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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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 전쟁 Arrow Wa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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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고포대에 공격한 영국군의 67 보병대(67 th Foo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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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한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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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센게린틴 | ![]() ![]() ![]() ![]() ![]() |
아로 전쟁(아로 전쟁, 영어)은, 1856년부터 1860년에 걸쳐 청과 영국・프랑스 연합군과의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최종적으로 북경 조약으로 종결했다.전쟁의 이유의 한 살인 중국인에 의한 많은 외국인 배척 사건 중의 상징적인 사건이 아로호사건이었기 때문에 아로 전쟁과 일본에서는 호칭되는 경우가 많다.전쟁이 아편 전쟁에 이어 일어났기 때문에 제2차 아편 전쟁(Second Opium War)이라고도 부른다.
목차
아로호나포 사건
1839년 9월에 무력행사가 시작된 아편 전쟁의 강화 조약으로서 1842년에 체결된 남경 조약의 규정에 의해, 영국은, 청나라에 대해, 종래의 광동(광저우)에 가세해 하문, 복주, 영파, 샹하이의 합계 5항을 개항시켜, 각각 영사를 두는 것, 또 홍콩의 할양도 인정하게 했다.그리고, 광동 13행과 같은 특허 상인이, 무역을 독점해, 징세 청부를 실시해, 외국 상인이나 외국선의 보증인이 되어 그것들을 강한 통제하에 둔다, 라고 하는 종래의 제도를 폐지시켰다.또, 남경 조약 체결 후 약한동안에 연결된 제협정에 의해, 공정 공평한 관세율의 설정, 영사 재판권, 최혜국 조항, 개항 오항에 각각 군함 한 척을 정박할 수 있을 권리등이 결정되었다.또 청나라 중앙정부는 공식으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당시의 흠차대신기영이 장강 하구 이남의 아편 무역을 비공식에 묵인했다.
남경 조약 및 그 후 연결된 제협정에 의해, 홍콩에 주재하는 영국 공사겸홍콩 총독에 대한 중국측의 외교의 창구는, 광동(광저우)에 거의 상주하게 되는 광동흠차대신이 담당하게 되었다.이것에 의해서, 영국측의 청나라 관리와의 접촉 방법이, 아편 전쟁전의 공행상인을 개재시킨 간접적인 구조로부터 크게 개선해, 직접 접촉이 가능해졌다.또 개항 오항의 각 영국 영사는 길(성아래에 놓여진 행정구분 )에 놓여진 도대(길의 장관)로 접촉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그러나 북경에 외교 사절이 상주하는 것은 인정받지 못했다.
또 아편 전쟁 후, 광동(광저우) 내외의 주민의 사이에 외국인 배척 운동이 왕성이 되었다.1842년 12월에는 대규모 광저우 영국 상관 화공 사건이 일어났다.이 시기부터 영국인을 대상으로 한 폭동이 빈발하게 된다.1846년 1월에 양광총독기영과 광동순무 노랑은□은 광저우의 성벽에서 둘러싸인 중국인마을에 영국인이 입성 하는 것을 일단 인정했지만, 이것에 반대하는 군중이 광저우부지부의 집무곳과 주거를 화공 했기 때문에 영국인 입성 허가를 취소했다.1847년 3월에는 광저우에 가까운 불산진으로 영국인 6명, 미국인 1명이 주민으로부터 투석을 받는다고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이것에의 구전으로서 홍콩으로부터 군함을 파견해 광저우항의 영국 상관거리를 점령했다.그 후도 1847년 12월에는 광저우로부터 3마일 상류의 노랑죽기로 영국 청년 6명이 즈타즈타에 찔러 죽여진다고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그 후 다시 입성 문제에 대해 재제기되어 후임자가 교섭을 개시하는 것의 청나라측의 방침이 정해지지 않고 입성 문제는 일시 보류되었다.격렬해지는 배외주의 활동을 단속하도록, 때의 영국 외무 대신 파마 스톤은 북경의 청조 정부에 강한 항의를 실시했다.
1850년대 초기의 영청관계에 대해 외교면과 통상면의 2개의 측면에서 문제가 떠올라 오고 있었다.남경 조약의 개정 교섭도 1854년부터 개시되었다.
우선 외교면에서는 영국의 영국 공사겸홍콩 총독과 청나라 광동흠차대신이라는 교섭으로는, 입성 문제를 통해서 흠차대신과 청나라 중앙과의 의사 통일이 되지 않고 많이 혼란했다.영국 정부는, 청조 중앙정부와 직접교섭을 시도했지만, 청나라 중앙정부는, 외교의 창구는 광동흠차대신이다고 하여 이것을 찌르기나 했다.영국 정부에 있어서는 영국인의 광저우 입성의 권리와 다른 체재지에서의 안전 확보를 얼마나 실행하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였지만, 광동흠차대신이라는 교섭은 혼란에 의해 지들로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은, 북경의 청나라 중앙과 직접교섭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 것이 부디 필요하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이것은 후에 북경에 상주 외교 사절단과 상주 공사관의 설립을 지향하는 것에 연결되었다.
통상면에서는, 현상의 개항 오항 이외에 소슈나 항주와 같은 변의 좋은 도시를 새롭게 개항하는 것으로, 오직이 만연해 기능 부전을 부흥이라고 있는, 구태 의연으로 한 기존의 징세 기구에 대신해, 공정 공평한 징세 기구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영국 외무 대신 파마 스톤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기 위해서 청나라에 대해 다시 무력행사를 할 결의를 굳혀 1851년 12월에 외무 대신을 사직해, 1855년 1월에 수상으로서 정계에 복귀했다.그러나 당초는 개전 이유로서 적당한 개전 원인이 없었기 때문에, 무력행사의 준비만은 충분히 정돈해 언제라도 무력행사에 곧바로 단행할 수 있는 체제를 정돈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하로 일어난 것이 아로호사건이었다.1856년 10월 8일에 청의 관헌은 영국 선적을 자칭하는 중국선 아로호에 임검을 실시해, 키요토 선원 12명을 구속해, 그 중 3명을 해적의 용의로 체포했다(나머지는 항의에서 석방).이것에 대해 당시의 광저우 영사 하리・파크스는, 청의 양광총독・흠차대신인 엽명□에 대해서 영국(홍콩) 선적의 배에 대한 청나라 관헌의 임검은 부당하다라고 주장해, 또 체포때에 청의 관헌이 영국의 국기를 당겨 접리 내린 일은, 영국에 대한 모욕이라고 해 항의했다.엽명□은 이것에 대해서 국기는 당시 내걸 수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파크스는 강경하게 자설을 주장해, 교섭은 결렬했다.실제로는, 사건 당시에 이미 아로호의 선적 등록은 기한을 몇일 지나고 있어 아로호에는 영국 국기를 내걸 권리는 없고, 관헌에 의한 아로호선원의 체포는 완전한 합법이었다.그러나, 청나라측의 엽명□도 기본적인 사실 관계의 조사를 전혀 실시하지 않고, 이 사실에 깨닫지 못했다.파크스도 아무래도, 기한 마감의 건은 몰랐던 것 같고, 후에 의회에서 문제가 되어 있다.[독자 연구?]
개전
파크스의 행동을 본 청나라 주재 영국 전권 사절겸홍콩 총독 존・볼링은 현지의 영국 해군을 움직여 광저우 부근의 포대를 점령시켰다.이것에 대해서 광저우의 반영 운동은 정점으로 달해, 거류지가 다 태웠다.
영국 수상 파마 스톤 자작은 현지의 대응을 지지해, 본국군의 파견을 결정하지만, 의회의 반대로보다 좌절했다.파마 스톤은 이것에 대해서 해산 총선거를 실시해, 이번은 의회의 지지를 받고, 현지에 전 캐나다 총독의 제8대 에르긴 백작 겸 제 12대 킨카딘 백작 제임스・블루스를 사령관으로서 병사 5,000으로부터 되는 원정군을 파견했다.동시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 공동 출병을 요구해 프랑스는 선교사가 체포 참수에 있던 일을 구실로서 출병했다.사령관은 그로 남작이었다.
미국・러시아는, 전쟁에는 더해지지 않는 조약 개정에는 참가하면 표명했다.
1857년 12월 29일, 영불 연합군은 광저우를 점령해 엽명□을 잡았다.다음 해 2월에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의 전권대사 연명에 의해 북경 정부에 대해서 조약 개정 교섭을 요구했다.그러나 이것에 대한 청의 회답에 불만을 가진 연합군은 다시 북상해 청진을 제압해, 여기서 텐진조약을 맺었다.이 조약의 내용은 공사의 북경 주재・기독교 포교의 승인・내지 하천의 상선의 항행의 승인・영불에 대한 배상금 등이다.또 이 조약에 의한 관세율 개정에 의해, 아편의 수입이 공인화 되었다.조약 체결을 본 연합군은 끌어올렸다.그러나, 연합군이 끌어올린 후의 북경에서는 텐진조약을 비난 하는 소리가 강해져, 이 조약 내용을 변경하려고 움직이고 있었다.
1859년 6월 17일, 영불의 함대는 텐진조약의 비준을 위해서 청진의 남쪽의 시라카와구에 왔다.이것에 대한 청의 영접은 없고, 또 시라카와에는 역행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배치되어 있었다.이것을 없애고 있는 한중간에 대포로 청의 공격을 받은 영불 함대는 몽골인 장군 센게린틴의 군에 지고 샹하이에 되돌렸다.
1860년 여름, 영불군은 대함대와 약 1만 7천명의 군인이라고 하는 대군에서 재차 진군 해 청의 포대를 점령해, 청측과의 교섭에 임했다.그러나, 여기서 파크스등이 키요쿠니 황제의 지시에 의해서 센게린틴에 붙잡혀 사절단중 11명이 고문 후에 살해된다고 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결렬해, 연합군은 북경에 강요했기 때문에, 낭패 한 함풍제는 열하에 피난했다.
10월 7일, 8일, 영불 연합군, 일로 불군은 원명원으로 약탈을 실시한[1][2].에르긴백은 7 일 저녁, 원명원으로부터 끌어올리자마자 , 그 모양을 「지금 폐허.본 한계, 약탈, 분쇄가 반도 되지 않았던 방은 하나도 없다.불군은 직물을 찢어, 공예품을 부수어 돌아, 상 한편 약탈했다.」등으로 적고 있다.10월 18일, 19일, 영군은 청조에 의한 포로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서 원명원을 다 태웠다.불군과 영군은, 불군에 의한 약탈과 영군에 의한 구이 지불을, 서로 비난 서로 했다.
북경 조약
1860년, 연합군은 북경을 점령해, 10・11월에 러시아 공사 니코라이・이그나체후의 조정아래에, 영불 원정 군사령관과 야스시 황태자와의 사이에 북경 조약이 체결되었다.이 조약에 의해 청은, 청진의 개항, 영국에 대해 구룡반도의 할양, 중국인의 해외에의 도항 허가등을 인정 당했다.마지막 도항 허가라고 하는 것은 중국인 노동자를 열악한 조건으로 이민시키는 노동자 무역을 공인하는 것이다.이 조항은 노동자 이민의 공인과 거기에 따른 일정한 이민 보호를 목적에 넣어졌다고 여겨진다.더욱 조정에 들어간 러시아에 대해서도, 1858년에 러시아 제국동 시베리아 총독 니코라이・무라비요후=아무르 스키가 체결한 아이군 조약 이후의 2년간은 청로양국의 잡거지에서 만난 밖만주(현재의 연해주)를, 정식으로 양보하는 일이 되었다.특히, 러시아가 연해 지방에 군항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해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상주시켜, 시베리아 철도 건설에 의해서 대규모 군사의 육상수송을 신속화시키려고 계획했기 때문에, 러일 전쟁의 원인이나 되었다.그 후도 러시아 혁명시의 시베리아 출병(1919년)으로는 극동 공화국의 귀속을 둘러싸 일러간에 분쟁지가 되었다.
화상
각주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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