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8일 토요일

카시마 임해 공업지대

카시마 임해 공업지대

카시마항을 중심으로 공장이 퍼지고 있다

카시마 임해 공업지대(인가 맺힌 데응이야 은어 치고 싶다)는, 이바라키현 카시마시, 가미스시 일대에 있는 공업지대이다.철강업, 발전소, 석유화학등의 공장군이 있다.약 160의 기업, 2만 2000명의 종업원을 껴안아, 이바라키현하 최대의 공업 집적을 자랑한다.

목차

개요

이바라키현의 동남부(사슴 유쿠지역), 가스미가우라의 동쪽에 위치한다.가시마나다에 접해, 굴입식의 공업항인 카시마항을 중심으로 퍼진다.

카시마시는 신일 철주금 카시마제철소를 중심으로 신일 철주금 계열의 기업이 입지하고 있다.가미스시는 석유 화학 공업이나 사료를 중심으로 한 기업의 공장이 입지하고 있다.그 외 , 화력 발전소풍력 발전소가 많이 입지하고 있다.

철도로는, 화물선의 카시마 임해철도 카시마 임항선이 다니며 있어 JR카시마선가시미삿카스타지아무역(구칭・북 카시마역)과 접속한다.

카시마 임해 공업지대의 공업용지는, 카시마항의 북측에 위치하는 카시마시의 타카마츠 지구, 키타카이힌 지구와 카시마항의 남동 측에 위치하는 가미스시의 고노이케 동부 지구(통칭・동부 지구), 남해 하마지구, 오쿠노야바닷가 공업단지와 카시마항의 남서 측에 위치하는 고노이케 서부 지구(통칭・서부 지구)와 가미스시 스나야마에 위치하는 하사키 지구의 각지구로 나눌 수 있다.

역사

1959년(쇼와 34년), 이바라키현 지사로 당선한 이와카미 지로우는, 정책 목표로 「후진현으로부터의 탈각」을 내걸어 우선 생산성의 낮은 현내의 사구 지대의 농업 소득을 향상시켜, 한층 더 공장을 유치하고 농외 소득을 더하는 것으로, 침체에 맞을 수 있는 있어로 있던 현민 소득의 증대를 도모한[1].현은, 다음 1960년(쇼와 35년)에 「공장 유치 조례」의 제정, 「가시마나다 연안 지역 종합 개발의 구상」을 밝혀 카시마 개발의 시안이 정리되어 공장 유치에 나선[1].다음 해 9월에 작성한 「카시마 임해 공업지대 조성 계획」에 의하면, 「카시마 공업항의 건설 및 가스미가우라를 수원으로 하는 공업용 수도 계획을 핵심으로 하는 임해 지역에, 4,000 헥타르의 공업지역을 조성하는 것과 동시에, 교통망의 정비와 함께, 한층 더 수천 헥타르의 주거지를 개발해, 철강, 석유, 화학, 기계등의 종합적 임해 공업지대의 실현과 아울러, 기능적 근대도시의 형성」을 도모한다고 할 계획이 구가해지고 있는[1].1963년(쇼와 38년)에는 공업정비 특별지역으로 지정되어 그 전년에 책정된 전국종합개발계획(전총)으로 구가해지고 있는 거점 개발 방식의 실천으로서 사업이 진행되어 30만명 도시를 신조 한다고 하는 국가 프로젝트에 의한 거대 개발은 「농공 양전」,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슬로건으로서 추진되어 갔다.

개발 계획은 몇 번도 계획 변경이 이루어져 특히 카시마항의 규모는 탱커의 대형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커져 간[1]. 개발 지역의 용지 매수는 1964년(쇼와 39년)에 개시.가장 곤란했던 것은, 공업지대내에는 민유지가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토지를 매수해 공업용지를 확보하는 것인[1].현은 공업지대에 걸리는 토지 가운데, 현지의 지권자가 4할의 토지를 제공해 6할의 대체지 이전으로 하는 카시마 독자적인 토지 매수 방법 「6・4 방식」을 짜내, 현지 지권자의 이해와 협력에 의해 용지 매수가 진행되어 쇼와 42 연도말(1968년 3월)까지 목표 면적 4,000 헥타르의 약 8할까지 매수가 진행되었다.

1967년(쇼와 42년)에는 진출 예정 23사의 입지가 결정된[1]. 1969년(쇼와 44년) 4월에, 스미토모 금속 카시마 제철소의 열간 압연 공장에서의 조업이 시작되어, 10월에는 카시마항도 개항한다.더욱 1971년(쇼와 46년)에는 고노이케 동부 지구에 진출한 석유화학 관련 기업의 조업이 개시되어 카시마 임해 공업지대에 있어서의 철강・석유 콤비나트의 형태가 갖추어진[1].1973년(쇼와 48년) 카시마 임해 공업단지 조성 사업 공사 완료의 공고가 나와 1984년(쇼와 59년)에는 이바라키현이 개발 수습의 선언을 냈다.

2011년(헤세이 23년) 3월 11일동북지방 태평양바다 지진(동일본 대지진)으로는 흔들림에 가세해 해일액상화로, 카시마항의 항만 설비가 파괴한 것 외 각사의 공장설비에도 큰 피해가 발생, 지진 재해 직후는 조업정지 상태에 빠진[2].

덧붙여 현재[언제? ]의 인구 규모는, 카시마시・가미스시 아울러 약 16만명.

카시마 임해 공업지대 개발 조합

카시마 임해 공업지대 개발 조합(이하, 개발 조합)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카시마 개발」로, 개발에 필요한 공업용지나 이전 대체지의 토지 취득 업무에 해당한 조직이다.당시 , 이바라키현으로부터 파견된 직원이 오토바이를 타, 용지 교섭하러 나간 거점인 개발 조합 카시마 사무소는, 현재의 카시마 센트럴 호텔 니이다테의 위치에 지어지고 있던[3].

개발에 필요한 항만 예정지, 공업용지, 주택 단지, 대체지 등 약 5000 헥타르의 용지를 취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1962년(쇼와 37년)에 설립되어 2년 후의 1964년(쇼와 39년)부터 용지 취득을 시작할 수 있었다.용지 교섭으로는, 토지 지권자에는 4할의 토지를 제공받는 카시마 독자적인 「6・4 방식」이라고 불리는 토지 취득 방식이 놓쳤다.개발이 진행되면, 토지 제공에의 반대도 뿌리 깊고, 대부분이 단신부임자였다고 하는 현으로부터 파견된 많은 개발 조합 직원들에게 있어서는, 곤란한 용지 교섭이 강요당했다고 하는[3].

당시 600명 정도가 일한 개발 조합은 1984년(쇼와 59년)에 해산되어 3층건물 있던 구개발 조합 카시마 사무소는 용지 관계의 서류를 보관하는 창고로서 한때 사용된 적도 있었지만, 그 다음은 거의 사용될 것은 없고, 구사무소나 직원 숙소등이 있던 2만 평방 미터의 현유지가, 이바라키현이나 현지 기업이 출자하는 제3 섹터 회사의 카시마도시개발이 계획한 카시마 센트럴 호텔 니이다테의 건설 예정지로서 재이용되게 되어, 1996년(헤세이 8년) 11월에 구사무소등이 해체되어 1997년(헤세이 9년) 2월에는 빈 터가 된[3].

연표

  • 1960년(쇼와 35년) 4월- 「가시마나다 연안 지역 종합개발계획(시안)」작성[4]
  • 1961년(쇼와 36년) 4월-카미스촌심시바하마에 이바라키현 카시마 항만 조사 사무소가 개설되는[4]
  • 1961년(쇼와 36년) 9월-이바라키현이 「임해 공업지대 조성 계획」(마스터 플랜) 작성[4]
  • 1962년(쇼와 37년) 4월-이바라키현과 카시마마치・카미스마을・하사키마치의 3 도시와 시골에 의해서 「카시마 임해 공업지대 개발 조합」이 만들어져 카시마 사무소가 개설하는[4]
  • 1963년(쇼와 38년) 11월-카시마항 기공식[4]
  • 1964년(쇼와 39년) 2월-개발 조합이 용지의 매수를 개시[4]
  • 1965년(쇼와 40년) 3월-심시바하마・이기리 하마즈미민의 이전처가 카미스마을 오노하라와 결정해, 6월에 이전 개시해 11월에 이전 완료하는[4] [5] [6]
  • 1965년(쇼와 40년) 6월-카미스 면의회는 고노이케 매립을 전원 일치로 가결[4]
  • 1965년(쇼와 40년) 11월-카시마항의 중앙 항로의 굴착 공사가 개시된다.
  • 1966년(쇼와 41년) -진출 기업의 일부(18사) 회사명이 공표[4]
  • 1967년(쇼와 42년) -국철 카시마선기공식[4]
  • 1968년(쇼와 43년) 4월-스미토모 금속공업 카시마 제철소의 기업식이 거행되는[4]
  • 1968년(쇼와 43년) 7월-싯테 공업단지의 조성이 시작되는[4]
  • 1968년(쇼와 43년) -내정 기업에의 토지 양도 예약 개시[4]
  • 1969년(쇼와 44년) 5월-동부 지구 석유화학 콤비나트(11사) 합동 기공식[4]
  • 1969년(쇼와 44년) 10월-사토 총리대신, 미카사노미야 부부를 맞이해 카시마항 개항 기념식전이 거행 되어 카시마항이 개항하는[4]
  • 1970년(쇼와 45년) 2월 6일- 5만 톤의 원유 탱커(타이에이환)가 첫입항해, 카시마 석유 카시마 제유소의 안벽에 첫접안하는[4]
  • 1970년(쇼와 45년) 4월-카시마 석유 카시마 제유소, 미쓰비시유화 카시마 사업소가 창업 개시[6]
  • 1970년(쇼와 45년) 8월 20일-국철 카시마선(북 카시마-카토리)의 개통식이 거행되는[4]
  • 1970년(쇼와 45년) 11월-카시마 임해철도가 영업 운전을 개시[4]
  • 1971년(쇼와 46년) 1월-석유화학 콤비나트 합동 완공식(13사)[4][5]
  • 1972년(쇼와 47년) 10월- 25만 톤의 탱커(재팬・아이리스호)가 입항[4]
  • 1973년(쇼와 48년) 10월-도시 계획법에 따르는 시가화, 동조정구역의 지정[4]
  • 1973년(쇼와 48년) 12월-공업단지 조성 사업의 공사 완료의 공고가 나오는[4]
  • 1984년(쇼와 59년) 7월 31일-카시마 임해 공업지대 개발 조합이 해산되는[6][7].

주된 공업도시

주된 사업소

카시마시
가미스시


그 외

  • 카시마 파라다이스(1972년, 프랑스 영화)
베니・데스와르트, 얀・레・맛손 공동 감독.
1970년에 일본 방문한 2명이, 카시마 임해 공업지대를 무대에, 고도 경제성장기에 있어서의 일본의 현실을 전하는 기록 영화.카시마가 임해 공업지대로 지정되어 개발 경기에 끓는 것과 동시에 농민은 토지를 손놓아, 공장 노동자로 바뀌어가고 말이야 뭐, 한층 더 거기가 환락시골(카시마 파라다이스)에 변모해 나간다.개발에 저항하는 상징으로서 나리타 공항에 반대해 토지를 사수하는 농민의 산리즈카 투쟁도 파악해 간다.마지막에 「카시마는 자본주의의 파라다이스다」의 문언으로 매듭지어진다.1973년도 죨쥬・사두르상을 수상.
보이는 것은 황무지를, 일대 공업지대로 하려고 꿈 꾸는 남자들이, 비릿한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순수하게 이상을 실현하는 용기를, 이바라키현 가시마나다의 임해 공업지대를 백에 그린다.주연은 이시하라 유지로, 원작은 키모토 쇼우지의 「모래의 가십자」.각본은 멧돼지 또 헌오.감독은 나카무라 노보루.촬영은 금우만사가 각각 담당.

관련 항목

각주

  1. ^ a b c d e f g 카와마타 에이이치 1995, pp. 236-238.
  2. ^조업정지 잇따르는 카시마 임해 공업지대, 차・가전 등 강의 하류에의 영향 심대【지도에서 보는 지진 재해 피해】(2011년 3월 23 닛토양경제 온라인 2012년 4월 20일 열람)
  3. ^ a b c 「카시마 개발, 사라지는 상징- 「 개발 조합」사무소 해체」 「이바라키 신문」, 1996년 12월 15 일자 일간, 19면〈사회〉.
  4. ^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카미스마치사편씨위원회저 「카미스의 역사」보급판(카미스마치, 쇼와 59년 7월 1일 발행보다)
  5. ^ a b 카시마 개발의 걸음(가미스시 홈 페이지보다)
  6. ^ a b c 카시마 개발 관계 기념비(가미스시 홈 페이지보다)
  7. ^"카시마 임해 공업지대 개발 조합의 해산(카시마 임해 공업지대 개발 조합) (PDF)", 이바라키현보(이바라키현) 제7266호: p.9, (1995년 7월 30일) 

참고 문헌

  • 카와마타 에이이치 「두 개의 대규모 개발」 「그림 해설 이바라키현의 역사」소 리희부・사쿠마 요시오・츠나노요시히코・사사키은미(편), 카와이데 쇼보 신사, 1995년, 초판,236-238페이지.ISBN 4-309-61108-7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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