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십자군
제4회 십자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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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스탄티노풀을 공격하는 제4회 십자군 | |
전쟁: | |
연월일:1202년- 1204년 | |
장소:발칸 반도 | |
결과:콘스탄티노포리스의 점령과 동 로마 제국의 멸망, 그리고 십자군 제국가의 성립 | |
교전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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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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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십자군(매우 4야 십자 군, 1202년- 1204년)은,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서 호소할 수 있어 프랑스의 제후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행해진 십자군.당초의 목적인 성지에는 향하지 않고, 그리스도 교국의 동 로마 제국을 공략해, 콘스탄티노포리스(콘스탄티노풀・현이스탄불)를 함락시켜, 약탈・살륙의 한계를 다했기 때문에, 가장 악명의 높은 십자군으로서 알려진다.
동 로마 제국을 일단 멸망 시켰기 때문에, 이 지역의 그리스도 교국가의 힘을 없애, 후의 오스맨 제국에 의한 동유럽의 대부분의 지배의 복선의 하나가 되었다.통상은 1453년의 콘스탄티노풀 함락을 가지고 동 로마 제국이 멸망 했다고 여겨지지만, 이 제4회 십자군으로 동 로마는 실질적으로 멸망 했다고 보는 역사가도 있다.
목차
배경
1198년, 주요한 국왕이 참가하면서 별로 성과가 없었던 제3회 십자군으로부터 10년 지나, 로마떝뛠인노켄티우스 3세는, 새로운 십자군을 호소했다.각국왕은 이것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샴페뉴로 열린 말등창시합(토너먼트)에 있어서의 권유로, 샴페뉴백티보 3세, 블로어백루이 1세를 중심으로 한 유력한 프랑스 귀족이 참가를 결정해 그 후, 프랑 달러백보두안 9세등이 더해져, 70명 이상의 제후, 기사의 참가를 얻었다.샴페뉴백이 지도자가 되어, 구체적인 원정 계획을 세우기 위한 대표자로서 6명의 기사가 선택되었다(그 한 명이, 상세한 기록을 후세에 남긴 죠후로와・드・비르아르두안이다).그들이 결정한 방침은, 이슬람교도의 본거지인 이집트(아이유브아침)의 카이로를 해로로부터 공격한다고 하는 것으로, 그 수송을 제이 노바나 피사에도 호소했지만, 결국 베네치아에 의뢰하기로 정해졌다.베네치아는 단지 수송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원수(드제) 엔리코・단드로 스스로 참가하게 되었다.1200년에 티보가 병사했기 때문에, 새롭게 몬페라트후보니파쵸 1세를 지도자에게 선출했다.
한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있던 아이유브아침은, 예루살렘에의 무장 순례단이 때때로 베이루트등의 연안 도시를 덮치기 위해, 이탈리아제도시에 대해 서양인의 무장 세력을 옮기게 한 없게 하는 협정을 실시하려 하고 있었다.1202년, 아이유브아침의 왕으로 사라훗디의 남동생 알=아디르는, 서로 무역 상대로서 중요한 관계에 있던 베네치아 원수 엔리코・단드로라고 협의해, 이하의 협정을 주고 받고 있다.
베네치아는, 십자군과의 계약도 아이유브아침과의 협정도, 동시에 지킬 수 있도록 행동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1201년에 십자군 참가자는 베네치아에 집결하기 시작했지만, 당초 예정한 3만명의 약1/3의 인원수 밖에 모이지 않았다.이 때문에, 참가자의 가진 돈을 전부 모아도 베네치아에 지불하는 뱃삯이 큰폭으로 부족해, 출항할 수 없게 되었다.거기서 베네치아측과의 협의의 결과, 한 때의 베네치아령으로 당시는 헝가리왕보호하에 있던 흔함시(현재는 크로아티아의 도시더 달)를 공략하는 것으로, 뱃삯의 보충으로 하기로 했다.같은 기독교도(게다가 카톨릭)의 흔함을 공략하는 것에는, 십자군내에도 큰 저항감이 있었지만, 결국 흔함을 공격해, 몇일에 이것을 항복시켰다.통지를 들은 인노켄티우스 3세는 격노해, 십자군을 파문로 했으나 십자군으로부터의 변명을 받고 파문을 풀었다.
그런데 , 여기에 동 로마 제국의 망명 황태자 아레크시오스가 찾아 오고, 제위 획득의 조력을 신청했다.아레크시오스의 아버지는 황제 이사키오스 2세였지만, 남동생(아레크시오스 3세)에 의해 찬탈되고 있어 정당한 제위를 회복하고 싶다는 것으로, 담보로서 20만 마르크의 지불해, 동 로마 제국의 십자군에게의 참가, 동서 교회의 통합을 제시했다.몬페라트후와 베네치아는 이것에 찬성했다(미리 알고 있었다고 생각된다).다른 십자군사는 주저 해, 일부의 사람은 별행동을 취했지만, 결국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에 동의 했다.
콘스탄티노풀 공격
제1회
1203년 6월에 콘스탄티노풀에 도착해, 아레크시오스를 제위에 앉히도록 요구했지만 거절되어 7월에 공격을 개시했다.콘스탄티노풀은 그것까지 수많은 공격을 막아 온 난공불락의 성새 도시에서 만났지만,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우세한 해군력을 살려 바다측으로부터 공격을 거는 것과 동시에, 육상에서 프랑스 기사대가 공격을 걸쳤다.공방의 도중에 아레크시오스 3세는 도망해, 남겨진 사람은 이사키오스 2세를 복위시키고, 성문을 열었다.
그러나, 아버지 이사키오스 2세와 함께 공동 황제로서 즉위 한 아레크시오스 4세는 십자군이라는 약속을 완수할 수 없었다.동 로마 제국의 국고에는 그 만큼의 돈이 없고, 동서 교회의 합동에도 정교회측의 격렬한 저항이 있어, 즉위 한지 얼마 안된 아레크시오스에는, 신세를 부과하거나 강제하거나 하는 힘이 없었다.십자군은 약속을 완수하도록 요구해, 또, 동 로마군이나 시민과의 사이에 옥신각신이 일어나, 점차 양자의 사이는 험악하게 되어 갔다.1204년 2월에 선제 아레크시오스 3세의 서인 무르즈포로스가 이사키오스 2세와 아레크시오스 4세를 모두 죽여 아레크시오스 5세를 칭한 것에 의해, 양자는 결렬해, 십자군은 다시 콘스탄티노풀을 공격하게 되었다.
제2회・약탈과 폭행
1204년 4월에 공격을 개시했지만, 이번은 동 로마측도 익숙해져 오고 있어 십자군측의 고전이 계속 되었다.그러나 콘스탄티노풀 성내에는 베네치아의 거류민이 여럿 살고 있어 그들이 동 로마에의 저항으로 돌았기 때문에, 동 로마측도 방위는 괴로운 것이었다.12일이 되어 십자군측이 성벽에의 침입에 성공해, 이것을 본 아레크시오스 5세는 깊은 밤에 도망해, 대신해 황제가 된 라스 성배도 저항을 단념해 도망했다.
동 로마측은 저항을 그만두었지만, 도시에 침입한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풀로 파괴와 폭행의 한계를 다했다.아기아・소피아대 성당에 틀어박힌 사람도 포함한 성직자, 수도사, 수녀, 시민들은 폭행・살륙을 받아 일반 시민・수녀의 별을 불문하고 여성들은 강간되었다.총주교좌에는 창녀가 들어앉아 추잡한 노래를 원마구 인 듯했다.시가 뿐만 아니라 성당이나 수도원으로도 약탈을 해 귀중한 물건들은 가지고 사라져지는지, 가지고 돌아갈 수 없는 것은 파괴되었다(콘스탄티노풀 경마장등의 역사적 건조물도 약탈・파괴되고 있다).이러한 콘스탄티노풀에 대한 베네치아와 십자군의 폭행은, 그들이 동 로마 제국의 신앙을 자신들과 같은 기독교의 것이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나타내고 있는[1].
콘스탄티노풀 공격을 동 로마에서 본 기록으로서는, 콘스탄티노풀을 간신히 탈출한 정치가 니케타스・코니아테스의 저서가 자세하다.
라틴 제국
새롭게 라틴 제국(- 1261년)이 만들어져 황제에게는 프랑 달러백보두안 9세가 선택되었다.영토는 베네치아나 몬페라트후(텟사로니키 왕국) 등의 주요 참가 제후로 분할되었다.교황은, 콘스탄티노풀 공격에 화냈지만, 공략 성공 후는 동서 교회의 통합을 축복했다.그 후, 십자군에게 이집트에의 출립을 재촉했지만, 그들은 획득한 영토에 눌러 앉고, 다시 출립 할 것은 없었다.그들의 상당수는, 시리아나 팔레스타인보다 국토가 풍부한 동 로마의 정복에 만족했고, 그 이상으로 현지의 반란이나 니카 귀 제국, 불가리아 제국의 침공에의 대처에 바쁘고, 원정할 경황은 아니었다.
십자군에 의한 동 로마 공략을, 사학자 호리고메용3은 「금시계를 손에 넣은 복수의 야만인과 같은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즉, 한 명이 황금의 케이스를, 한 명 갑자기 매를, 한 명이 바늘을 나누는 것으로, 각부품이 서로 연락이 부족하고는 기능하지 않는 것이라면.십자군 영주하에서 제각각인 영방에 분할된 라틴 제국이, 한 때의 동 로마 제국에 필적하는 유력한 정치적・경제적 존재가 될 것은 없었다.
한편, 동 로마의 황족들은 제국 주변의 각지에 망명해, 소아시아 서부의 니카 귀 제국, 소아시아 북동부의 트레비존드 제국, 발칸 반도 남서부의 에피로스 전제후국등을 세웠다.
영향
- 이 이후, 십자군은 로마 교황의 제어로부터 멀어져 참가한 왕후의 이해에 좌우되는 것이 한층 강해졌다.
- 서구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방벽의 역할을 완수한다고 보여지고 있던 동 로마 제국이, 다대한 인력, 재력을 빼앗겼기 때문에 약체화 당했다.1261년에 니카 귀 제국이 라틴 제국을 멸해 동 로마 제국을 부흥시켰지만, 국력은 이전에 비해 현격히 약해지고 있어 결국 왕년의 세력을 되찾지 못하고, 후에 오스맨 제국의 유럽에의 침입을 허락하게 되었다.
- 동 로마에 있던 대량의 성화상 등 미술품, 고대의 유물, 성유물, 다수의 서적이 가지고 사라져지거나 파괴 되거나 했다.다만, 결과론이지만, 동 로마에 남았지만 많게는, 후에 오스맨 제국에 의한 함락때 약탈되거나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종교상의 이유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귀중한 물건이 서구에 보존된다고 하는 효과도 있었다.
- 동 로마 제국의 국민이나 정교회의 사람들은 카톨릭측의 움직임에 대해서 깊은 불신감을 안게 되었다.그 후에 몇 번인가 시도된 성급한 동서 교회재통일의 움직임은, 국민이나 성직자의 반대로 따라 죄다 좌절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카톨릭에는, 이것의 원인을, 피리오크 문제등의 교의의 차이가 아니고, 제4회 십자군등의 정치적인 원인으로 돌려 보내는 논조가 있다.
- 베네치아가 동 지중해의 해상권을 확립했다.베네치아는 교묘한 외교로 동 로마 제국 부흥 후도, 그 뿐만 아니라 오스맨 제국 발흥 후도 긴 세월에 걸쳐 해상권을 계속 확보했다.
- 원군이 오지 않으면 안 안티오키아 공국, 트이폴리백령, 악콘 등 시리아 연안의 십자군 국가는 예루살렘 공략을 포기해 아이유브아침과 한층 더 휴전의 연장에 따라 연안부에서의 양자의 공존이 계속 된다.
각주
- ^타카하시 타모츠행 「동방의 빛과 그림자」103페이지, 춘추사(1991-05-30출판) ISBN 9784393261033 (4393261038)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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