, 범: Madhyama-pratipad, 마디야마・프라티팟드, 파: Majjhima-patipada, 맛지마・파티파다)란, 불교 용어로, 서로 대립해 모순되는 2의 극단적인 개념・자세에 치우치지 않는 실천(불도 수행)이나 인식의 본연의 자세를 말한다.
고・락의 둘을 「니수」(니지) 이라고 하여, 영혼(아트맨)이나 여러가지 존재물에 대해 항상적으로 「있다」( 「츠네미」→의존・안주・고집・타락)이라든지, 단지 단순하게 사라져서 없어지는 것만으로 「없다」( 「단견」→허무주의(허무주의)・황폐)라고 하는 견해를 「2변」(에 거치지 않아)이라고 하지만, 그 어느 쪽에도 붙잡히지 않는, 치우치지 않는 입장을 나카미치라고 한다.
(덧붙여 유무의 「2변」을 피하기 위해서 불교가 제시하는 발상이, 「재수」이다.모든 존재물은 그대로의 상태로서 계속 존재할 것은 없지만, 개변・연쇄를 반복하면서 계속 존재하는 (윤회), 따라서 좋은 연쇄를 형성・지속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수행을 완성시켜 열반에 도달해, 해탈해), 라고 하는 것이 불교의 자세이다.)
목차
석가
고락 나카미치
예를 들어, 어려운 고행이나 그것과 반대의 쾌락 주의에 달리는 일 없이, 목적으로 필적한 적정한 수행 방법을 취하는 것등이 나카미치이다.
석가는, 6년간(일설에는 7년간)에 선루 어려운 고행의 끝, 아무리 어려운 고행을 해도, 이것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하고 고행을 버렸다.이것을 나카미치오각타라고 한다.석가는, 고행을 버리기 단식도 멈추어 나카미치에 의거하는 수행에 힘써, 마침내 눈을 뜬 사람(=불타)이 되었다.
석가가 카노원에 대해 오비구에 대해서 첫 설법을 실시했을 때에도( 첫부처가 설법하는 것), 이 「고락 나카미치」를(사제・팔정도에 앞서) 맨 먼저에 말한 것이, 파리어 경전 상응부의 경전 등에 그려져 있는[1].
「비구들이야, 출가한 사람은 이 2의 극단적으로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제1에 여러가지 대상으로 향해 애욕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것은 저열로 천하고 세속적인 업이며, 고귀한 길을 요구하는 사람이 하는 것은 아니다.제2에 스스로의 육체적 소모를 추구하는 것.이것은 괴롭고, 고귀한 길을 요구하는 진정한 목적으로 이길 수 없다.
비구들이야, 나는 그것들 양극단을 피한 나카미치를 분명히 깨달았다.이것은 사람의 눈을 열어, 이해를 일으키게 해 마음의 고요함, 뛰어난 지혜, 올바른 깨달음, 열반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이다.」
초기 불교 교단에 대하고, 석가의 직제자의 한 사람으로 있던 제파달다는, 승려단의 계율을 보다 금욕적・고행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변경하도록(듯이) 석가에 요구했다( 「5일의 계율」)가, 석가는 이것을 거부했다.그 때문에 제파달다는 독자적인 교단을 창설해, 불교 교단을 나가게 되었다.
거문고의 현(긴완나카미치)
파리어 경전의 율장・□도・대품(마하바가)에 대해서는, 석가가, 아무리 정진해도 깨달음에 접근하지 않고 초조감・절망감을 더해가고 있던 소나라고 하는 비구에 대해서, 거문고의 현을 비유에 내고, 나카미치를 말하고 있다.
현은, 과잉긴축 이라고도, 느슨한 지나도, 좋은 소리는 나오지 않는, 적당하게 잡을 수 있어야만 좋은 소리가 나오는, 비구의 정진도 그렇게 있어야 한다고 석가에 설득해져 소나는 그대로 정진해, 후에 깨달음에 이르렀다.
유무 나카미치
「사문과경」을 시작으로 하고, 초기 불교 경전에서는 종종 육사외도와의 사상 비교를 한다.
그 육사외도중,
(이)나, 유물론자이다
의 합계 4명의 사상은, 각각 영혼・운명에 관한 「츠네미」와「단견」의 「2변」이 가져오는 폐해(도덕・노력의 결핍・상실, 인심 황폐)나, 그러므로의 불교에 있어서의 「유무 나카미치」의 중요성을 떠오르게 하는 역할을 이루어 있다.
(덧붙여서, 남는 2명중, 니간타・나타풋타(쟈이너교)는, 제파달다와 같이, 고행으로 집착해 버리고 있는 존재로서 한편의 산쟈야・베이랏티풋타(회의론)는, 「확정적인 론・도」를 나타낼 수 없는 존재로서 불교와 대조되어 불교의 입장을 부조로 하는 역할을 이루어 있다.)
흐르는 통나무
파리어 경전 상응부가 있는 경전에서는, 석가가 나카미치를 간가강에 흐르는 통나무에 비유해 말하고 있는[2].
그곳에서는, 석가가 통나무를 비구(출가 수행자)에 가령, 그 흐르는 통나무가
- 이쪽의 기슭에 흘러 붙지 않고( 육근(6내곳)에 붙잡히는 일 없이)
- 건너편 물가에 흘러 붙지 않고(육경(6외곳)에 붙잡히는 일 없이)
- 중류에서 심 봐도 하지 않고(열락・욕망에 붙잡히는 일 없이)
- 나카스에 밀려와도 하지 않고(자아의 망집에 붙잡히는 일 없이)
- 사람에 의해서 가지고 사라져져서도 하지 않고(사회성・인간 관계(교제・동정)에 붙잡히는 일 없이)
- 사람이 아닌 것(도깨비)에 의해서 가지고 사라져져서도 하지 않고(신비주의에 붙잡히는 일 없이)
- 소용돌이에 감겨질 것도 없고(오감에 의한 욕망에 휩쓸리는 일 없이)
- 내부로부터 부패해 나갈 것도 없다(거짓・기만을 숨겨 사는 것이 없다)
(이)라면, 바다(깨달아, 열반)로 도달할 것이다라고 말해진다.
무기
파리어 경전 중부 63경 「소마르키야경」등으로 말해지고 있도록(듯이)[3], 석가는,
- 세계는 영원해요인가, 없는 것인가
-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 생명과 신체는 동일한가, 별개인가
- 수행 완성자(여래)는 사후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고 한, 수행・고 멸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물음에는, 어디에서 있다고도,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이것을 「무기」(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것도 넓은 의미로의 나카미치의 하나이다고 말할 수 있다.
대승 불교
중론・중관
나가르쥬나(용수)는, 세츠잇사이부등을 논박 하는 형태로, 「8불」(불생 불멸・불상부단・불일불이・불 와 불거)에 상징되는 「중론」을 저술해, 석가의 나카미치(및 재수)의 개념을 독자적인 형태로 계승했다.
이것을 계승하는 형태로, 대승 불교의 일대 조류인 중관파가 태어났다.
천태종
나가르쥬나의 「중론」이나 중관의 개념은, 중국에는 삼론종으로서 그대로 전해지는 한편, 천태종의 사실상의 시조인 혜문도 또, 「중론」에 큰 영향을 받아 그 사상을 중체로서 계승했다.체념과는 진리라고 하는 의미이다.
중국에서 말해진 중용과 동일시 되기도 하지만, 엄밀하게는 다른 것이다.중용의 「안」이란 치우치지 않는 것을 의미해, 「용」이란역(인가) 깨지 않는 것, 이라고 설명되고 있다.나카미치의 「안」이란 치우치지 않는 것을 의미해, 「길」은 수행을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각주・출전
- ^「세계의 명저 1」중앙공론사 pp435-439
- ^「세계의 명저 1」중앙공론사 pp457-459
- ^「세계의 명저 1」중앙공론사 pp473-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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