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대진의 싸움
다대진의 싸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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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문녹・게이쵸의 역 | |
연월일:문녹원년(1592년) 4월 13일-14일 | |
장소:조선, 부산의 다대진 | |
결과:일본측의 승리 | |
교전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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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지휘관 | |
고니시유키나가 | 윤고신(다대포첨사) |
전력 | |
불명, 7,000 정도 | 불명 |
손해 | |
불명 |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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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진의 싸움(단지 한응의 투쟁, 조선 읽기:타데진)은, 문녹원년 4월 13일-14일(1592년 5월 24일-25일), 부산진의 싸움과 거의 동시에 행해진 문녹・게이쵸의 역의 최초의 싸움이다.
목차
다대진의 싸움
4월 12일, 일본군의 제일대는 재빠르게 부산에 상륙해, 다음 13일 다시 배를 타, 미테로 나누어져 출항.그 하나가 다대진의 사이를 향해 쇄도했다.이 전투로는 조선군의 다대 고장을 지키는 신비대 지휘관(다대포첨사) 윤고신과 제일 대의 대장(선봉) 고니시유키나가가 싸우게 되었다.윤고신의 형제인 윤흥제도 전투에 참가했다.
조선군의 지휘관은, 적의 기병을 막기 위해 못을 뿌려, 성벽 위에 수비병을 재빠르게 배치하고 화살을 발사하게 했다.한편, 고니시유키나가는 항구에 상륙하고 시로에 가까워져 항복을 권고했지만, 「왕명이라면 내리지만, 토끼에 모퉁이, 왕에게 허가를 청할 것」이라고 반시간 벌기와도 잡히는 거부를 하셨다.
일본군은 화승총의 원호를 받으면서 굴의 물을 배수하는 전술을 사용했다.화승총에 의해서 조선측의 수비병은 무력화 되었다.부산진의 싸움과 같이, 조선병은 화승총에 우려를 이루어, 유효한 반격을 할 수 없었다.조선군은 일본군이 굴을 배수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방벽까지 직접 가까이 하게 되었다.
야밤중, 유키나가는 기습해 목석 흙덩이를 굴에 던지고, 오전 4시부터 8시의 사이에 이것을 묻어 버렸다.조선 측에 의한화살의 련 쏘아 맞혀나 투석 등에 대항하면서, 일본군은 공성탑(비제)이나 사다리를 이용하고, 화승총의 원호 중(안)에서 성벽에 올랐다.유키나가는 곧 바로 일본의 기를 세우게 했다.
윤고신은 제일 방위선이 찢어진 것을 보고, 거짓의 퇴각을 실시한 후, 갑자기에 반격을 개시했지만, 격렬한 난전이 되었다.윤고신은 전사해, 일본측은 사이를 점거했다.
니시다이라포의 싸움
시간을 같이 하고, 니시다이라포(서생포[1])의 사이도 함락 했다.이것에 의해서 부산 주변의 진압이 완료했다.
그 후
고니시유키나가와 부산을 공격한 교의지는, 그 진격의 과정에서 큰 저항은 받지 않았다.고니시유키나가는 후속의 군대의 상륙을 위해서 다대진에 군사를 남겨 경비시켜, 곧 바로 부대를 재편성 하고, 그 날중에 동래성으로 향했다.
각주
참고 문헌
-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국문 일본 외사 하권」다이요사 출판부, 1938년.http://dl.ndl.go.jp/info:ndljp/pid/1028257/38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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