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6일 금요일

오카 마사오

오카 마사오

오카 마사오(언덕 마사오, 1898년(메이지 31년) 6월 5일- 1982년(쇼와 57년) 12월 5일)은, 일본의 민족학자.전시중 전후를 통해서 일본의 민족학・문화인류학을 주도했다.형(오빠)는 민족학이나 고고학, 산악서의 명저를 다수 출판한 언덕 서원 점주 오카 시게오.아들에게 문화인류 학자 언덕 지쿠마.

목차

경력

나가노현 히가시치쿠마군 마츠모토쵸(현마츠모토시) 출생.구제 마츠모토 중학(현・나가노현 마츠모토 후카시 고등학교), 제2 고등학교를 거치고, 1924년,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사회학과를 졸업.졸업 논문은 「조기 사회 분화에 있어서의 주적 요소」.도쿄 여자 치과의학 전문학교의 독일어 교사를 거치고, 1925년(타이쇼 14년)부터 야나기다국남과 함께 민족학 잡지 「민족」을 공동 편집해, 언덕 서원으로부터 간행했다(~1929년).1929년(쇼와 4년), 시부사와 게이조의 원조를 얻고 오스트리아에 건너, 빈 대학빌헤임・슈미트의 아래에서 민족학을 배운다.1933년(쇼와 8년)에 같은 대학학보다 박사 학위가 수여된다.

1935년(쇼와 10년)에 귀국해, 1937년(쇼와 12년)에는 일본 민족학회가 주최한 치시마 가라후토 조사에 수행.1938년(쇼와 13년), 빈 대학이 설립한 일본 학연 연구소의 소장으로서 초대되고 전황이 악화되는 1940년(쇼와 15년)까지 다시 빈에 체재했다.귀국후는 문부성 직할의 민족 연구소 설립에 분주 해, 1943년(쇼와 18년)의 동연구소 발족시에는 총무부장으로서 종사.

전시하의 국책 기관에서 만난 민족 연구소는 패전과 함께 폐쇄되어 언덕도 당분간은 고향의 마츠모토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그 후, 일본 민족학 협회 이사장으로서 학계에 복귀해, 1951년(쇼와 26년)의 동경 도립 대학에의 부임을 시작으로, 메이지 대학 교수, 도쿄 외국어대학 교수, 도쿄 외국어대학 아시아・아프리카 언어 문화 연구소 소장, 와요 여자 대학 교수등을 역임해, 많은 연구자를 지도했다.

주요 저서 「고일본의 문화층」

빈 대학에 제출한 박사 논문 「고일본의 문화층」은, 당시의 빈 학파 민족학의 수법을 베이스로, 선사・고고학, 언어학, 종교학, 형질 인류학, 신화학의 수법을 아울러 일본의 기층 문화를 논한, 5권 1452 페이지에 이르는 일생의 대저이며, 과작이었던 언덕에 있어서는, 확실히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현재에 이르는 것도 국역은 없지만, 2012년에 독일어 원문으로 출판된[1].전후의 1948년(쇼와 24) 5월 4일부터 6일에 걸치고, 도쿄 칸다의 커피숍 2층에서 행해진, 민족학자의 이시다 에이이치로나 고고학자 에가미나미오야와타 이치로등이라는 좌담회의 내용을 정리한 「일본 민족의 기원」은, 언덕의 논문의 내용을 기초로서 전개되고 있다.또, 스미타니 카즈히코가, 언덕의 논문의 목차 부분을 국역 해 간단한 소개를 더하고 있는[2].논문 「고일본의 문화층」의 독일어(뜻)이유를 도운 알렉산더・스라비크는, 언덕의 문제 의식이나 방법론에 큰 영향을 받아 「고조선의 문화층」이라고 하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해, 박사 학위를 취하고 있는[3].

평가

언덕이 유학한 당시의 빈 대학 민족학 연구소에는, 빈 학파로 불리는 슈미트나 빌헤임・콥파스, Heine・게르데룬 등 문화사적 민족학의 황금기를 지지한 연구자가 결집하고 있어, 언덕에 의한 학설 소개는, 그가 이용하는 「에트노스」나 「종족 문화 복합」등의 개념과 함께 당시의 일본의 민족학에 큰 이론적 영향을 주었다.또 「좌담의 명수」라고 칭해졌을 정도에, 교육자 혹은 이론적 지도자로서의 재를 발휘했다.

더해 민족학이 아직도 대학에 기반을 가지지 않았던 시대에, 인류 과학 전반의 연구회 「APE회」나 잡지 「민족」의 편집 작업을 통해, 학회 조직화의 토대가 되는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전후의 학제의 아래에서는 동경 도립 대학 대학원에 재빨리 사회인류학의 전공을 마련해 도쿄대학이시다 에이이치로와 함께 대학에서의 문화인류학의 연구・교육제도의 구축에 공헌하는 등, 민족학 초창기의 organizer로서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한편, 전쟁 전・전시중, 식민지에 있어서의 민족 정책의 요청으로부터, 민속학은 국책으로서 중용 되고 있었다.언덕 자신, 문부성 민족 연구소의 설립등을 통해서, 정부나 군부와 민족학자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입장에 있던 것으로부터, 학문과 식민지 주의의 관계를 검증하는 인류학사로는 비판적으로 그려지는 것도 많은[4].

저작

번역

  • 샤롯트・소피아・반 「민속학개론영국민속학협회발간」, 언덕 서원, 1927년.
  • 오스왈도・멘긴 「석기시대의 세계사」상권, 성기서점, 1943년.
    • 하권은 미간.하권 목차의 국역만 상권에 수록.

해설・평전

각주

  1. ^ Oka, Masao, Kulturschichten in Alt-Japan, 2 Bde., herausgegeben und mit einer Einleitung versehen von Josef Kreiner, Bonn: Bier'sche Verlagsanstalt, 2012.(서평:「문화인류학」79권 2호, 2014년, 야마다 히토시 집필).[요점 페이지 번호]
  2. ^스미타니 카즈히코 「오카 마사오 「고일본의 문화층」-혹루소묘-」 「역사 민족학 노트」미라이사, 1983년, 173~197페이지.
  3. ^ A・스라비크 「일본 문화의 코조우」미래사, 1984년, p. 9。
  4. ^사카노 토오루 「제국 일본과 인류학자1884-1952년」경초서방, 2005년.[요점 페이지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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