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
독일인 Deutsch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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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행째: 말틴・루터, 오토・폰・비스마르크, 르트비히・밴・Beethoven, 이마누엘・칸트, 요한・보르후강・폰・괴테 2행째: 요하네스・Gutenberg, 보르후강・아마데우스・모차르트, 요한・제바스티안・바흐, 리햐르트・바그너 • 게오르크・빌헤임・프리드리히・Hegel | |
총인구 | |
약 1억 5000만명(독일계 포함한다) | |
거주지역 | |
중부 유럽(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 북미(미국 중서부 등 독일계 미국인이 많은 지역), 남미(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등의 독일계 이민이 많은 지역), 아프리카(나미비아등의 구독일 영지역) | |
언어 | |
독일어(저자크센어、바이에른어、아레만어도 포함한다) | |
종교 | |
카톨릭, 복음 주의 교회 | |
관련하는 민족 | |
게르만계、켈트족계、슬라브계、발트계 |
독일인(독일 인, 독일: Deutsche)은,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 분포하는 주민의 정의이다.문맥에 의해 이하의 세 개의 정의를 가진다.
- 독일 연방 공화국(혹은 역사상의 독일국, 독일민주공화국, 서베를린)의 국민, 국적 보유자, 또는 거기에 준하는 사람.
- 독일 민족(독일 보지 않는 속편)에게 귀속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는 생각되고 있는 사람.
- 독일어를 모어로 하는 사람.
목차
「국민」으로서의 독일인
「독일」을 자칭 하는 국가의 국적을 보유하는 사람(국민).현대에 있고는 독일 연방 공화국의 국적을 보유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이 경우의 「독일인」은 귀화한 외국인・외 민족도 내포 하기 때문에(위해), 민족주의적인 독일인에서는 부정적으로 놓치기 쉽다.한편으로 독일 통일의 중심이 된 Pruisen 왕국이 있던 베를린을 중심으로 하는 「브랑 덴 부루크 지역」은, 슬라브계의 폴란드인 및 소르브인과의 잡거지이며, 동왕국으로는 많은 「폴란드계」Pruisen인이 활약(전쟁론으로 저명한 크라우제빗츠도 폴란드계이다)했다.그들의 상당수는 폴란드계 독일인으로서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남기면서도 국적을 취득하고 있어, 그러한 의미로는 귀화인의 존재 자체는 독일에 있어 드문 존재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또, 프랑스 왕국으로부터 박해되고, 독일에 피해 Pruisen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에 받아 들여져 귀화해, 베를린이나 프랑크푸르트 등에 정주한 위그노파(카르바파)의 프랑스계의 사람들도 「국민」으로서의 독일인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독일의 국적 보관 유지자에게는 서스라브 어군의 소르브말을 이야기하는 소수민족인 소르브인(예:축구 선수 미카엘・발락)이나, 폴란드계(대표적인 것은, 현재의 축구 독일 대표의 에이스인 미로스라프・클로제, 루카스・포드르스키, 한 때의 독일 대표 피에르・리트바르스키 등), 덴마크계, 네델란드계(Beethoven 등), 프랑스계의 위그노의 자손(동독 마지막 수상 로타르・데메지에이르나 독일 연방군총감 우르릿히・데메지에이르등을 배출한 데메지에이르가 등), 나치스에 의한 대량학살의 영향으로 수는 줄어 들었지만 유태인(예:페릭스・Mendelssohn, 하인리히・Heine 등.수천년의 혼혈을 거친 유태교도를 인종적으로 독일인과 구별하는 생각은 부정되고 있지만, 독일인과 다른 민족 집단으로서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를 쌓아 올려 왔다)등이 내려 국적은 가지지 않은 사람이 많지만 터키인(예:축구 선수의 일 한・만시즈)등 여러가지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1].
「민족」으로서의 독일인
역사
원래 「독일의 역사」(독일사)에 임해서 말할 때, 자주 독일사의 「독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논의가 된다.그것은 어원에 대한 화제가 아니고, 독일 지방의 역사라고 하는 의미인가, 독일인의 역사라고 하는 의미인가라고 하는 것에 대한 논의이다.
전자의 경우는 독일 지방은 그 영역이 아직도 확정되어 있지 않은 불안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바로 옆의 예로는 동독의 통합을 들 수 있다) 점이나, 독일인의 존재를 반드시 전제로 할 필요가 없는 이상, 고대 겔 매니아의 제민족으로부터 오늘의 독일 주민에 대해 기술하는 일도 가능해져 버려, 독일 민족의 아이덴티티에 지장이 생기는 점으로 물의를 양 해 버린다.그러나 독일인의 역사와 이름을 붙였더니 「문화 집단으로서의 독일인」이 형성된 것은 겨우 15 세기・16 세기부터의 일에 지나지 않고, 더욱 거기에 「국민 의식을 가졌다」라고 하는 전제를 더하면 19 세기부터의 역사 밖에 기재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독일인,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모른다」(요한・보르후강・폰・괴테), 혹은 「우리를 독일인으로서 모으려고 하는 일은 쓸데 없는 노력이다」(프리드리히・폰・시라)라는 말이 상징하고 있으면 전해진다.
또,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음악가 프란츠・슈베르트는 체코 서부 모라 맥주 지방의 독일계 모라 맥주인의 가계로, 헝가리의 프란츠・리스트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국경에 있는 라이딩 출신의 독일계 헝가리인(오스트리아계 헝가리인)이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많든 적든 다른 유럽 주요 민족에게도 말할 수 있는 것은 있지만, 몫케독일은 지방으로서의 영역이 근대 이후도 변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는 점으로, 타국보다 복잡한 사정을 안고 있다.
고대 겔 매니아
「민족으로서의 독일인」을 정의하는 것은 지난하다.그것은 독일이 단일 민족에 의한 통일 국가를 가졌던 적이 없는, 또 국경선이 제2차 세계대전의 곧 뒤에까지 빈번히 변경되어 온 것, 혹은 유럽에 있어서는 사람의 이동은 비교적 간이, 자유롭다등의 이유에 의한다.원래 독일 민족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비교적 근년이 되어 형성된 것이며, 중세 자체의 시점에서는 단지 「독일인」은 독일 지방에 사는 인간의 총칭에 지나지 않았다.고대의 시점에 있고는 독일(로마에서는 겔 매니아로 불렸다)의 거주자는 복수의 소규모의 민족(부족)으로 나누어져 있어 활발히 싸우고 있었다(게르만인을 참조).
50이상의 세력으로 나누어져 있던 그들은 모두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존재는 다른 사람(대체로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의 기술 이외에 아는 방법은 없다.그 때문에, 겔 매니아의 제민족은 객관성이 부족한, 편견이나 이미지의 선행하는 이해의 되는 방법을 해 왔다.겔 매니아의 주민이 단일의 집단이라고 보여지거나 신체적 특징이 강조되어 전해졌던 것도 그러한 요소가 배경에 있다.
프랭크 왕국과 신성로마제국
고대의 마지막에 프랭크 왕국에 의해, 로마 사후의 유럽이 통일된다.프랭크족은 오늘날과 으로 말하는 곳의 다민족의 공동체에서, 모태로 여겨지는 게르만계 민족 외에도 슬라브계・켈트족계・라틴계에 속하는 여러가지 주민 그룹을 통합하고 세력을 늘렸다.이민족을 동포로서 흡수해 나간다고 하는 부분은, 라틴인을 핵심으로 하면서도 여러가지 세력을 동화하며 간 로마 제국을 닮아 다니며 있어 그들은 기독교를 공통의 가치관으로 하는 일로 유럽을 재차 통합하려고 시도했다.그 과정에서 비기독교도인 게르만계 민족의 자크센인과 바이에른인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컬 대제 인솔하는 프랭크군은 자크센인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것으로 이것을 진정시켰다.이러한 점으로부터도 고대 겔 매니아의 주민이 문화적・민족적으로 굳건함이 아니었던 것, 그리고 프랭크족이 특정의 문화 그룹에 구애받지 않는 코즈모폴리턴적인 사상을 안고 있던 일이 방문한다.
프랭크 왕국이 얼마 안되는 통치 기간에 분열・소멸하면, 그 후예국의 한 살인 동쪽 프랭크 제국이 겔 매니아를 지배하게 된다.동쪽 프랭크는 이름을 신성로마제국으로 고쳐(보다 정확하게는 군주호를 「신성한 황제(아우그스트스)」로부터 「신성한 로마인의 황제」라고 한), 프랭크 제국이 완수할 수 없었던 세계 제국의 재건을 목표로 해 국내의 제민족을 억누르면서, 적극적인 대외 전쟁에 출마했다.그러나 제국은 오토 2세의 대에 시칠리아의 이슬람 제국과의 싸움에 지는 등 이탈리아 원정으로 패배를 반복해, 또 발트 슬라브인의 봉기등의 반란 운동에 쫓기는 대로에 그 권위를 잃어 간다.당시의 제국은 일찌기 프랭크인에 탄압된 지방 민족인 자크센인의 대공가가 지배하고 있어(자크센아침), 그들은 자크센인으로서의 입장을 벗어 던져서까지 로마라고 하는 세계 제국의 재건을 목표로 했지만, 오토 3세의 대에는 로마를 방문했을 때에 현지 귀족에 의한 반란에 직면한다.
이 때, 오토 3세는 「이놈등은 여의 로마인은 아닌 것인가(중략)…여는 이놈등을 위해 독일인도 자크센인도 버려 여의 피를 거절했던 것이다」라고, 각 민족의 대립의 깊이를 한탄했다고 말해진다.덧붙여서 이 때 이용된 「독일인」은 민족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고, 단지 「(독일 지방의) 민중어」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의미였다.이러한 용법은 9 세기경에 이탈리아의 지식인층에서 사용되어 후에 동쪽 프랭크인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지만, 중세 시대를 통해 너무 일반적인 용법은 아니었다.
그 후, 제국은 각지의 유력자에게 권리가 분산되어 주민의 향토애를 후원자로 한 영방 국가에서 되는 「연방」으로 약체화 했다.이 영방 국가 시대는 독일 지방의 역사로 가장 길고, 독일의 인간은 중세 시대의 대부분을 이 체제아래에서 살아, 30년 전쟁과 그 후의 나폴레옹 전쟁으로 연합으로서의 제국조차 붕괴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독일 제국
근대에 들어가 유럽 각지에서 민족주의의 바탕으로 각지역을 통합하려고 하는 운동이 과열하면, 독일에서도 30년 전쟁등의 교훈으로부터 지역의 통합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론이 퍼져, 그 원동력으로서 독일 지방의 인간을 정리하는 「독일 민족(독일어: Deutsches Volk)」의 개념이 형성되었다.자유주의자가 독일의 통합을 목표로 해 개최한 1848년의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로는 독일에 사는 비독일 민족은 독일인일까하고 말하는 문제가 큰 테마의 하나가 된[2].
한편으로 영방 시대에 확립된 각지방의 향토애는 완전하게는 사라지지 않고, 영방 국가는 이미 각각의 국민 의식을 가정교육 국민 국가로 발전하고 있던[3].독일계제민족에게는 문화적・정치적 소원이 크고, 요아힘・하인리히・칸페에, 통일된 「독일 민족(Deutsches Volk)」는 아직도 존재하지 않고, 「독일어: volkerschaft(제민족체)」가 존재할 뿐이라고 말하게 한[4].
민의 게다가 통일을 완수한 것은 전술의 Pruisen 제국에서, 일종의 개척단으로서 동구의 땅에 이주 해, 본주민과 동화하고 있던 그들은 지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 독일로부터 크게 멀어진 위치에 있었다.통일의 주인공으로, 독일 제국의 초대 수상이 된 비스마르크는 민족주의의 원, 또 강력한 통일 국가로서 주변국에 대항하기 위해서 「국가」로서의 통일을 진행시켰지만, 민족적인 통일을 강제하는 일은 없었다.그가 목표로 한 것은 독일 지방의 제민족・제국가가 완만한 연합으로서 신뢰를 대고 있던 중기~후기의 신성로마제국이며, 「제국」으로서의 중앙집권적인 체재를 정돈하면서도, 실태로서는 영방 국가의 존속을 인정한 연방제 국가였다.비스마르크등에 의한 코쿠사쿠리가 독일 지방 전체의 경제나 위신을 향상시킨 때문, 많은 독일인은 「국가로서의 독일인」으로서의 서 위치에 유용성을 인정해 국가에 충성을 맹세했다.그러나 통일의 원동력이 된 독일 민족 의식은 국가주의자를 제외하면 남아 깊게 침투했다고는 말하기 어렵고, 몫케바이에른인은 연방제에조차 만족하지 않고 종종 반기를 바꾸어, 공공연하게 바이에른어를 독일어의 방언은 아니고 「환언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바이말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전하면, 제국은 해체되어 새롭게 바이말 공화국이 수립된다.바이말 정부는 제국이라고 하는 표면조차도 않게 된 상황하로 활발히 분권을 진행시켜 지방 정부는 그것까지 이상으로 강대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그러나 중요한 국가 운영 자체는 거액의 배상금이나 극우・극좌 쌍방과의 대립에 의한 정치적 혼란으로부터 장애에 부딪히고 있었다.혼란은 프랑스군에 의한 룰 점령으로 정점으로 달해, 특히 바이에른주에서는 독립 논자로 해 보수 정치가이기도 한 그스타후・폰・컬이 중앙정부의 대외 정책을 저자세와 비난 해, 수상 명령을 무시해 독자적인 정치 행동을 취하는 상태에 빠졌다.독일로부터 분리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바이에른의 우익 세력의 불만이, 중앙정부의 좌익적인 정책에의 불만을 실마리로서 표면화한 일로 일어난 이 사건은, 같은 주에 주둔 하는 독일 국방 군부대까지도가 호응 해 바이에른 국방군과 이름을 고치는 등 심각한 상황으로 진전하며 갔다.요즘, 후세에 가장 강경한 독일의 민족주의・국가주의 세력과 평 되는 일이 많은 나치스는 바이에른의 1 지방 정당에 지나지 않고, 우익으로서의 입장으로부터 컬의 노선과 공투 하고 있었지만, 히틀러의 대독일주의와 컬의 바이에른 민족주의는 근본적으로 호환레 없는 개념이었다.
컬등 독립파로부터 되는 주 정부는, 「바이에른 독립」과「중앙정부의 쇄신」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도록 , 바이에른군이 베를린을 점령하는 일로 강경파에 정권을 주어 그 담보로 해서 바이에른 독립을 승인시킬 계획을 실행하려고 하고 있었다.하지만 히틀러는 중앙정부를 강경파에 바꿔바르는 일에는 동의 했지만, 바이에른 독립에 대해서는 독일 통일을 흔드는 행위이라고 무서워해 컬등을 설득하려고 간부가 모이는 비어 홀을 점거해, 대독일주의적인 혁명에의 찬동을 요구했다.허를 찔러져 돌격대에게 구속되고 있던 앞, 컬등은 일단은 따르는 표정을 보였지만 후에 집회장으로부터 탈출해, 바이에른군과 경찰대를 동원해 반대로 나치스를 진압했다(뮌헨 일치 단결).이 바이에른 민족주의와 대독일주의, 급진적 좌파와 급진적 우파가 복잡하게 혼잡한 소란은, 독일 국민이 굳건함은 아닌 일을 나타낸 한 건이기도 했다.
나치스에 의한 독일인의 정의
나치즘의 인종론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한스・군터는, 1922년에 저술한 「독일 민족의 인종학」에 대하고, 19 세기 이후 많이 볼 수 있던 인종과 민족의 혼동을 비판해, 「게르만인종」이나 「아리아인」이라는 명칭을 부정하고 있던[5].군터는 독일인이 북방 인종등 복수의 유럽 인종의 혼혈의 산물이다고 하면서도, 독일성의 본질은 북방 인종의 피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다고 했다.이 때문에 가장 뛰어난 북방 인종의 피를 독일 민족에게 도입해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고 주창한[6].군터의 서적은 폭발적으로 팔려 나치스・독일 정권하에서도 많이 읽혀졌다.나치즘에 있어서의 독일인의 정의는 이것들로부터 크게 빗나간 것이 아니고, 북방 인종의 정신성을 계승하는 「종과 운명의 동질성에 입각한다」민족공동체로서 정의된[7].
나치스・독일 시대에 있고는 민족 독일인(독일어: Volksdeutsche)이라고 하는 용어가 출현했다.이것은 독일의 시민권을 가지는 독일인을 가리키는 제국 독일인(독일어: Reichsdeutsche) 과는 달리, 1937년 이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외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계와 그 친척의 피를 가지는 인종 개념인[8].이 개념에 의한 「민족 독일인」은 독일 국외에 다수 존재하고 있어, 벳사라비아(현재의 루마니아・몰도바)나 보르니(현재의 우크라이나)에도 정주하고 있었다.독일소전의 한중간 행해진 동부 종합 계획이나 폴란드 총독부에 의한 동방 식민 정책에는, 이러한 「민족 독일인」이 동원되어[9], 전후에는 독일인 추방의 쓰라림에 있었다.
전체주의의 체계적 연구로 알려진 정치학자의 한나・아렌트는, 나치즘이 가장 강하게 지향한 것은 민족주의는 아니고 인종주의이었다고 하고 있다.아렌트는 인종주의는 민족주의와 완전히 주지가 다른 개념일 뿐더러 오히려 대립하는 일이 많은 개념이라고 지적하고 있어, 실제로 히틀러의 심복으로서 인종 정책의 선두지휘를 맡은 하인리히・힘라는 대게르만 제국」되는 것을 몽상 해, 독일인은 그 중에 주도적인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이것은 힘라 특유의 인식은 아니고 친위대 전체의 인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르고, 점령지 네델란드의 고등판무관을 맡은 더 의자・인크바르트는 「(대게르만 제국은) 독일 국민 국가 이념의 실현이 아니고, 인종 전체를 위해서 형성되는 질서이다」라고 발언하고 있는[10].
현대의 독일인
그 위에, 세부를 속이면서도, 더 신구 독일 국가, 독일어, 및 그것들에 길게 관계되어 온 혈통이라고 한 막연히 한 이미지의 총체가 「독일인」이라고 불리고 있다.그것은 다른 나라들과 같지만, 특히 독일어의 비중이 큰 점(거의 독일 민족으로 밖에 모어화하지 않았다.그 점 일본어와 입장이 비슷하다), 국가의 영역이 전혀 안정되지 않은(현재의 판도는 수십년의 역사 밖에 가지지 않고, 6백 년간 독일 국가의 중요함을 담당한 오스트리아는 그 중에 포함되지 않았다) 점이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인 추방 이후, 동구에 있어서의 독일인의 인구는 격감했지만, 현재에도 폴란드에 153,000명, 헝가리에 132,000명, 루마니아에 37,000명, 체코에 19,000명, 스로바키아에 6,000명, 세르비아에 4,000명의 독일인이 존재해, 각국에 있어서의 소수민족이 되고 있다.
「독일어 말하는 사람」으로서의 독일인
원래, 독일인은 스스로의 일을"Teutsch"(토이 츄)라고 부르고 있었다.이것은 「민중(people)」의 뜻이다.그러나, 남방의 고대 로마인은 이 토이 츄인을 「게르만인」이라고 호칭하고 있었다(옛날에는 츄-톤족(태우 토니족)이 어원이다고 하는 설도 있었지만, 현재는 기각되고 있다).이것이 현재의 영어의 German에 상당한다.처음으로 소개된"성서"의 기술에 의한 게르만인은, 불명예스럽게도, 「분쟁을 좋아하는 백성」을 의미하는 「겔 매니아」인 것인다.또, 네델란드를 영어로 「더치」라고 표현하지만, 이것은 원래 토이 츄가 와타표현이며, 네델란드가 「독일」지역에 포함되어 있는 시대에 영국에서 퍼진, 모멸을 포함한 어구이다.
통상 「독일 민족」이라고 해진다, 독일어를 모어로 하는 게르만계 주민은 독일외, 오스트리아 국민, 리히텐슈타인의 국민의 대부분, 스위스 국민의 7할이 그렇고, 이탈리아의 남 치롤 지방의 주민, 벨기에 국민의 일부도 그렇다.또, 프랑스어화가 진행되고 있다고는 해도, 룩셈부르크 국민, 프랑스 동부의 아르자스와 로레이누의 주민도 기본적으로는 독일계이다.18 세기 이후 에카체리나 2세의 초대로 러시아에 이주한 독일인(보르가・독일인)[11]도 많아, 제2차 세계대전전에는 보르가 하반에 보르가・독일 자치공화국을 쌓아 올렸지만, 대전 발발 후에 카자흐스탄 등에 강제 이주 당했다.구소비에트 연방내에 사는 독일계 주민은 200만명 가깝게 있다고 추정되고 있다.그러나 소련 붕괴 후, 구소련 각국에서 민족주의가 대두해, 독일계 주민은 박해되어 조국 독일에 귀국하는 사람도 증가하고 있다.그러나 같은 민족이면서(표준) 독일어를 풀지 않는 독일인으로서 새로운 난민 문제가 되고 있다.
독일 국민 이외의 사람들을 「독일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어떨지는 미묘한 점이다.특히 오스트리아는 약 600년간 독일 국가인 신성로마제국의 중추였기 때문에, 스스로를 독일인의 주류로 간주하는 생각이 뿌리 깊었다.또, 신성로마제국내의 지방자치 제도(군 제도)가 확립한 1512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인의 신성로마제국(Heiliges Ro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라고 불려 왔다.이 때문에, 하프스브르크가에 의한 제정의 붕괴 후의 한시기는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Republik Deutschosterreich)」이라고 하는 국호를 사용하고 있었을 정도로, 오스트리아 제일 공화국 시대는 좌파・우파를 불문하고 독일과의 합병을 바라는 소리가 강했다.오스트리아인 아돌프・히틀러에 의한 오스트리아 병합은 이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병합 후 이류 시민 취급해 되어 연합군의 폭격등에서 참담인 눈에 있던 오스트리아 국민은, 나치스의 붕괴 후, 독일인과는 다른 오스트리아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강해지고 있다.오스트리아 민족이라고 하는 개념은 근거 박약이며, 본래 영국이나 북유럽도 포괄하는 게르만 민족라는 말도 너무 막연히 해서 , 더 독일인라는 말을 고집하는 사람도 일부에 있다.근년의 우파 연립 정권에 참가하고 있던 우익 정당은 그러한 독일 민족주의자가 유파를 이어받고 있다.
「독일」의 아이덴티티는 의식 후라도 역사 위에서도, 우선 독일어, 그 다음에 이것을 이야기하는 독일 민족, 마지막에 그것들을 통괄하는 독일 국가라고 하는 순서를 더듬는 경향이 있다.특히 아프리카나 신대륙 등 온 세상에 넓게 확산한 영어나 프랑스어, 스페인어등과는 달라,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에 의해 독일 식민지 제국이 무너진 것으로부터 역외에 정착하기에 이르지 않고, 독일어가 거의 독일 주변의 동민족에게 모이고 있는 만큼, 이 삼자의 관계는 강하다.오스트리아가 근년 다시 독일 민족주의에 경사하고 있는 것은, EU라고 하는 연합국가의 우산의 아래에서의 「독일인(독일어 사용자)」이라고 하는 정리가 강하게 의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에라고도 할 수 있다.그만큼 EU미가맹으로, 게다가 대부분이 독일어권에 포함되는 스위스의 입장은 미묘하다.
덧붙여 중부 유럽이나 동구의 지명안에는 「녜메츠 키~ Nemecky-」 「네이메트~ Nemet-」(이)라고 하는 서론을 가지는 지명이 있는[12].의미는, 「(중부 유럽이나 동구의 원주민이다) 우리(스라브인)의 언어(스라브말)를 이야기할 수 없는 벙어리(벙어리)의 사람들(즉 독일인)의〜」라고 하는 의미이다.이러한 마을은 독일인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 독일인이 많았기 때문에, 같은 이름의 이웃마을과 구별하기 위해(때문에)이다.
덧붙여서, 러시아어로는 「민족적인 의미로의 독일인」을 니미트키(немецкий)라고 불러, 「독일 국민(독일 국적을 가지는 사람)」를 기르마니트(германец)라고 부른다.또, 「독일어」는 니미트키・이즈크(Немецкийязык)라고 부른다.덧붙여서, 미국의 배우 레나드・니모이의 니모이(Nimoy =немой)도 「아|아(벙어리)의 것」이라고 하는 러시아어에 유래한다.
관련 항목
각주
- ^다만, 이러한 상황은 특히 독일에 한정한 것은 아니다.섬나라이며 쇄국이 길었기 때문에, 비교적외 민족의 교류가 얇은 일본에서도 단일민족국가는 아니다.유럽의 타국은 영불을 시작해 독일 이상으로 복잡하다.지구상에는 상당한 벽지를 제외해서는, 순수한 혈통의 민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 ^야마다흔오 1993, pp. 648.
- ^「바이에른 왕국의 탄생」보다
- ^야마다흔오 1993, pp. 142-143.
- ^하라다 카즈미 2012, pp. 162.
- ^하라다 카즈미 2012, pp. 168-169.
- ^남 토시아키 1998, pp. 4, 11.
- ^아다치 요시히로시 2012, pp. 40, 71.
- ^아다치 요시히로시 2012, pp. 46.
- ^「백인이란 무엇인가」후지카와 타카시남편p71-80 「힘라의 아리아 인종관과 그 귀결」하라다 카즈미저
- ^경제적 빈곤 및 신교도중에서의 종교적 소수파등의 이유로 이주했다.
- ^체코의 녜메츠 키・브로트 NemeckyBrod(현하브리치크브・브로트 Havlickuv Brod)와 체스 키・브로트 CeskyBrod 등.독일인의 브로트(얕은 여울)와 체코인의 브로트, 라고 하는 의미이다
참고 문헌
- 키무라 야스시2 「신판 세계 각국사 독일사」야마카와 출판사, 2001년
- 「케임브리지판 세계사 독일」
- 후지카와 타카시남 「백인이란 무엇인가?」도수 서점, 2005년
- 「바이에른 왕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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