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범죄
전쟁 범죄(전쟁은 재산)와는[1], 전시 국제법에 위반하는 죄로 교전 법규 위반을 찌른다.
통상은 전투원이나 사령관(교전자), 혹은 비전투원의 개인의 범죄 행위를 대상으로 해, 교전규칙을 일탈하는 죄가 추궁 당한다.국제 군사재판소 조례 제정에 관련되는 논의 속에서 이 개념은 확장되고 있어 국가 범죄(국제적 염려 사항)로서의 평화에 대한 죄나 인도에 대한 죄가 창설되었다.
전시 반역죄는[2]전쟁 법규를 범해 적대 행위를 하는 죄이며, 전시 중죄범, 전시 형법범으로서 국제법의 보호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적국 군인이나 점령지 주민의 위법한 적대 행위는 전시 반역죄로서 군의 처분에 맡길 수 있고 군법회의에 걸치는 일 없이, 군이 스스로 정립 한 형벌법규로 처단 할 수 있다(군율).군율 및 군율 회의는 국제관습법상 인정되어 온 것이어 헤이그 육전 법규 제3관 42조이하는 점령지에 있어서의 군율・군율 회의를 인정했다고 풀어지고 있다.군율이나 군율 회의는 군사 행동이며 전쟁 행위에 포함된다.
목차
경위
일찌기 전쟁 범죄라고 정의되고 있던 것은, 포로의 학대를 금지한 「제네바 조약」이나, 사람축에 들지 못한 사람도적 병기의 사용을 금지한 「헤이그 육전 조약」 등, 전시에 있어 지켜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겨지는 국제법(전시 국제법) 위반행위뿐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전쟁 범죄 개념
제1차 세계 대전 종결후, 전승국이 패전국의 지도자를 재판하는 것이 국제적으로 협의되었다.전승국인 아메리카 합중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등의 연합국 10개국은, 파리 강화 회의에 앞서 행해진 평화 예비 회의에 대해 「전쟁 개시자 책임 및 형벌 집행위원회」(The Commission on the Responsibility of the Authors of the War and on the Enforcement of Penalties)을 설립했다.이 위원회는 국가원수도 포함한 전쟁 개시자의 소추나, 대상이 복수국에 걸치는 잔학행위 전범을 재판하기 위한 재판소를 설치하는 등의 보고서를 제출했다.이 보고서는 강화 회의로는 채용되지 않았지만, 베르사이유 조약 제 227조인 「국제 도의와 조약에 대한 최고의 죄를 범했다」라고 해 전 독일 황제 윌헬름 2세를 특별 재판소에 소추한다고 하는 조항이 되어 반영되고 있는[3].이 소추는 중립국인 네델란드가 망명하고 있던 윌헬름 2세의 인도를 거절했기 때문에 재판은 행해지지 않았던[4].
또 파리 강화 회의로는 「전쟁에 관한 책임을 조사하는 15인 위원회」(en:Commission of Responsibilities)이 전쟁 범죄의 개념으로서 「전쟁의 법규 및 관례 위반」이라고 하는 리스트를 작성해, 잔학행위를 실시했다고 하는 전범 45명을 리스트업 했다.이 전범은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서 독일 정부 자신으로 재판하는 것이 정해져 1921년부터 Leipzig에서 재판이 개시되었다.그러나 이 Leipzig 재판(en:Leipzig War Crimes Trial)은, 몇 사람인가에 단기간의 징역형이 내려진 것 봐여, 대부분은 무죄가 되었다.또 정치・군사 지도자에 대한 소추는 행해지지 않았다.
1920년에는 국제연맹의 상설 국제사법재판소 설립을 위한 법률가 자문위원회는 「국제 공공 질서를 침해해, 혹은 제국의 보편적법에 반하는 범죄」를 재판하는 국제 고등재판소 설치를 제안했다.같은 제안은 1922년, 1924년, 1926년에도 행해지고 있지만 모두 성립하지 않았던[3].
제2차 세계대전 전기의 전쟁 범죄 소추의 움직임
제2차 세계대전의 한중간, 연합국측은 독일군의 잔학행위를 몇번이고 비난 해, 전쟁 종결후에는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는 일을 강하게 경고하고 있었다.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대량학살등의 자국 국민에게의 범죄 행위는 전쟁 범죄로 간주해지지 않았었다.
1940년 11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양망명 정부는, 고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독일의 잔학행위를 비난 하는 성명을 실시했다.1941년 10월 25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은 각각 독일군이 각지에서 가고 있는 잔학행위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해, 특히 처칠은 이 범죄 행위에의 징벌이 주된 전쟁 목적의 하나로 꼽혀야 하는 것이다고 한[5].또 11월 25일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의 모로트후 외상도 독일의 잔학행위를 비난 하는 성명을 실시하고 있다.
1942년 1월 13일, 런던의 센트・제임스 궁전에 대해 벨기에, 체코스로바키아,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델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유고슬라비아의 연합국 9개국의 망명 정부가 회의를 열어, 독일의 민간인에게의 잔학행위를 비난 해, 한편 재판에 의해서 이러한 범죄의 명령자나 실행자의 처벌을 결의하는 센트・제임스 궁전의 선언이 나온[6].전쟁에 있어서의 잔학행위를 재판으로 처벌하는 것을 정한 최초의 공식 선언이 되었다.옵서버로서 참가하고 있던 중화 민국도 이것에 동의 해, 일본에도 적용하도록(듯이) 신청했다.이 선언에는 후에 소련도 동의 한다.센트・제임스 궁전의 선언에 합의한 각국은 영미에 합의와 실행을 강요했지만, 영미는 Leipzig 재판의 실패에 의한 소극 자세와[7], 위원회에 소련 구성 공화국을 더하려고 하는 소련의 주장 때문에, 위원회 설치는 늦은[8].그러나 망명 정부의 요구와 동아시아의 식민지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영국이나 미국, 네델란드등의 요구에 의해, 전범 재판으로 움직이기 시작한[9].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
6월이 되어 처칠은 전쟁 범죄의 증거를 수집하는, 연합국 전쟁 범죄 수사 위원회(United Nations War Crimes Commission for the Investigation of War Crimes)의 설치에 관해서 미국과 협의를 개시했다.7월에는 영국 내각으로 위원회 설치가 승인되어 10월 7일,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사이먼(en:John Simon, 1 st Viscount Simon) 다이보관은의 설립에 합의했다.1943년 10월 7일에는 소련을 제외한 연합국,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캐나다, 중국,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인도, 룩셈부르크, 네델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폴란드, 남아프리카, 영국, 미국, 유고슬라비아, 프랑스(자유 프랑스)를 멤버로 하는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United Nations War Crimes Commission, UNWCC)가 정식으로 발족한[10].또 소련은 즉각 전범 처벌을 개시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영국은 포로에게의 보복을 무서워해 전시중의 전범 처벌에 신중했다.이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 측에 의한 전범 재판은 대부분이 전후에 행해지게 되는[9].
동11월 1일, 아메리카 합중국, 영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각국 외상 회담에 의한 모스크바 선언이 나왔다.이 안에서, 독일의 주요 전쟁 범죄나 잔학행위에의 처벌이 언명 되었다.또 이 성명속에서, 전범 재판은 피해국이 실시한다고 하는 원칙이 확인된[9].
전쟁 범죄 개념의 협의
UNWCC의 비공식 회의는 10월 26일부터 개시되었지만, 이 회의 중(안)에서 전쟁 범죄 그 자체의 정의에 대한 협의를 했다.체코슬로바키아 대표의 에체르(Bohuslav Ecer)는 「하나의 마을을 멸종시키는 행위[11]은, 전쟁 범죄는 아니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이나 처칠씨, 이덴씨(사카에 외상)가 말타나름에 재판해져서바 안 된다.그러므로, 더 넓은 범위의 전쟁 범죄가 필요하다」라고, 전쟁 범죄 개념의 확대를 주장한[12].제2회회의로는 전쟁 범죄란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것으로서 1919년의 「전쟁의 법규 및 관례 위반」32항목의 리스트를 잠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합의되었다.이 리스트가 채용된 이유는, 작성에 일본・이탈리아가 참가하고 있어, 독일도 반대는하지 않았던 것을 들 수 있고 있는[13].UNWCC의 협의는 수십회에 걸쳐서 행해져 그 중에 잔학행위는 독일 국가가 일체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개개의 범죄 용의자 뿐만이 아니라, 국가나 나치당, 친위대등의 조직 간부를 전쟁범죄인으로서 재판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14].
또, 소위원회인 법률 위원회로는 침략전쟁이 전쟁 범죄일지에 임해서 논의를 했지만, 전쟁 범죄는 아니라고 하는 의견이 다수파인[15].
인도에 대한 죄에 관한 협의
미국 대표의 하바트・펠(en:Herbert Pell)을 시작으로 하는 UNWCC는 자국민에 대한 범죄나, 종교나 민족에 대한 범죄를 「인도에 대한 죄」라고 하는 개념으로 전쟁 범죄로 해야 하는 것이다고 생각해 미영 양정부에 제의했다.그러나 양국 정부는 당초 이 움직임에 부정적인[16].
이전 아메리카 합중국 국무성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이 UNWCC에 있어서의 유태인 문제 제기를 방해해, 펠이 이것에 항의한 적도 있던[17].또 영국 정부는 1944년 6월 28일에 대량학살은 전쟁 범죄의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는 각의 결정을 실시해, UNWCC가 대상으로 하는 유태인 박해는 독일에 의한 점령지에 한정해야 하는 것이다고 하는 의견을 미국 측에 전달했다.이것은 대량학살에 관해서는 독일 후계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으로, 독일인에 의한 재판에 반입해야 하는 것이다고 하는 것인[18].
재판 형식에 관한 협의
위원회는 1944년 10월 3일에 전쟁 범죄는 국제법정으로 재판해야 하는 것으로 해, 연합국 전쟁 범죄 재판소와 혼합 군사법정의 설치를 권고했지만, 종래의 전쟁 범죄 개념을 도습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영국 정부의 동의는 얻을 수 없었던[19].미국은 반대하지 않았지만, 다른 나라의 동의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유보조건을 붙였다.
연합국군이 유럽에 역상륙을 완수하면, UNWCC의 전범 확정 작업은 간신히 개시되었다.1944년 11월 22일에는 최초의 전범 리스트가 작성된[20].
논의의 집약
1944년 9월, 아메리카 합중국 육군 장관 헨리-・스티무손은 육군성내에서 전쟁 범죄 정책의 검토를 실시했다.이 검토에 의해서 정리된 의견은 「인도에 대한 죄」를 전쟁 범죄로 한다, 또 국제법정의 설치에 동의 하는 등, UNWCC의 의견에 가까운 것이었다.또, 이 안에서 독일 국가, 나치당이나 친위대가 민중 파괴를 범하는 공동 모의(conspiracy)를 실시했다고 해, 범죄를 실시한 조직에 속하는 개인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고 하는 「공동 모의 이론」을 나타내고 있는[21]. 스티무손과 육군성은 이 노선을 주장했지만, 국무성은 종래의 노선을 무너뜨리지 않았다.또 해군성도, 현시점에서의 공동 모의 개념 도입은 일본의 항전 의욕을 높인다고 하여 육군성의 의견에는 부정적인[22].그러나 12월 17일에 벨기에에서 마르메디 학살 사건이 발생하면, 친위대의 잔학행위를 저지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견이 정부내에서 강해져, 육군성의 안이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다.1945년 1월 3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공동 모의 이론의 도입에 동의 해, 1월 22일에는 국제법정설치가 정부내에서 동의 되었다.다만 이 동의가 정식적이다 결과가 된 것은 하리・S・트르만 대통령의 취임 후였던[23].
그러나 영국 정부는 더 전쟁 지도자를 재판에 거는 것에는 반대하고 있었다.이 때문에 2월, 아메리카 합중국, 영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에 의한 야르타 회담에 대해 국제 군사재판소 설치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었지만, 이 시점에서 3국의 외상에 의해 검토하는 것이 결정할 수 있던 것 봐에서 만났다.그러나 4월 30일의 히틀러의 자살에 의해서, 히틀러가 법정에서 연설하는 염려가 없어진 것을 한 요인으로서 미국의 제안을 받아 들인[23].
그 후, 거듭되는 절충을 거쳐 동년 6월부터 전범을 재판하는 국제 군사재판 개설을 위한 협의가 개최되었다.동년 8월 8일 런던에서 아메리카 합중국, 영국, 프랑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의 4개국 대표에 의해, 전범 협정이 조인되어 국제 군사재판소 헌장이 정해졌다.
국제 군사재판소 조례
협의의 과정
야르타 회담의 협정에 근거해, 1945년 6월 26일부터 전범을 재판하는 국제 군사재판소 개설을 위한 협의가, 아메리카 합중국으로부터 최고재판소 판사 로버트・잭슨, 영국으로부터 법무장관 서・데이비드・파이후, 프랑스로부터 대심원 판사 로베르・파르코,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으로부터 최고재판소 부장관 니키첸코 소장의 각국 대표에 의해서 개시되었다.8월 8일까지 본회의만으로 16회 개최되었지만, 협의에 참가한 4개국의 법 체계의 차이로부터 초안의 한마디 마다 논쟁 학리 돌려주어지는 만큼, 회의의 진행은 곤란을 다했다.그 중에서도 전쟁 범죄의 정의에 대해서는 크게 의견이 대립해, 특히 아메리카 합중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의 2국간의 의견의 상위가 현저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의 초안은, 어디까지나 독일의 위법행위를 지적한 것으로, 독일 전범을 재판하기 위해서 마셔 국제 군사재판소를 설치한다고 하려는 의도를 나타내고 있었다.니키첸코는 「우리의 지금의 일은, 어떠한 때, 어떠한 사정에도 들어맞는 법전을 기초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미국측은, 독일의 전쟁 범죄를 대상에는 하고 있었지만, 전쟁 그 자체를 범죄로 할 생각을 나타내고 있었다.잭슨은, 「침략전쟁의 개시는 범죄이며, 어떠한 정치적 또는 경제적 사정도 이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라고 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말을 인용해, 「세계의 평화에 대해서 실시하는, 어떠한 공격도, 국제적 범죄로 간주하는 것을, 독일 사람들 및 그 외의 몇 분에도 알리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협의의 결과, 전쟁은 도의적으로 비난 당해도 법률적으로는 용서된다고 생각되고 있었던 시대에, 종지부를 치는 것으로서 국제 군사재판소의 헌장은 정해져야 하는 것이어, 그러므로에 전쟁 범죄의 정의를, 어느 특정의 나라가 범한 행위에 의해서만 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는 잭슨 판사의 의견이 큰폭으로 채용되어 뉘른베르크 재판 및 극동 국제 군사재판(도쿄 재판)으로, 이하와 같이 전쟁 범죄가 정의되었다.
정의
뉘른베르크 재판에 있어서의 국제 군사재판소 조례 제6조
다음에 올리는 각 행위 또는 그 어느쪽이든은, 재판소의 관할에 속하는 범죄로 해, 이것에 대해서는 개인적 책임이 성립한다.
- a항-평화에 대한 죄
- 즉, 침략전쟁 혹은 국제 조약, 협정, 맹세에 위반하는 전쟁의 계획, 준비, 개시, 혹은 수행, 또 이러한 각 행위의 몇개의 달성을 목적으로 하는 공통의 계획 혹은 공동 모의에의 관여.
- b항-전쟁 범죄
- 즉, 전쟁의 법규 또는 관례의 위반.이 위반은, 점령지 소속 혹은 점령지내의 일반인민의 살해, 학대, 노예 노동 그 외의 목적을 위한 이송, 부로 또는 해상에 있어서의 인민의 살해 혹은 학대, 인질의 살해, 공사의 재산의 약탈, 토이치쵸마을의 자의적인 파괴 또는 군사적 필요하게보다 정당화 되지 않는 황폐화를 포함한다.다만, 이것들은 한정되지 않는다.
- c항-인도에 대한 죄
- 즉, 범행지의 국내법의 위반이라고 반대를 묻지 않고, 재판소의 관할에 속하는 범죄의 수행으로서 혹은 이것에 관련해 행해진, 전쟁전 혹은 전쟁중에 모든 일반인민에 대해서 행해진 살해, 섬멸, 노예화, 이송 및 그 외의 사람축에 들지 못한 사람도적 행위, 혹은 정치적, 인종적 또는 종교적 이유에 의거하는 박해 행위.
극동 국제 군사재판소 조례 제5조
사람수준니 범죄니관술 관할본재판소하, 헤이와니 대 술죄포함 셀 범죄니 첨부 개인 트시테 또 하 단체원 트시테 소추 세라레탈 극동 전쟁범죄인심리시 처벌 스르노 권한유스.
- (이)평화니 대 술죄
- 즉치, 선전포고 셀 또 하 포고 세사르 침략전쟁, 젊은 하 국제법, 조약, 협정 또 하 맹세니 위반 셀 전쟁노 계획, 준비, 개시, 또 하 수행, 젊은 하 오른쪽 제행때문노 무슨 레카 달성 술 때문 메노 공통노 계획 또 하 공동 모의 헤노 참가.
- (로)통례노 전쟁 범죄
- 즉치, 전쟁노 법규 또 하 관례노 위반.
- (하)인도니 대 술죄
- 즉치, 전쟁 전 또 하 전시중 때문 사레 탈 살인, 섬멸, 노예적학사, 추방, 기노외노 사람축에 들지 못한 사람도적 행위, 젊은 하 범행지노 국내법 위반 과일 파이반대 트문하즈, 본재판소노 관할니속술 범죄노 수행 트시테 또 하지니 관련 시테때문 사레 탈 정치적 또 하 인종적 이유니기쿠 박해 행위.
상기 범죄노 무슨 레카범산트술 공통노 계획 또 하 공동 모의노 입안 또 하 실행니 참가 셀 지도자, 조직자, 교사자급비 공범자하, 사칼 계획노 수행상때문 사레 탈 모두 노 행위니 첨부, 기노 몇 분니의리테때문 사레타르트문하즈, 책임유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있어서의 참화, 특히 대량학살의 참극을 반복하지 않는다고 하고, 국제 군사재판을 실시하기에 이른 경위를 근거로 해 전쟁 억제의 의미로부터도, 무력 분쟁시에 행해진 「집단 학살의 죄」 「인도에 대한 죄」 「전쟁 범죄」의 실행자나 공범자, 의뢰자, 교사자, 선동자, 상관등을, 전쟁 범죄로서를 재판하는 상설의 국제법정설치가 국제연합에 의해 제창되었지만, 동서냉전의 시대에는 진전을 보지 않았다.
국제 형사 재판소의 설치
냉전 종결후, 구유고슬라비아 국제 전범 법정, 르완다 국제 전범 법정 등에 있고, 민족분쟁에 수반하는 대량 학살 등 「인도에 대한 죄」를 재판하는 국제 범죄 법정이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에 의해서 임시에 설치되었다.
이후, 상설의 국제법정설치 논의가 재검토되어 1998년 7월에 로마에서 국제 형사 재판소 설립을 위한 외교 회의가 열려 국제 형사 재판소 규정이 채택되었다.조약의 발효에 필요한 60개국이 비준해, 2002년 7월부터 정식으로 발효, 이미 설치되어 있는 국제사법재판소와 함께 2003년부터 네델란드의 헤이그에 설치되었다.
일본은 2007년 7월 17일에는 가입서를 유엔에 기탁해, 동년 10월 1일 정식으로 105개국째의 체결국이 되고 있다.로마 규정 및 그 협력법은, 국내법에 대해 2007년 10월 1일에 발효한[24].또 동년 11월 30일에 행해진 보결 판사 선거로는, 첫 일본의 ICC 재판관 후보로서 재하토미코가 당선을 완수하는 등, 가맹 이후는 적극적인 참가 자세를 나타내고 있는[25].2009년 11월의 보궐 선거로 오자키 쿠니코가 당선해, 제1심 재판 부문에 배속되었다.
덧붙여 아메리카 합중국, 중화 인민 공화국, 러시아 연방 등은 미가맹이며, 그 실효성은 부족하다고 한다.[요점 출전]
각주
- ^쇼우갓칸 디지털대말샘 「전쟁 범죄」[1]
- ^「근대 일본에 어루참심의 전통」이시다 키요시(토마코마이 고마자와 대학 기요, 제14호 2005.11) P. 61, PDF-P. 63[2]
- ^ a b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위), 26 p
- ^코지마 노보루 「도쿄 재판(위)」중앙공론사, 1971년, ISBN 4122009774, 49 페이지.요시다 유타카 「쇼와 천황의 종전사」이와나미 서점, 1992년 12월, 35 페이지, ISBN 9784004302575.노무라 지로우 「나치스 재판」코단샤, 1993년 1월, 78 페이지, ISBN 9784061491328.
- ^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위), 4 p
- ^하야시 히로시 「BC급 전범 재판」이와나미 신서, 23 페이지
- ^하야시 히로시 「BC급 전범 재판」이와나미 신서, 23 페이지
- ^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위), 6 p
- ^ a b c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위), 7 p
- ^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위), 5-6 p
- ^나치스에 의한 리디트・레쟈키마을의 섬멸
- ^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위), 8 p
- ^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위), 9 p
- ^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위), 14 p
- ^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위), 15 p
- ^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위), 32-34 p
- ^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위), 34 p
- ^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위), 30 p
- ^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위), 27-31 p
- ^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위), 11 p
- ^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아래), 53-55 p
- ^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아래), 58 p
- ^ a b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아래), 61 p
- ^국제 형사 재판소 규정을 참조
- ^자세한 것은, 2007년의 11월 30일의 엔트리를 참조.
관련 항목
참고 문헌
- 진쿠니히코・사세 창성・츠네이시 케이치 감수 「세계 전쟁 범죄 사전」문예춘추, 2002년 8월 8일.ISBN 9784163585604
-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군사재판에 관한 질문주의서(참의원 의원 요시오카 요시노리 제출) 및 답변서, 1991년(헤세이 3년) 10월
- 코지마 노보루 「도쿄 재판상」중앙공론 신사, 2007년 3월.ISBN 9784122048379
- 코지마 노보루 「도쿄 재판하」중앙공론 신사, 2007년 3월.ISBN 9784122048386
- 시미즈 마사요시 「도쿄 여학관단기 대학 기요」14호, 18호, 19호.
- 이시다 이사무치 「과거의 극복-히틀러 후의 독일」하쿠스이사, 2002년 5월.ISBN 9784560028360
- 하야시 히로시「연합국 전쟁 범죄 정책의 형성--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위)」
- 하야시 히로시 「연합국 전쟁 범죄 정책의 형성--연합국 전쟁 범죄 위원회와 영미(아래)」
This article is taken from the Japanese Wikipedia 전쟁 범죄
This article is distributed by cc-by-sa or GFDL license in accordance with the provisions of Wikipedia.
In addition, Tranpedia is simply not responsible for any show is only by translating the writings of foreign licenses that are compatible with CC-BY-SA license information.
0 개의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