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16일 월요일

윔블던호사건

윔블던호사건

윔블던호사건(윔블던 호사건, 프랑스어:Affaire du vapeur Wimbledon, 영어:Case of the S.S. Wimbledon)은, 프랑스가 용선 한 영국 선적의 윔블던호가 독일 영내의 킬 운하를 항행하려고 했는데 1921년 3월 21일에 독일이 이것을 거부한 것을 둘러싸고, 영국, 이탈리아, 일본, 프랑스가 공동 원고가 되어 독일을 상설 국제사법재판소(PCIJ)에 제소한, 국제분쟁인[1].PCIJ는 항행 거부가 위법한 것이었다고 해 1923년 8월 17일에 독일에 대해 손해배상을 명하는 판결을 내리고 있는[1].

목차

경위

 
공창 지역이 킬 운하의 항로.윔블던호는 그다니스크(지도상의 Danzig)를 향하고 있었다.

킬 운하는 1895년에 완성한 발트해홋카이를 연결하는 독일의 인공의 수로인[2].제1차 세계 대전 후의 1919년, 독일은 연합국베르사이유 조약을 체결해, 킬 운하의 항행에 대해 동조약은 이하와 같이 정한[1].

킬 운하와 그 입구는, 독일과 평화적 관계에 있는 모든 나라의 군함과 상선에 대해서 완전히 평등하게 개방되어 항상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 베르사이유 조약 제 380조[3]

본건 분쟁이 발생한 당시는 아직 폴란드와 소련은 폴란드・소련 전쟁강화 조약에 서명했던 바로 직후로, 휴전 상태인[1].그러한 국제 정세 중(안)에서 독일은 1920년 7월 25일 및 30일에 국내법령으로서 폴란드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에 대한 전시 금제품의 수송을 금지하는 중립령을 제정한[1][4].

프랑스가 용선 한 영국 선적의 윔블던호는, 그리스사로 니카에서 무기 탄약 4200톤을 쌓아 그다니스크에 있던 폴란드의 해군 기지를 향하고 있던[1].1921년 3월 21일, 이 윔블던호는 킬 운하를 통 항해하기 위해 운하 입구에 도착했지만, 운하의 통항관리자는 전기 중립령과 독일 정부의 지시를 근거로 윔블던호의 통항을 거부한[5].프랑스 정부는 독일에 항의해 통항허가를 요구했지만, 독일은 중립령에 의해 폴란드군 앞으로 보낸 무기 탄약을 쌓는 선박의 통항을 허가할 수 없다고 회답한[1].결국 윔블던호는 킬 운하의 통항을 포기해 항로를 변경해, 예정보다 13일 지각한 1921년 4월 6일에 목적지에 도착한[5].

그 후 주요 연합국영국, 이탈리아, 일본, 프랑스의 4개국은 본건에 관해서 독일과 외교교섭을 실시했지만, 교섭은 좋지 않게 끝난[1].그 때문에 1923년 1월 26일, 이것들 4개국은 공동 원고가 되어 독일을 상설 국제사법재판소(PCIJ)에 제소한[5].1923년 5월 22일에는 폴란드가 본건 소송에의 참가 청구를 실시해[6], 동국의 참가가 인정된[1].

판결

PCIJ가 내린 1923년 8월 17일의 판결은 주로 이하와 같다.

  • 베르사이유 조약이 체결되는 1919년까지 킬 운하는 독일 영내에 건설된 독일 국내의 수로였지만, 베르사이유 조약 제 380조의 문언은 단정적이며 의심을 품는 여지가 없는 만큼 명확한 것이며, 독일이 전쟁에 임하여 적국 선박의 통항을 거부해 자국을 방위할 권리는 인정되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킬 운하는 베르사이유 조약의 체결에 의해서 국내 수로로부터 모든 나라의 모든 종류의 선박에 개방된 국제수로가 된[1][7].
  • 수에즈 운하파나마 운하라고 하는 국제 운하에 관한 선례는, 교전국의 군함이든지 전시 금제품을 수송하는 교전국이나 중립국의 상선이든지, 이러한 선박이 국제수로를 사용하는 것이 수로 연안국의 중립과 양립하지 않는다고는 보이지 않은 것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1][8].2개의 공해를 묶는 인공 수로가 전세계적・영구적으로 이용되는 경우, 교전국 군함의 통항조차 운하 연안국의 중립을 해치지 않는다고 하는 점으로는, 이러한 수로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던 국제 해협과 동일시 되는[8].
  • 독일이 출발한 중립령은 한국가에 의하는 것이며 베르사이유 조약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고, 독일은 동조약 380조에 의해 킬 운하 항행을 허가할 의무를 지고 있던[9].
  • 이상의 이유로부터 독일이 윔블던호의 항행을 거부한 것은 위법으로, 베르사이유 조약 제 380조는 독일의 중립령이 킬 운하에 적용되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어, 독일은 항행 거부에 의해서 생긴 손해를 배상해야 하는[9].
  • 독일 정부에 대해, 판결로부터 3개월 이내에 연 6 분의 이자 첨부로 총액 14만 749 프랑 35 상팀을 프랑스 정부에 지불하는 것을 명하는[9].

재판 후의 킬 운하

재판 후의 1936년 11월 14일, 아돌프・히틀러는 베르사이유 조약의 관련 조항을 파기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다시 킬 운하는 국제적으로 개방된[2].그러나 조약등에서 독일에 대해 운하의 국제화가 의무지워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국제화 되고 있으면 집들 오늘로는 킬 운하는 독일의 관할하에서 두어지고 있는[2].

출전

[헬프]
  1. ^ a b c d e f g h i j k 동쪽(2001), 40 페이지.
  2. ^ a b c 스기하라(2008), 177페이지.
  3. ^동쪽(2001), 40 페이지부터 베르사이유 조약 제 380조의 일본어 번역을 인용.
  4. ^츠츠이(2002), 15 페이지.
  5. ^ a b c 카스야(2009), 70 페이지.
  6. ^ CPJI serie A No 1, pp. 9-10.
  7. ^카스야(2001),70-71페이지.
  8. ^ a b 카스야(2001), 71 페이지.
  9. ^ a b c 동쪽(2001), 41 페이지.

참고 문헌

  • 카스야 히데유키 「판례 국제법」마츠이 칸바시 츠카사 외 편, 히가시신당, 2009년 4월, 제2판 제 3쇄,70-72페이지.ISBN 978-4-88713-675-5
  • 스기하라 타카미네, 미즈카미 치노, 널뛰기지사, 요시이 쥰, 카토 노부유키, 타카다영 「현대 국제법 강의」유비각, 2008년.ISBN 978-4-641-04640-5
  • 츠츠이 와카미즈 「국제법 사전」유비각, 2002년.ISBN 4-641-00012-3
  • 히가시 타이스케 「주권의 기능-윔블던호사건-」, 「별책 쥬리스트」156호 국제법 판례 백선, 유비각, 2001년 4월,40-41페이지, ISBN 978-4641114562.

재판 자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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