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2일 월요일

아디드

아디드

아디드(1150년- 1171년 9월)는, 이집트를 지배한 파티마아침의 제14대, 마지막 칼리프(재위:1160년- 1171년).

제11대 칼리프였던 하피즈의 손자로, 1160년에 11세에 즉위 했다.요즘의 파티마아침은 벌써 말기적 상황에 있어, 국내에서는 정치적 실력이 없는 어린 군주의 아래에서 실권을 둘러싸고 샤왈디르감이 항쟁해, 국외에서는 비옥하고 전략적 중요지인 이집트를 둘러싸고 예루살렘 왕국을 시작으로 하는 십자군이나 잔기아침등의 이슬람 왕조가 호시탐들과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샤왈과 디르감의 항쟁은 1163년이 되면 격화해, 불리한 상황에 빠진 샤왈은 잔기아침에 구원을 요청한다.잔기아침의 누룻디는 부하의 맹장・씰・크후와 그 조카의 사라훗디(사라딘)를 파견해, 1164년에 디르감은 토벌해졌다.

그런데 그 후, 씰・크후의 세력이 파티마아침에 절대가 되었기 때문에, 샤왈은 씰・크후의 배척을 목론 그리고 1168년에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의 군을 이집트에 유인했다.이것에 격노한 씰・크후는 사라훗디와 함께 예루살렘군을 물리쳐, 1169년에는 배반한 샤왈을 살해했다.이것에 의해 씰・크후가 완전한 권력자로서 군림하게 되어, 아디드도 씰・크후를 재상으로 임명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씰・크후는 1169년 3월에 급사해, 그 군은 조카의 사라훗디가 잇게 되었다.아디드는 사라훗디를 새로운 재상으로 임명했지만, 파티마아침의 흑인 내시로 권세를 자랑하고 있던 무타민・아르히라파는, 씰・크후라면 아직 하지도 30세 전후의 사라훗디라면 배척할 수 있으면 오해해, 흑인 노예병을 모아 군사를 일으킴 하려고 했다.하지만 8월의 카이로 시가에서 행해진 바이나르카스라인의 싸움으로 흑인 노예병의 군세는 괴멸 하고 무타민도 살해당해 파티마아침은 완전하게 사라훗디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171년 9월에 22세에 사망했다.아디드의 죽음으로 보다, 파티마아침은 명실공히 단절해, 사라훗디의 아이유브아침의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아디드는 유년에 즉위 했다고 하는 불행도 있지만, 자신이 재능을 타고 나지 않고 정치에도 무관심했던 모아 두어 유력자의 괴뢰로서 궁중에 롱숲 오는 인생을 보냈다.단지, 사라훗디에 대한 흑인 노예병의 반란은 아디드에 의한 모략이라고도 하고 있어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아디드는 사라훗디에 신왕조 창설의 호기를 주어 버린 것이 된다.덧붙여 아디드가 사라훗디와 대립하고 있던 것을 나타내 보이는 방증이 있다.아디드가 죽는 3일전, 사라훗디는 제1 금요일의 후트바(설교)를 압바스아침칼리프무스타디의 이름의 아래에서 행해 이집트에 수나파를 부활시키면(파티마아침은 이스마이르파에서 수나파를 탄압하고 있던), 제2 금요일의 후트바에서는 아디드의 이름을 삭제시키고 있다.이것은 사실상, 사라훗디에 의해서 아디드는 칼리프위가 박탈된 것 같은 것이었다.

참고 문헌

  • 「이스람의 영웅, 사라딘, 십자군과 싸운 남자」(코단샤)
  • 「이스람 사전」(이와나미 서점)
선대:
퍼 이즈
파티마아침
1160년- 1171년
차세대: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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