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5일 목요일

아폰소 3세(포르투갈왕)

아폰소 3세(포르투갈왕)

아폰소 3세(Afonso III, 1210년 5월 5일- 1279년 2월 16일)는, 제5대 포르투갈왕(재위:1248년- 1279년).아폰소 2세와 왕비 우라카・데・카스티랴의 차남으로, 제4대 포르투갈왕산슈 2세의 남동생.

아폰소 3세
Afonso III
포르투갈왕
EstatuaDAfonsoIIIFaro.JPG
파로에 지어진 아폰소 3세의 상
재위 1248년- 1279년
출생 1210년5월 5일
코인 브라
사망 1279년2월 16일
Lisbon
배우자 브로뉴녀백마티르드・드・댄 말탄
  베아트리스・데・카스티랴・이・그스만
자녀 디 니스 1세
왕가 브루고니가(보르고냐가)
왕조 브루고니 왕조(보르고냐 왕조)
부친 아폰소 2세
모친 우라카・데・카스티랴
템플릿을 표시

1248년의 아폰소 3세의 즉위로부터 1348년페스트 대유행에 이르기까지의 100년은, 포르투갈 사상 중요한 시대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1].아폰소 즉위전의 포르투갈 왕국은 형식상은 카스티랴 왕국과 주종 관계에 놓여져 있었지만, 아폰소는 카스티랴와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해 종속 관계를 지워, 포르투갈은 완전한 독립에 의해 가까워진[2].

목차

생애

즉위 전

1210년 5월 5일에 아폰소 2세와 우라카의 아이로서 수도 코인 브라로 탄생하는[3].

1227년에 아폰소는 프랑스 왕국을 방문해 루이 9세아래에서 잉글랜드헨리-3세와 교전했다.1238년브로뉴녀백마티르드 2세와 결혼해, 브로뉴백위를 얻는다.

아폰소가 프랑스에 체재하고 있을 때, 포르투갈에서는 형(오빠) 산슈 2세와 국내의 성직자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있던[3].1245년로마떝뛠인노켄티우스 4세는 새로운 포르투갈왕을 선출하도록 지시해, 산슈에 대신하는 왕으로서 아폰소에 화살이 선[3].동년에 아폰소는 파리에서 성직자와 협정을 연결해, 포르투갈에 귀국했다.1246년Lisbon에 도착한 아폰소는 포르투갈 남부를 거점으로서 산슈와 싸우지만, 고전을 강요당하는[3].하지만, 산슈가 부탁으로 하고 있던 카스티랴 왕국의 원군은 도착하지 않고, 산슈는 왕위를 방폐하고 토레도로 승진시켰다.산슈는 아이를 남기지 않고 토레도로 잠겨, 아폰소는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한[4].

즉위 후

즉위 한 아폰소는 국내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때문에), 포르투갈 남부에 잔존하는 이슬람교도와의 전쟁을 개시하는[3].1249년 3월, 이슬람교도의 뚝 떨어진 영토가 되고 있던 아르가르베 동부의 파로시르베스를 함락시켜, 포르투갈의 레콘키스타는 완료했다.레콘키스타의 완료 후, 포르투갈의 경제는 약탈 중심의 군사적인 경제 체계로부터 생산・교역을 주로 하는 경제 체계로 전환해 나가는[5].1252년에 카스티랴왕에게 즉위 한 알펀소 10세와 아르가르베의 지배권을 둘러싸 싸워, 다음 1253년에 인노켄티우스 4세의 중재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아르가르베의 통치권을 카스티랴에 양도하는 것을 감추어 강화 한[6].1263년에 포르투갈・카스티랴간에 연결된 협정에 의해서 아르가르베의 지배권은 2세의 아폰소의 왕자 돈・디 니스에게 줄 수 있는[6], 1267년까지 포르투갈은 아르가르베의 영유권을 확보할 수 있던[7].아폰소의 사후에 연결된 1297년의 알 게 세스 조약에 의해서, 포르투갈과 카스티랴의 국경이 확정한다.

1253년의 카스티랴와의 평화에 즈음하여, 아폰소는 마티르드와 이혼해, 대신해 알펀소 10세의 서출의 딸(아가씨) 베아트리스(베아트리세)와 재혼했다.교회는 아폰소의 재혼에게 불쾌감을 나타냈지만, 포르투갈 국민은 베아트리스를 환영해, 왕비에 대한 경의를 표한[3].1263년에 교황은 아폰소의 2번째의 결혼을 인정했지만, 이 때 벌써 베아트리스와의 사이에는 돈・디 니스를 시작으로 하는 3명의 아이가 태어나고 있던[2].

아폰소는 민중의 지지의 획득에 열심이고, 공정한 재판과 보호를 국민에게 약속한[2].포르투갈내에 있어서의 평민(제3계급)의 영향력과 경제력은 늘어나서 가 1254년에 아폰소가 개최한 레이 리어콜테스에게는, 유력 콘세이료(지역 자치체)의 일원으로서 처음으로 평민의 대표자가 참가한[8].아폰소는 귀족, 승려의 권력으로부터 도시를 비호 해, 도시지역으로부터의 지지를 강화한[3].1255년에는 수도를 코인 브라로부터 Lisbon에 옮겼다.

1275년 6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는, 일찌기 아폰소가 포르투갈 왕위의 승인과 교환에 교회에 맹세한 충성을 꺼내 복종을 요구한[3].아폰소는 교회에의 복종을 거절해, 파문이 선고된다.죽음의 직전에 아폰소는 교회와 화해해, 1279년 2월 16일에 Lisbon에서 잠긴[3].

마티르드와의 사이에 태어난 것은 요절 한 장남뿐이었다.아폰소의 사후, 왕위는 후처 베아트리스와의 사이의 아들 디 니스가 계승했다.

정책

아폰소 3세의 치세의 전기에 걸쳐, 친구인 에스테틱 밴・에아네스, 총신 죠안・페레스・데・아보인이 정부의 중직에 오르고 있었다.장기의 측근의 임용은 그들의 권력의 남용을 조장 했지만, 한편으로 행정 조직의 확립과 운영의 실천에 도움이 된[2].

아폰소는 교황의 후원자가 있어 즉위 했지만 교회에 대해서 맹목적인 충성은 맹세하지 않고[3], 폴트 주교, 에보라 주교를 제외한 모든 고위 성직자와 대립한[2].교회 재판소의 권한을 강화하려고 하는 교회에 반발해, 국왕이 가지는 전통적인 주교서임권의 확보에 부심 한[3].선대부터 실시되고 있던 왕령 측량(인키리산)을 재개해, 많은 고위 성직자・귀족을 복종시켰다.인키리산에 의한 권력의 남용, 왕권의 침해의 조사는 아버지 아폰소 2세시대의 것보다 가혹하고, 아폰소의 재위중은 귀족들은 온순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2].아폰소는 산슈의 지지자들의 토지를 몰수해, 스스로의 지지자들에게 빼앗은 재산을 분배한[3].

아폰소의 Lisbon에의 천도에 의해서, 포르투갈 남부의 경제・문화적 중요성이 더한[1].아폰소는 새 도읍 Lisbon에 강한 애착을 안아, 거주 조건의 개선, 주거・상점의 소유권의 독점, 왕영지의 확대에 의해서 마을을 「구입」하려고 시도한[1].Lisbon 시민은 아폰소의 시도와 수법으로 반감을 안았지만, 아폰소는 마을의 최대의 보호자가 되어, 마을도 아폰소를 항상 지지한[1].

각주

  1. ^ a b c d말케스 「포르투갈」1, 105페이지
  2. ^ a b c d e f말케스 「포르투갈」1, 106페이지
  3. ^ a b c d e f g h i j k l 그릭 「아폰소 3세」 「세계 전기 대사전세계편」1권,141-142페이지
  4. ^말케스 「포르투갈」1, 49 페이지
  5. ^금7 「포르투갈사」증보 신판, 55 페이지
  6. ^ a b말케스 「포르투갈」1, 72 페이지
  7. ^아이다 「포르투갈의 탄생」 「스페인・포르투갈사」,363-365페이지
  8. ^금7 「포르투갈사」증보 신판, 52 페이지

참고 문헌

  • 금7기남 「포르투갈사」증보 신판(사이류사, 2010년 9월)
  • 고우다 아키히토 「포르투갈의 탄생」 「스페인・포르투갈사」수록(타테이시 히로시고편, 신판 세계 각국사, 야마카와 출판사, 2000년 6월)
  • 토마스. F.그릭 「아폰소 3세」 「세계 전기 대사전세계편」1권수록(구오바라 다케오편, 호루푸출판, 1980년 12월)
  • A.H.데・오리비에라・말케스 「포르투갈」1(금7기남 (뜻)이유, 세계의 교과서=역사, 호루푸출판, 198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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