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7일 화요일

자크센=비텐베르크

자크센=비텐베르크

자크센=비텐베르크공의 문장

자크센=비텐베르크(Sachsen-Wittenberg)는, 신성로마제국의 공작령.부족 공국(en) 시대의 자크센 공국의 붕괴 후에 성립했다.1356년, 자크센 선제후령에 승격했다.

역사

아스카니엔가(아스칸가)의 선조의 한 사람으로 있는 바렌슈텟트백오토는, 1122년에 자크센공의 칭호를 획득했다.그 아들 알 치우침 사람웅백1134년, 신성 로마 황제 로타르 3세보다 자크센의 노르트마르크 변경백령(en)이 주어졌다.1138년, 로타르 3세의 후계자인 독일왕콘라트 3세는, 적대자인 베르후가하인리히 오만공으로부터 자크센 공국을 몰수해, 이것을 알 치우침 사람웅백에게 주었다.그러나 자크센의 귀족들은 웅백을 자신의 주인으로서 인정하지 않고, 웅백은 1142년에 자크센공위를 하인리히 오만공의 아들 하인리히 하인리히에게 양보했다.그 후, 알 치우침 사람웅백은 1147년베드 십자군에게 참가해, 1157년브랑 덴 부루크 변경백령을 창설하고 있다.

1180년, 하인리히 하인리히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바르바롯사)와 그 동맹자들에 의해 폐위 되었다.광대한 자크센 공국은 황제의 동맹자들인 수많은 제후에 의해서 분할되었다.공국의 분할에 참가한 쾰른 대사교 필립・폰・하 인스 베루크(en)는, 획득한 신영토를 바탕으로 베스트파렌 공국(en)을 창설하고 있다.붕괴한 부족 공국 중 오스트파렌(en)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의 지역만이 「자크센 공국」의 국명을 계승해, 알 치우침 사람웅백의 아들 베른할트 3세에게 줄 수 있었다.

베른할트 3세가 1212년에 죽으면, 아들들은 영지를 분할 상속했다.장자 하인리히 1세는 바렌슈텟트(en)를 중심으로 하는 아스칸 가전 이래의 영토를 안하르트백령으로서 계승했다.한편, 남동생 알 치우침 사람 1세는 자크센공의 칭호를 받아, 엘베 가와히가시기슭의 비텐베르크베르트히의 2 도시와 그 주변지역, 라웨브르크(en)의 성과 그 부속 지역, 엘베강하구의 삼각강 랜트・하데룬(en)이라고 한다, 각각 무관계한 3 지역을 상속했다.

알 치우침 사람 1세가 1260년에 죽은 후, 2명의 아들 요한 1세알 치우침 사람 2세는 공동 통치를 실시하고 있었지만, 머지않아 영토를 분할하는 것을 예정하고 있어, 1269년, 1272년, 1282년과 단계적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존재하는 영지(하데룬, 라웨브르크, 비텐베르크)를 분할하며 갔다.1282년, 요한 1세는 자신의 3명의 아들들 에이리히 1세, 요한 2세, 알 치우침 사람 3세에 공위를 양보해, 이 3 형제와 숙부 알 치우침 사람 2세의 공동 통치가 계속 되었다.

1288년, 알 치우침 사람 2세는 시아버지의 독일왕루돌프 1세에, 자신의 적남으로 루돌프 1세의 외손이기도 한 루돌프 1세에 자크센 궁중백의 칭호를 주도록 요구했지만, 이 청원은 야심적인 마이센 변경백령의 지배자 베틴가의 반발을 일으켜, 같은 집안과 오랫동안 싸우는 계기가 되었다.루돌프 1세는 1290년, 베틴가의 일족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상속인이 끊어진 브레이나백령(de:Grafschaft Brehna)을 외손의 자크센 키미코 루돌프 1세에게 주고 있다.알 치우침 사람 2세와 3명의 조카들의 공동 통치는 1295년까지 행해졌지만, 1296년에는 정식적이다 분할을 해 3명의 조카가 자크센 공국을 구성하는 3 지역 중 라웨브르크와 하데룬을 획득해 자크센=라웨브르크 공국을 창설해, 이것에 대해서 알 치우침 사람 2세는 비텐베르크를 손에 넣어 자크센=비텐베르크공을 칭했다.

1292년, 알 치우침 사람 2세는 3명의 생들과 공동이라고 하는 형태로, 독일왕선거로 선제후로서 낫사우가아돌프에게 표를 던졌다.그러나 1296년 이후의 국왕 선거로는, 자크센=라웨브르크와 자크센=비텐베르크는 서로 자크센의 선제후로서의 투표권을 양보하려고 하지 않고, 대립했다.1314년비테르스밧하가르트비히 4세하프스브르크가프리드리히 3세의 2명의 후보가 선 국왕 선거로는, 자크센=라웨브르크공요한 2세가 자크센 선제후의 자격으로 전자에 표를 던져 자크센=비텐베르크공루돌프 1세는 같은 자격으로 후자에게 표를 던졌다.

결국, 1325년에 요한 2세의 지지한 르트비히 4세가 정통인 독일왕으로 여겨졌다.그러나 1346년, 루돌프 1세는 르트비히 4세의 대립왕으로서 룩셈부르크가컬 4세를 선출했다.다음 1347년에 르트비히 4세가 사망, 컬 4세가 단독의 독일왕이 되었다.1356년, 컬 4세는 독일왕선거의 방식을 정하는 내용의 금인칙서를 발포해, 자신의 지지자인 자크센=비텐베르크공을 자크센 선제후로 했다.이것에 의해, 자크센=비텐베르크는 자크센=라웨브르크에 대해서 우위에 서, 영토도 이것 이후는 자크센 선제후령으로 불리게 되었다.

1422년, 선제후 알 치우침 사람 3세의 죽음으로 따라 자크센=비텐베르크계 아스카니엔가는 단절했다.최근부모의 남자계 남자인 자크센=라웨브르크공에이리히 5세는 비텐베르크 공작가의 상속을 주장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신성 로마 황제 지기슴트는, 베틴가의 마이센 변경백프리드리히 4세를 다음 자크센 선제후에게 임명했다.

자크센=비텐베르크공

1180년의 하인리히 하인리히의 실각 후, 부족 공국으로서의 자크센 공국은 붕괴해, 이후의 자크센공은 비텐베르크등의 지역을 영유 하는에 머물었다.1423년에 마이센 변경백령 및 테린겐방백령을 가지는 베틴가가 자크센 선제후위를 획득하고 나서는, 자크센으로 불리는 지역은 부족 공국기와는 지리적으로 크게 어긋난 지역이 되었다.자크센=비텐베르크공령은 자크센 선제후령의 일부를 구성한 후도 영주 가계에 이동이 있었지만, 1547년아르베르틴계 베틴가가 최종적으로 획득했다.

아스칸가
베틴가
베틴가 에르네스틴계
베틴가 아르베르틴계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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