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라 교타로
키무라 오늘 타로 기무라 교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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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 1902년6월 19일 나라현남 카츠라기군 코바야시 마을(현:고세시) |
사망 | 1988년 6월 11일(만 85세몰) |
국적 | ![]() |
민족 | 일본인 |
직업 | 사회운동가 |
활동 기간 | 1922년- 1988년 |
단체 | 수평사 |
정당 | 대일본 청년당 |
기무라 교타로(키무라 오늘 타로, 1902년 6월 19일-1988년 6월 11일)는, 타이쇼・쇼와의 사회운동가.
경력
나라현남 카츠라기군 코바야시 마을(현재의 고세시) 출신.1922년 4월, 수평사의 지부인 코바야시 수평사를 결성, 다음달의 나라현 수평사에 참가한다.같은 달, 타이쇼마을( 구코바야시 마을등이 합병해 성립)의 고등 초등학교에 있어서의 차별 규탄 사건으로 체포되고 수평사가 관련되는 부락 해방운동으로의 체포자 제 1호가 되었다(나라현 타이쇼마을 사건).이 사건으로 금고 6개월의 형을 받지만 운동내의 주목을 끌어 다음 1923년의 전국 수평사 청년 운동 결성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더욱 1924년에는 전국 수평사 본부 상임에 발탁 되어 기관지 「선민」의 편집을 담당한다.이러한 중에서 투쟁중심에 선 키무라는 1925년의 후쿠오카 연대 차별 규탄 투쟁으로 징역 3년, 1928년의 3・15 사건으로는 징역 5년의 판결을 받는다.석방 후의 1937년에 대일본 청년당에 가입해 부락 해방운동과 국가 사회주의와의 융합을 주도해 나가게 된다.
1946년 부락 해방 전국 위원회의 결성시에 상임 전국 위원이 되지만, 직후에 공직 추방이 된다.하지만, 1948년에 부락 문제 연구소를 창설해 상무 이사(1982년부터 사망까지는 고문)로 취임해 운동에의 영향력을 유지해, 공직 추방 해제 후는 부락 해방 전국 위원회의 재정・기관지의 책임자를 맡아 부락 해방 동맹의 중진으로 해서 활약했다.1953년의 전국 동화 교육 연구 협의회, 1965년의 형관친우회(주재), 1974년의 국민 융합을 목표로 하는 부락 문제 전국 회의의 결성의 신호 등의기를 흔들기역이 되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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