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0일 토요일

신서사건

신서사건

신서사건(해 하는 사건)은, 1908년(메이지 41년)부터 다음 1909년에 걸쳐 일어난, 도쿄 고등 상업학교(히토츠바시 대학의 전신)와 문부성과의 사이의 분쟁 사건・학교 소동이다.이 항목으로는 「 제2의 신서사건」이라고 여겨지는 1931년의 「칩거 사건」에 대해서도 아울러 기술한다.

목차

개요

1887년, 종래의 도쿄 상업학교를 개편해 관립 「고등 상업학교」로서 설립된 도쿄 고등 상업학교(도쿄고상)는 졸업생을 대상으로 하는 「전공부」를 설치, 대학에의 승격을 목표로 했다.이것에 대해 문부성은, 도쿄 제국대학 법과 대학(현재의 도쿄대학 법학부)에 경제・상업 2 학과를 신설, 한층 더 도쿄고상전공부를 폐지해 이 2 학과에 사실상 흡수할 방침을 결정, 동교의 대학 승격을 정면으로부터 부정했다.도쿄고상측은 이 결정에 격렬하게 반발, 학생도 총퇴학의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에 사태는 분규 했다.

결국, 재계의 실력자이며 도쿄고상의 상의원이기도 한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조정에 나서, 문부성도 접혀 도쿄고상전공부는 존속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도쿄고상측은 거의 승리해, 이것에 의해 그 후의 도쿄고상의 구제 도쿄 상과 대학에의 승격에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또 이 사건 후, 도쿄 상대・하토츠바시대의 후원・동창 조직으로서 현재도 존속하는 여수회가 발족했다.

이상, 1908년부터 09년에 걸친 일련의 사태를 양년의 간지를 이어 「신서사건」이라고 칭한다(자주 「서사건」이라고 오기된다).

경위

 
관일/도쿄고상교수로서 동교의 대학 승격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사건에 즈음하여 조정, 전공부 존속에 진력했다.

도쿄고상의 대학 승격 운동

도쿄고상에는 본과에 접속하는 형태로 2년제의 전공부가 설치(1897년)되어 같은 관립고상코베 고등 상업학교(코베대학학 경제학부경영학부의 전신)의 졸업생도 받아 들이고 있었다.1901년 1월, 유럽 유학중의 고상교수 8명(이시카와 겐이시카와문오간다 나이부타키모토미부츠무라수 마츠후쿠다 도쿠조시다형타로관일)이 베를린에 있어 「상업 대학의 필요」를 건의 해, 전공부의 설치・확충(수업 연한 연장(1899년)이나 졸업자에게의 「상업학사」수여(1901년- ))를 발판에, 고상의 대학 승격 운동이 진행되었다.1907년(메이지 40년)에는 「상과 대학 설치에 관한 건의안」이 제국 의회를 통과, 고상의 대학 승격 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문부성의 대응과 승격 운동의 좌절

이러한 도쿄고상의 대학 승격 운동이나 의회의 건의에 대해, 제2차 침나무 내각 및 문부성(고마쓰바라 에이타로 문교부장관)은 다음 08년 9월부터 09년 3월에 걸쳐, 도쿄 제국대학 법과 대학(도쿄대학 법학부의 전신) 내에 경제학과・상업학과를 설치(후개편되어 도쿄대학 경제학부의 전신이 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이 과정에서 고상측은, 단독으로의 대학 승격을 제일의 목표로 했지만, 차선지책으로서 제국대학내에 도쿄고상을 모체로서 상과 대학을 신설하는(고상전공부를 도쿄 제국대학의 내부에 「분과 대학」으로서 사실상 흡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도 불가피로 하고 있었다.그러나 문부성은 이 어느 안도 인정하지 않고, 제국대학 법과 대학교수회측도 문부성안을 받아 상기와 같이 상과를 도쿄고상과는 별도로 제국대학내에 독자적으로 두는 것을 결의했다.이것에 의해 10년에 걸치는 도쿄고상의 대학 승격 운동은 좌절 해, 운동을 진행시켜 온 관일등 4 교수는 사표를 제출, 마쓰자키 구라노스케 교장도 문책에 의해 사직 향기나 난처할 수 있었다.

「전공부」폐지 결정과 사태의 분규

게다가 문부성은, 마츠자키 교장 사임 발령 직후의 5월 6일, 고상전공부와 제국대학 상과와의 중복은 「학제상에서(보다) 보는 것도…불통일의 혐」이 있다고 하여 1911년로서 전자를 폐지한다고 하는 성령을 발했다.또 구제 조치로서 고상본과생 중 진학 희망자에 대해서는 제국대학 상과에 무시험으로 입학시킨다고 했지만, 이것에 맹반대한 것이 도쿄・코베의 료타카상의 재학생이었다.제국대학에의 진학은 현재의 고상재학생에만 한정한다고 하는 과도적 조치가 될 전망인 한편, 도쿄고상의 염원인 대학 승격의 가능성은 이것에 의해 완전하게 끊어지게 되기 때문이다.이 위기에 직면해, 도쿄고상의 재학생은 5월 11일 학생 대회를 개최해 항의의 총퇴학을 결의, 코베고상측도 이것에 호응 하는 태도를 보였다.

고상측의 승리

도쿄고상상의원이기도 한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도쿄를 시작으로 하는 5 상공회의소 나 고상부형회와 함께 조정에 해당하는 한편, 고상에 결별 한 학생에 대해서는 번복을 재촉했다.결국 문부성은, 시부사와등의 조정을 접수 6월 25일에 고상전공부를 향후 4년간 존치 하는 취지의 성령을 내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 게다가 1912년 3월 25일에는 전공부를 그대로 존속하는 것을 결정했다.이것은 당면의 대학 승격은 실현될 수 없기는 했지만, 전공부가 존속하는 것으로 그 후의 대학 승격에의 기초가 굳어지게 되어, 사건은 거의 도쿄고상측의 승리에 귀착하게 되었다.

사건의 그 후

1913년(타이쇼 2년) 7월에는 오쿠다 요시토 문교부장관이 다시 전공부의 도쿄 제국대학 흡수를 기획하지만, 교원・학생・동창회 일체의 반대로 만나 단념했다.1914년 11월에는 동창회 유시가 지금까지의 전공부 존폐 문제를 한아 봐, 정부・문부성의 제국대학 중심 주의 정책으로부터 모교를 방위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여수회」를 결성했다.한층 더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하라우치각(나카하시덕고로 문교부장관)의 고등교육 확충 구상 속에서, 도쿄고상은, 1920년, 전공부를 기초로 한 염원의 대학 승격(구제 도쿄 상대의 설립)을 실현시키게 되었다.

칩거 사건

도쿄 상대에의 승격 후, 1931년(쇼와 6년)에 같은 대학학의 예과(도쿄고상의 제도상의 후신 조직) 및 전문부의 폐지안을 둘러싸고 발생한 「칩거 사건」은, 자주 「 제2의 신서사건」으로서 자리 매김되는 일이 있다.

1931년 10월 1일, 도쿄 니치니치신문에 의해서 스쿠프된 재무 행정 정리 준비위원회( 제2차 와카츠키 내각에 의해 설치)의 정리 원안안에 도쿄 상대 예과・전문부( 및 호쿠다이 예과)의 장래 폐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밝혀졌다.이것은 문교비 삭감을 위해 「고등학교가 있으니까 단과대의 예과는 불필요하고, 전문학교가 있으니까 전문부도 불요」라고 하는 대장성의 주장에 근거하는 것이어, 이것에 대해서 교수・학생・여수회가 일치해 재정부 장관・문교부장관 관저를 방문해 항의한 것 외, 학생은 히토쓰바시의 교사에 칩거 해 가두 데모를 실시했다.학생중에서는 경관과 충돌해 검속 되는 사람도 나왔지만, 대학 전체생 2,000명은 총퇴학을 결의했기 때문에 정부는 마침내 상대 예과・전문부의 폐지를 취소했다.

참고 문헌

외부 링크

This article is taken from the Japanese Wikipedia 신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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