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모 식산흥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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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모 식산흥업 주식회사(물자 식산 공업)는, 가고시마현 아이라시 가모우초 가미규토쿠에 본사를 두는, 조림・조원업등의 회사이다.현대에 있고는 통상의 회사가 되고 있지만, 원래는 칸유치의 불하를 받아 카모 거주의 사족이 이것을 공유한 조직인, 사단법인 카모 사족 공유사(물 것이고 속편 향유해 )에 기원을 가진다.
연혁
사츠마 번으로는 토죠제라고 하는 제도를 채용하고 있어 영내 각지에 향사가 사는 「산기슭 취락」을 설치하고 있었다.카모에도 카미규우토쿠를 중심으로 부케야시키의 자취가 있다.카모의 향사는 정강인 일로 알려져 카모병아(물자에 개) 라고 칭해졌다.그러나 궁핍했던 일도 있어, 에도막부 말기가 되어 전란의 시대가 되면, 번으로부터 산림의 불하를 받고 공유지로 해, 그 수익으로 총을 구입해 병사의 훈련을 실시했다.이것에 의해 보신 전쟁에 즈음하여도 카모대는 큰 활약을 할 수 있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메이지가 되어, 생머리이며 후에 해군 중장이 되는 니레이평보는, 새로운 시대에는 교육의 진흥이 불가결하다라고 해, 그 재원과 하기 위해서 운동을 실시해 번이나 정부로부터 한층 더 산림의 불하를 받아 사족 공유(해 속계 한다)를 발족시켰다.15 세기의 카모씨의 시대부터 존재하고 있던 목장등도 불하를 받아 황무지를 개척하고 경지로 하는 등 했다.그러나 1873년(메이지 5년)의 학제 교부에 의해 교육은 공의 소관이 된 것으로부터, 사족 공유의 재산 중 양질의 경작지는 가쿠덴으로서 제공했다.남겨진 토지를 사족 공유의 재산으로서 그 수익에 의해 교육 식산 사업과 공공 사업에의 공헌을 실시하기로 했다.
타이쇼 시대가 되어, 조직의 기반을 굳히기 위해서 사단법인으로서 설립하게 되었다.1919년(타이쇼 8년) 7월 17일에 관청에 신청을 실시해, 다음 해 3월 31일에 인가를 받고, 6월 30일에 사단법인 카모 사족 공유사의 설립등기를 실시했다.설립시의 사원수는 442명이서 원자금 10,505엔 54전 1리, 유가증권 2,510엔, 그 외 전답이나 택지, 산림등의 자산을 가지고 발족했다.
이러한 자산으로부터의 수익으로, 사원에게의 배당을 실시하는 것과 동시에 교육 사업과 공공 사업에의 협력을 실시했다.카모 출신자가 도쿄등에 진학할 때 그 학자금을 제공해, 또 현지의 학교의 교직원의 급여의 부담이나 교사 개축의 원조, 한층 더 현지의 도로나 교량의 건설・개수의 자금 원조등 여러가지 사업을 실시했다.1939년(쇼와 14년)도의 결산에 의하면, 학자금 대여를 15명에게 1,800엔, 가로등 건설의 보조에 462엔 36전, 청년 학교의 건축비 기부 1,600엔, 도로 개수비 보조 320엔, 양잠・축산・제지의 조합 보조 425엔, 군인 유가족 원호 150엔 70전, 야학사보조 150엔, 위생 조합 보조 50엔, 그 외 255엔을 지출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미 사족만으로 이러한 조직을 유지하고 있는 시대는 아니다는 논의가 일어나, 또 일본에 진주 한 미군의 간부가 카모우쵸를 방문해 실태를 조사했다고 하기도 하고, 카모 사족 공유사는 해산해 주식회사 조직으로 이행하게 되었다.1946년(쇼와 21년) 6월 12일의 총회에서 해산을 결의해, 12월 25일에 카모 식산흥업 주식회사로서의 설립 총회를 실시했다.공유사의 자산을 현물출자 해, 원의 조합원에게 새로운 주식회사의 주식을 할당하는 형태로 발족했다.농지 개혁을 위해서 단체로의 농지 소유가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농지에 대해서는 소작인에게 해방해, 주로 산림의 경영과 농산물 가공의 사업을 실시하게 되었다.
대전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림・조원등의 업무를 실시하고 있어 당초는 주주에게의 높은 배당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목재의 수입에 수반하는 가격 하락의 영향등도 있고 무배당으로 변하고 있다.현대에 있고는 통상의 주식회사가 되고 있지만, 카모 초등학교나 카모 중학교, 카모 고등학교 등에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해, 혹은 카모우쵸의 수도수원지의 삼림을 제공하는 등, 공공 사업에의 공헌을 계속하고 있다.한 때의 국철 버스 가지키선의 카모 영업소 및 카모우쵸역(자동차역)도, 카모 식산흥업의 본사 시설인 것을을 동 소유지와의 교환으로 제공한 것이어, 시로야마공원도 카모 식산흥업의 토지를 무상 개방하고 있는 것이다.
옻나무 사족 공유작 직
카모우쵸의 일부인 옻나무 지구에서도 카모 사족 공유사와는 별도로 사족의 공유 조직이 있어, 옻나무 사족 공유작직(옻 해 속계 하고 말이야 꼬치나무)으로 불리고 있었다.원래, 빈궁하고 있는 향사에게 공유지를 빌려 주어 소작시키는 것으로, 만일의 경우의 출진에 지장이 없게 한다고 하는 메이지 이전의 제도가 남아 있던 것이었다.카모 사족 공유사의 해산의 경위를 보고, 이러한 제도를 존속하고 있는 시대는 아니다는 인식에 이르러, 1950년(쇼와 25년) 10월에 해산의 결의를 실시해, 그 당시의 공유지를 참가자에게 분배해 소멸했다.
참고 문헌
- 「카모 식산흥업 주식회사 30년사」카모 식산흥업 주식회사 30년사 편집 위원회, 1976년 3월, 초판(일본어).
- 「카모 향토지」카모우쵸 향토지편씨위원회, 카모우쵸, 1991년 7월 31일, 초판, pp. 574 - 584(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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