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일 금요일

해안 방비론

해안 방비론

해안 방비론(인가 위망로응)은 에도시대 후기, 여러 나라의 일본에의 진출에 대해서 생긴 국방 논의.

목차

발단

해안 방비론이 논해지는 발단이 된 것은 18 세기 후반부터이다.홋카이도 앗케시에 온 러시아인 파베르・레베데후=라스트 치킨마쓰마에번에 교역을 요구했다.이 러시아의 접근에 대해, 에조의 처리를 어떻게 할까로 시작되었다.

적극론

쿠도병조, 하야시 시헤이, 혼다 도시아키, 사토노부히로등이 주창한 것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에조지에 진출해 그 경영에 착수 해야 한다고 말했다.그 중에서도 하야시 시헤이는 해안 방비의 구체책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어 그것은 후의 국방책의 지침이 되었다.

또, 가모 군페이는 주전론을 주장해, 미토파는 격렬한 양이론을 주창했다.

소극론

나카이 치쿠잔, 나카이 류타로등이 주창한 것으로, 에조지는 국경외의 벽지이며, 그러한 미개지를 개발 경영하는 것은 장난에 국력을 소모하는 것만으로 있다고 말했다.다누마오 기쓰구의 에조 개발 계획을 중지시킨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처음은 소극 논자였다.

에도막부 말기의 해안 방비론

그러나, 러시아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선의 진출이 격렬하고든지 특히 라크스만, 레자노후의 래항, 페톤호사건등에 의해서 에도 막부 전체가 적극론에 기울기 시작해 1802년에는 에조봉행(후에 에도 막부의 직명, 마쓰마에 부교)이 설치되었다.

또 여론도 에조지만의 문제로 하지 못하고, 나라를 주어 해안 방비 문제가 논의되게 되었다.

이러한 논의는 대체로 탁상 공론이 되기 쉬웠지만 , 페리하리스의 래항에 의해 여러 나라와의 관계가 「불평등 조약 체결」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정치상의 문제에까지 발전하면 에조지의 경영으로부터 출발한 단순한 해안 방비론도, 그 성격의 변모를 피할 수 없게 되어 장군 후계자등의 국내 문제와 관련되고, 더욱 더 복잡하게 되어 에도막부 말기에 이르렀다.

참고 문헌

  • 카와구치소생 「 「에도막부 말기 유신」을 알 수 있는 키워드 사전」2004년, ISBN 9784569661421.
  • 코바야시다가사 「바다의 아시아사」1997년, ISBN 9784894340572.
  • 요시오카 타카시 「에도의 방랑자들」2003년, ISBN 9784821108497.

관련 문헌

  • 카나자와 히로유키 「타케가와 가나조우시의 제 2권의 해군 구상--「호국론」을 중심으로」일본 역사 770,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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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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