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13일 금요일

몰 비츠의 싸움

몰 비츠의 싸움

몰 비츠의 싸움
Schlacht bei Mollwitz.jpg
전쟁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연월일1741년4월 10일
장소슈레이지엔, 브리크(독일어판) 남서 몰 비츠(독일어판)
결과:Pruisen 승리
교전 세력
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701-1750).svgPruisen Banner of the Holy Roman Emperor (after 1400).svg오스트리아
지도자・지휘관
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701-1750).svg프리드리히 대왕
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701-1750).svg슈베린백클트・크리스토프
Banner of the Holy Roman Emperor (after 1400).svg나이페르크백빌헤임・라인하르트
전력
23,400[1] 16,600
손해
사상 3,900
포로 700
사상 3,000
포로 1,500
포 7문

몰 비츠의 싸움(몰 비츠의 투쟁, 독일어: Schlacht bei Mollwitz)은,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초기의 1741년 4월 10일Pruisen오스트리아와의 사이에 행해진 회전(대규모 작전)이다.Pruisen군이 승리했다.이 싸움은 본계승 전쟁으로 제일 처음에 실시된 회전(대규모 작전)이며, 이 싸움으로 Pruisen가 오스트리아를 물리친 것으로, Pruisen가 열강의 지위에 오른 것을 여러 나라에 인상지웠다.

목차

배경

1740년 12월, 신성 로마 황제 컬 6세의 사망을 계기로서 갑자기 슈레이지엔에 쳐들어간 프리드리히 대왕 인솔하는 Pruisen군은, 불과 1개월반의 작전에서도는, 그로가우, 브리크(독일어판), 나이세의 삼요색상 슈레이지엔(독일어판)메이렌 국경 주변 지역을 제외한 전슈레이지엔의 제압에 성공했다.

마리아・텔레 차아는 대왕의 슈레이지엔을 인도하면 아군이 되려는 권유를 거절해, 메이렌의 오르뭉트에 군을 집결시켜 지휘관의 나이페르크에 먹이나일까 반격을 명했다.대왕은 요새 공략에 부대를 할애하는 한편으로, 자신은 상 슈레이지엔(독일어판)에 있어 메이렌으로부터의 공격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오스트리아군의 행동 개시는 눈 풀 수 있어 후라는 관측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부대를 분산시킨 채 그대로였다.

나이페르크군은, 아직 눈의 깊은 이 시기에 산지를 답파 해 특크만텔(독일어판)에 출, 저항을 받지 않고 슈레이지엔에 들어가는 것에 성공했다.오스트리아군의 전개한 후자르 부대에 의해서 Pruisen군의 경계 부대는 활동이 제한되고 있어 대왕은 산을 넘을 수 있었던 후에 나이페르크군의 행동을 알았다.대왕은 상 슈레이지엔에 넓게 전개하고 있던 제부대를 즉시 집결시키는 것과 동시에, 나이세와 브리크의 포위 부대에 철수해 본대에 합류를 도모하도록(듯이) 명했다.대왕은 한층 더 후란켄슈타인(독일어판)으로 그라트(독일어판)로부터의 침입을 경계하고 있던 호르슈타인=베크(독일어판)의 부대에도 달려 들도록 지시를 보냈지만, 벌써 그라트로부터 렌트르스의 기병 부대가 나이세 방면으로 침입하고 있고, 명령이 닿지 않았다.

4월 5일, 나이세의 구원에 성공한 나이페르크군은 그대로 북상해 브리크와도 연락을 붙이는 것에 성공하면, 이번은 서진해 Pruisen군과 본국과의 연락을 완전하게 끊는 것을 목표로 해, 최종적인 목표인 브레스라우의 앞에 있는 Pruisen군의 기지, 오라우(독일어판)로 향했다.오스트리아군을 급추 하는 Pruisen군은 우군과의 합류를 거듭해 4월 8일 그라트・나이세강(독일어판) 서해안에 건너, 오라우를 구할 수 있도록 나이페르크군과의 회전(대규모 작전)을 기도 하고 있었다.적설때문에 양군 모두 기동이 신속하지 않고, 서로 그 행동에는 시간이 걸렸다.또 4월 이후 슈레이지엔은 날씨가 악화되어 자주 눈보라에 휩쓸리고 있어 그 결과 양군의 기병 척후는 함께 적을 잃어, 양지휘관은 상대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않았다.

4월 9일, 나이페르크군은 브리크 남서 몰 비츠(독일어판) 마을에 도착해, 거기를 중심으로 수마을에 숙영 했다.나이페르크는 Pruisen군이 어느 근처까지 가까워지고 있는지 알지 않고, 접근해 온다고 해도 아직 1일 2일의 여유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오스트리아군은 요새 구출을 최우선 해 겨울의 산을 넘음을 실시해, 그대로 빈약한 보급으로 행군을 계속했기 때문에 군사가 피로하고 있어, Pruisen군의 접근을 받기 전에 병사에 휴식을 주려고 나이페르크는 생각했다.하지만, 실제로는 Pruisen군은 바로 거기, 몰 비츠 남동의 포가렐(독일어판) 마을에 있었다.

Pruisen군 쪽에서도 눈속 행군을 위해서 군사는 피로해, 적의 봉쇄선을 위해서 오라우와 연락을 붙일 수 있는 두, 또 호르슈타인=베크와의 합류에 실패하는 등 상황은 반드시 좋지 않았지만, 대왕은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할 의사를 굳히고 준비를 거듭하고 있었다.

전투 서열

전투

전개

4월 10일, 이 날은 전날까지 과는 달리 쾌청이 되었다.오전 5시, Pruisen군은 진을 정리하고, 오스트리아군을 발견하면 금방이라도 회전(대규모 작전)에 돌입할 수 있도록 종대를 짜, 오라우로 향했다.

오전 10시경, 몰 비츠 남동 노이드르후로 Pruisen군전위인 로텐브르크의 기병 부대가 오스트리아군의 초계 기병과 접촉해, 이것을 해산시켰다.대왕은 현지 주민으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이 몰 비츠에 숙영 하고 있다라는 통보를 받고 회전(대규모 작전)에 반입할 수 있도록 일로 몰 비츠를 목표로 했다.한편의 오스트리아군은 이 날을 휴양에 댄다고 정하고 있었으므로 몰 비츠로부터 움직이지 않고, 한가로이 점심 식사 준비등 하고 있었더니, Pruisen군이 접근중이라는 보고에 접하고 나이페르크는 당황해서 자군 부대에 전개를 명했지만, 예기치 않은 적의 출현에 병사들은 격렬하게 혼란했다.

노이드르후를 통과한 Pruisen군본대는 몰 비츠에 접근을 개시해, 대왕은 자군에게 전열의 전개를 명했다.Pruisen군은 이 때 평소의 훈련에 따라서 정형 대로에 이중 전열을 형성했지만, 모처럼 적의 전투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융통성이 없게 전열을 마련하는 것에 구애받아, 또 Pruisen군은 당분간 실전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으므로 전개 시에 많이도 끊는 있었다고 까닭[2], 그 결과 오스트리아군은 완전한 기습을 받는 것부터 면했다.이 때 Pruisen군은 우익단을 헤룸스드르후(영문판) 마을에, 좌익단을 라우크 비츠(영문판) 강에 각각 맡겨 전진한다고 정했지만, 거리의 눈짐작을 잘못해, 슈렌브르크의 우익 기병과 헤룸스드르후의 사이에 간격이 생기고 있었다.한편으로 제일 전열의 보병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흘러넘쳐 버려, 전열간의 이음에 돌려져서도 했다.전자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지만, 후자는 결과적으로 잘 작용했다.

오후 1시경, Pruisen군은 전개를 완료해, 몰 비츠를 향해서 북서로 공격 전진을 개시했다.포병의 전진 사격이 시작되면 오스트리아군은 많이에 총격당해 이것에 대해서 오스트리아군포병은 수가 적은 데다가 배치가 혼란하고 있어 유효한 반격을 실시할 수 없었다.Pruisen군전열 가운데, 대왕은 앞열 우익의 지휘를 뽑아, 좌익은 슈베린에 맡겨 뒷줄은 젊은 젯사우가 지휘했다.대왕은, 오스트리아군기병의 능력이 자군의 것보다 우수한 것을 지금까지의 소전투의 모습으로부터 느끼고 있었으므로, 이 싸움으로는, 그들의 돌격의 위력을 없애기 위해서, 기병 군단가운데 수류탄병대대를 편입하는 조금 구 바뀐 배치를 채용한[3].

오스트리아군기병의 돌격

오스트리아군의 전열 전개는 Pruisen군이상으로 시간이 걸려, 적이 전진을 개시해도 아직 전개를 끝내지 않았었다.레머(독일어판)의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좌익의 기병 군단은 한발 앞서 전개를 완료하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이페르크가 중앙과 좌익의 배치 조정으로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행동에 대한 지시를 얻을 수 없었다.당분간의 사이 레머 군단은 Pruisen군포병에게 일방적으로 총격당하는 것을 참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이 때 Pruisen군우익 기병이 중앙의 부대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움직임을 멈추어 또 우측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봐 레머는 단지 치노 공격을 결단한[4].

 
자군 기병을 고쳐 세우려고 하는 프리드리히 대왕

오후 1시 반경, 레머 기병 군단은 한 번 북동으로 기동 한 뒤 오른쪽으로 급선회 해, Pruisen군우익에 돌격 했다.슈렌브르크의 기병 군단은 이것을 회피하는 일도 대항 돌격을 실시할 수도 있지 않고, 분쇄되었다.슈렌브르크는 오스트리아군기병에게 사벨로 얼굴을 찢어져져 한쪽의 안구가 안와로부터 흘린 것 빈손 내렸다.슈렌브르크는 더 전투를 속행했지만 곧 머리를 총격당해 전사했다.

오스트리아군기병은 그대로 Pruisen군기병을 몰아내 혹은 보병 전열에 돌격 했다.보병 전열의 전에 나와 있던 Pruisen군포병은 기병에게 습격당해 전사할까 포를 방폐 할 수 밖에 없었다.대왕은 우익 군단중의 빈터 펠트 수류탄병대대를 만나 기병에게 통솔을 되찾으려고 해, 중대 단위로 재편성 한 기병을 차례차례로 송리 냈지만, 달군 돌에 물이었다.Pruisen군기병은 패주 해, 일부는 자군 좌익까지 도망쳐 다녔다.오스트리아군기병은 계속해서 Pruisen군보병 전열에 쇄도했다.

좌익으로부터 슈베린이 달려 들었을 때, Pruisen군우익은 심한 혼란에 습격당하고 있었다.오스트리아군기병이 Pruisen군보병 전열의 주위를 종횡에 돌아다니며 틈을 찾고 있어 보병 부대는 각개에 발포하고 적을 접근하지 않든지 필사적이 되고 있었다.대왕의 바로 눈앞에서 왕족의 한 명 브랑 덴 부루크=슈베트 변경백프리드리히가 포탄의 직격을 받아 목으로부터 위를 날려 버려졌다.슈베린은, 회전(대규모 작전)의 패배는 얼마든지 만회가 붙지만 왕의 생사는 왕관의 문제 그렇다고 해서 전장으로부터의 퇴피를 권했다.대왕은 한 번은 거부했지만, 또 보병 전열에 대해서 돌격을 하고 이것을 치웠지만, 언제까지 가진 것일까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다.

슈베린은 재차 대왕에게 피난을 요구해 여러 장군도 이것에 동조했다.오후 4시경, 대왕은 슈베린에 지휘를 맡겨 전장을 이탈했다.

Pruisen군보병의 공격

슈베린은 대왕을 피난시킨 후, 자군 보병이 여전히 건재한 것을 깨달았다.Pruisen군보병은 오스트리아군기병의 돌격을 죄다 뒤집어, 그때마다 대손해를 주고 있었다.오스트리아군기병은 보병 전열의 정면이라고 하지 않고 측면이라고 하지 않고 습격해, 한 번 등은 제2 전열의 후방에까지 돌아 공격했지만 성과를 유리한 샀다.이열의 전열간에 돌입하자 말하는 시도는 측면을 차지하는 2개대대에 의해서 저지되었다.

슈베린은 재차 우익 보병 부대에 교대 일제 사격에 의한 오스트리아군기병에게의 공격을 명했다.요즘 레머는 벌써 Pruisen 용기병의 총탄을 받아 전사하고 있어, Pruisen군의 화력에 의한 공격이 활발하게 되면 오스트리아군기병은 산산조각 했다.같은 무렵에, 레머 군단 원호를 위해서 뒤늦게나마 전진해 온 게르듀의 좌익 제일보병 전열이 Pruisen군보병과 교전에 들어갔지만, 그 움직임은 몹시 완만하고, Pruisen군의 활동이 활발하다라고 알자마자 주저해 , 게르듀가 전사하면 원래의 위치에 후퇴했다.

적의 공격을 격퇴한 Pruisen군으로는, 어느 장군이 슈베린에 어느 쪽의 방향으로 철퇴하는지 물으면, 슈베린은 「적병의 시체를 넘어」라고 대답[5], 많은 손해를 낸 우익 대열의 재편성을 실시하게 해 오스트리아군본대에 대해 다시 공격 전진을 시도했다.Pruisen군의 접근에 놀란 나이페르크는, 돌아올 수 있던 좌익의 레머 군단의 잔여와 우익의 베르리힌겐의 기병 군단에 Pruisen군보병을 공격 시키려고 했지만, 좌익 기병은 Pruisen군포병의 포격에 의해서 되돌려 보내져 우익의 베르리힌겐은 Pruisen군좌익의 포사드후스키의 기병 군단에 저지되었다.베르리힌겐은 스스로 적에게 돌격 하는 것으로 기병을 싸우게 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추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내, 마음대로 후퇴하려고 하는 부하 몇사람을 벤[6].

나이페르크는 이전 자군의 보병에 몇번이나 전진을 명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Pruisen군보병이 시체루들의 전장을 일사 흐트러지지 않는 행군으로 전진해 오는데 우려를 이루어 명령을 거부했다.Pruisen군의 민첩한 포격을 받으면 오스트리아군의 전열은 동요해, 그 다음에 사격전에 들어가면, 우세한 Pruisen군의 화력에 직면했다.이 때 오스트리아군보병은 2번째의 제 쏘아 맞혀를 끝내는지 끝내지 않는지 중에 Pruisen군보병으로부터 5제 쏘아 맞혀 받았다고 여겨져 조금이라도 그 속도를 따라 잡기 위해서 그들은 총알이 다져 동작 없이 발포했지만, 당연한 일이면서 발사된 총알은 위력을 가지지 않았던[7].적의 사격에 압도 된 오스트리아군의 병사들은 전의를 잃고 열을 어지럽혀, 공황 상태에 빠진 신병이 서로 누군가의 뒤로 숨으려고 하므로 횡대가 종대가 되어, 한층 더 거기로부터 도망하는 사람이 잇따랐다.

오후 7시 반경, 전열의 붕괴해 나가는 상태를 봐 이미 군을 유지할 수 없다고 관념한 나이페르크는 전군 철퇴를 명했다.벌써 해가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은 대규모 추격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결과

회전(대규모 작전) 패배 후, 나이페르크군은 나이세까지 철퇴하지만, 이 때, 늦고 후란켄슈타인으로부터 온 호르슈타인=베크의 부대가 정확히 나이페르크군의 바로 서쪽을 통과하려고 했다.나이페르크는 위험하게 협공을 받는 (곳)중에 있었지만, 호르슈타인=베크는 나이페르크를 깨닫지 않고 그대로 북상했으므로 이것을 면했다.

한편 요즘, 전장을 이탈한 대왕은 나이세 가와히가시기슭에 건너, 한밤중에 옵페룬에 도착해 거기에 피난하려고 했다.그런데 옵페룬은 벌써 바라냐이의 분견대에 의해서 점거되고 있고, 거리에 개문을 요구했는데 문의 안쪽으로부터 발포되어 당황해서 거기로부터 피했다.결국 대왕은 레이베(독일어판) 마을에 잠복하고 있던 참, 슈베린이 파견한 장교가 그를 찾아 내 주어 자군 승리를 알았다.

이 싸움은 Pruisen군과 대왕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대왕은 후에 「이 싸움은 나와 나의 군에 있어서의 학교에서 만났다」라고 쓴[8].대왕은 이후, 승패가 밝혀질 때까지는 결코 전장으로부터 떠나지 않는과 결심해, 사실 그처럼 했다.대왕은 수훈자인 슈베린을, 자신을 전장으로부터 배제하려고 했다고 말해 비난 했다.한편, 이 싸움에 대해 「 나와 나이페르크 원수와 어느 쪽이 보다 많은 잘못을 범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다」[9]일을 인정했다.대왕은 밝혀진 군의 문제점의 개선에 전쟁중으로부터 정력적으로 맞붙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맛이 없는 기병을 남겼다」라고 후에 대왕은 쓴[10].당시의 Pruisen군기병은 프리드리히・빌헤임 1세의 기호에 따라 대형마를 활발히 이용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움직임이 늦고, 곧 체력을 소모했다.승객도 몸집이 큰 사람이 많은 데다가, 마술보다 보병의 교련에 잘 통하고 있는 상태로, 교련의 내용에 대해서도 보병에 비교해 그 훈련, 전법은 구래의 것으로부터 진보하지 않았다.대해 오스트리아군은 대터키전에 의해서 단련된 우수한 기병을 많이 안고 있어, 그 차이가 이 싸움으로 밝혀졌다.

또 이 싸움으로는, 오스트리아군은 전군의 약 반수를 기병이 차지한다고 하는 이례의 편성이 되어 있었다.이것은 헝가리로부터의 보병 부대의 전진이 늦었으니까이지만, 비교해 Pruisen군은 전군 중 기병이 차지하는 비율은 2할 정도이며, 이것이 당시의 평균적 비율이었지만, 이 때문에 기병에 대해서는 수 위에서도 오스트리아군이 Pruisen군에 대해서 우세했다.

한편으로 보병에 대해서는 Pruisen군 쪽이 압도적으로 우수했다.규율도 훈련도 두루 미치고 있어 그 때문에(위해) 레머가 5도[11]에 걸치는 돌격을 감행 품질, Pruisen군은 유지할 수 있었다.

「몰 비츠의 싸움에 대하고, Pruisen군은 화전의 위력을 최고도에 발휘해, 그 이후 이것을 능가하는 실적이 나타나지 않았다」라고 크라우제빗츠는 평가한[12].대왕은 Pruisen군보병의 규율과 련도를 칭찬해, 그 우수함을 재차 인식했다.오스트리아군의 장교는 Pruisen군보병의 전투의 모습을 강력하게 인상지울 수 있어 여러가지로 못 쓰고 남겼다.「그들은 훌륭한 전열로 한걸음 한걸음 진행되어 왔다.포병은 포탄과 산탄을 간단 없게 공격해, 한 번 매스 모포의 사정내에 들어가면 사격은 일순간도 멈추지 않는다」[13]「 나는 이러한 뛰어나게 우수한 것을 본 적이 없다.그들은 완전히 훌륭한 통제로, 주형과 같이 똑바로, 열병 행진인 것 같이 행진했다.닛코에 빛나고 있던 그들의 무기는 훌륭한 효과를 발휘해, 그들의 사격은 끝나지 않는 천둥소리의 영향이었다」[14]

대하는 오스트리아군의 보병은 스페인 계승 전쟁 시대부터 별로 진보하지 않고, 각 연대의 교련의 방법에 통일은 없고, 장비의 면에서도 Pruisen군보병이 철제의 삭장을 채용하고 있던 것에 대해, 오스트리아군의 물건은 여전히 목제였다.당시 Pruisen군은 오스트리아군이 3발 공격하는 동안에 5발 공격한다고 말해져[15], 그렇지 않아도 크게 열등하고 있었는데, 이 때의 오스트리아군보병의 각 연대는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서둘러 모은 신병을 적지 않이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러했다.이 싸워에 있어서의 오스트리아군보병의 화력 발휘는 당시의 전유럽에서 가장 빈약했다고 여겨지는[16].보병에 대해서는 오스트리아의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몰 비츠의 싸움의 후, 오스트리아군은 나이세 이동의 확보에는 성공했지만, Pruisen군이 브리크를 공략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었다.대왕은 브리크 공격의 한중간부터 자군 기병에게 맹훈련을 부과해 그 개선에 노력했다.

이 싸움은 군사적으로는, 양군의 손해는 호각인가, 오히려 Pruisen군 쪽이 많았기 때문에 Pruisen의 신승이라고 하는 곳(중)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큰 효과가 있었다.이 승리에 의해서 제국은 Pruisen를 유력한 국가이다고 인정해 오스트리아와 계쟁하고 있던 각국의 사절이 선두를 다투어 대왕의 진지를 방문했다.그 결과, Pruisen는 프랑스바이에른 선제후 컬・알 치우침 사람의 황제 즉위에 대해 합의에 이르러, 아울러 15년의 동맹을 맺었다.무엇보다, 대왕에게는 프랑스나 바이에른을 살릴 생각은 전혀 없고, 슈레이지엔을 얻은 이상은 서서히 오스트리아와 강화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러나, 영국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원조가 기대되고 있었으므로 마리아・텔레 차아의 철저 항전의 태도는 당분간 변하지 않았다.

참고 문헌

  • S.피셔=화비언저\오자키 켄지역 「사람은 어떻게 왕이 될까」(일본 공업신문사, 1981년)
  • 크라우제빗츠저\시노다 히데오역 「전쟁론」(이와나미 문고, 1968년)
  • 하야시 겐타로, 호리고메고3편 「세계의 전사 6 루이 14세와 프리드리히 대왕」(인물 왕래사, 1966년)
  • 쿠보타 마사시 「하프스브르크가나 구전 옷깃 유럽 군사사의 한 단면」(금정사, 2001년)
  • 역사 군상 그래픽 전사 시리즈 「전략 전술 병기 사전 3 유럽 근대편」(학습연구사, 1995년)
  • Reed Browning 「The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New York: St Martin's Press, 1993년)
  • David Chandler 「The Art of Warfare in the Age of Marlborough」(UK: SPELLMOUNT, 1990년)
  • Christopher Duffy 「Frederick the Great A Military Life」(New York: Routledge, 1985년)
  • Christopher Duffy 「The Army of Frederick the Great」(Chicago: The Emperor's Press, 1996년)
  • Christopher Duffy 「The Army of Maria Theresa」(UK: DAVID & CHARLES, 1977년)
  • Dennis E.Showalter 「The War of Frederick the Great」(New York: LONGMAN, 1996년)
  • Robert B. Asprey 「Frederick the Great The Magnificent Enigma」(New York: Ticknor & Fields, 1986년)
  • Thomas Carlyle BATTLE OF MOLLWITZ

각주

  1. ^ David Chandler 「The Art of Warfare in the Age of Marlborough」306페이지.제기 있지만 지금 이 표에 따른다.
  2. ^ Robert B. Asprey 「Frederick the Great The Magnificent Enigma」199페이지.
  3. ^이것은 그스타후・아돌프룽트의 싸움으로 간 예를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4. ^「세계의 전사」에 의하면 나이페르크는 이 상황으로 회전(대규모 작전)에 돌입하는 것을 싫어해 결전 회피를 위해서 레머의 기병 군단을 투입했다고 한다.지금 타서의 기술에 따른다. 하야시 겐타로 「세계의 전사 6 루이 14세와 프리드리히 대왕」220페이지.
  5. ^ Robert B.Asprey 「Frederick the Great The Magnificent Enigma」202페이지.
  6. ^ Christopher Duffy 「The Army of Maria Theresa」149페이지.
  7. ^ Christopher Duffy 「The Army of Maria Theresa」149페이지.
  8. ^「HISTOIRE DE MON TEMPS.」CHAPITREⅢ.
  9. ^「HISTOIRE DE MON TEMPS.」CHAPITREⅢ.
  10. ^ Christopher Duffy 「The Army of Frederick the Great」141페이지.
  11. ^하야시 겐타로 「세계의 전사 6 루이 14세와 프리드리히 대왕」221페이지.
  12. ^크라우제빗츠 「전쟁론」중 133페이지.
  13. ^ Robert B. Asprey 「Frederick the Great The Magnificent Enigma」203페이지.
  14. ^ Robert B. Asprey 「Frederick the Great The Magnificent Enigma」202페이지.
  15. ^하야시 겐타로 「세계의 전사 6 루이 14세와 프리드리히 대왕」221페이지.
  16. ^ Dennis E.Showalter 「The War of Frederick the Great」4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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