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흠무
| 문왕대흠무 | |
|---|---|
| 발해 | |
| 제3대왕 | |
| 왕조 | 발해 |
| 재위 기간 | 737년- 793년 |
| 미야코노죠 | 구국→상경 류우센부→도쿄 타츠하루부 |
| 성・휘 | 대흠무 |
| 시호 | 문왕 대흥 호레키효감 금테성호세이 대학왕 |
| 생년 | 미상 |
| 몰년 | 대흥 56년(793년) |
| 부 | 무왕 |
| 원호 | 대흥 : 738년- 794년 호레키 : 774년- ?해(대흥의 한시기 사용) |
대흠무(매우 세균도)는 발해의 제3대왕.
목차
생애
통치 제도의 정비
무왕 오오타케재주의 삼남으로서 태어났다.인안 19년(737년)에 발해 왕위를 계승하면, 다음 해 대흥과 개원했다.즉위 후, 당은 내시를 파견해 발해군왕좌효위대장군홀한주도독에 책봉 되었다.그 치세는 당의 제도에 배워 국내를 정비하는 분지 정치에 특징이 있다.문왕 즉위 이전의 발해로는 부족제와 군현제가 병존한 행정 제도였다.그것을 당제에 모방해 상경 류우센부를 중심으로 해, 역내에 부주를 설치하는 것으로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확립하는 기초를 정비해, 또 중앙 통치 기구도 삼성 육부를 정비해 그 지배 체제를 강화했다.또 이 시대에는 산관제도와 훈등과 작위 제도가 정비되었다.
중앙 제도로는 당의 5경제에 모방해 상경・도쿄・나카교가 설치되어 780년대에는 도쿄 타츠하루부에의 천도가 실시되고 있다.또 「속일본기」에는 남해부의 명칭도 출현해, 동시에 도쿄의 명칭으로부터 사이쿄가 이미 정비되고 있었던 것이 유추 되어 이 시기에 발해의 5경제가 확립해 있었다고 유추 된다.이 5경제는 발해 뿐만 아니라, 후의 료나 돈의 시대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당에의 귀순과 문화 교류
문왕은 즉위 직후부터 당에 적극적으로 사절을 파견해, 반세기의 재위중에 기록에 남는 것만으로도 50회 이상의 통공이 확인되고 있다.이것은 정치적인 안정을 요구하는 목적 이외에, 당으로부터 선진적인 문화나 제도를 배우는 목적도 중시되었다.고왕대조영이나 무왕의 대에도 어느 정도의 유학생 파견과 한문 서적 도입이 행해지고 있었지만, 문왕이 즉위 하면 유학생수는 비약적으로 증대해, 보다 많은 한문 서적을 일본에 가져오고 있다.사실 이 시대의 묘비로 여겨지는 정혜공주 묘비와 정효공주 묘비에는 「서경」 「시경」 「주역」 「예기」 「춘추」 「논어」 「맹자」 「사기」 「한서」 「후한서」 「진서」 등 많은 서적으로부터의 인용을 볼 수 있다.
일본과의 교류
무왕의 대로부터 개시된 일본과의 교류는, 문왕의 대에는 수십회의 사절이 파견되어 또 사절의 규모도 대규모 것이 되었다.
사절 파견 당초는 안사의 난에 관한 정보교환이 있어, 또 반란에 의해 귀국이 곤란하게 된 견당사를 발해 경유로 귀국시키는 등의 성격이 있었지만, 그 성격은 점차 정치・군사적인 것으로부터, 점차 문화・경제적인 물건으로 변질하며 갔다.
또 국가로서의 시설 파견 이외에, 대흥 9년(746년)에는 발해인 및 철리인 수천 수백의 관중 다른 사람이 일본으로 향해 가 민간 무역을 계획하는 등,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한 외교 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안사의 난의 영향
당으로는 절도사인 안로쿠잔과 사사명에 의한 안사의 난이 발생하면, 그 영향은 발해에까지 미치게 되었다.안로쿠잔은 평노 절도사로서 발해・쿠로미즈 등 4부의 경략사의 직무를 겸임하고 있었지만, 당시의 관제로는 발해 도독부의 상부 기구이며, 안사의 난은 발해의 상부 기구에 의한 반란이었다.이 반란은 발해에 파급하는 것을 무서워한 문왕은 서부 국경에 대군을 배스와 함께, 일본과도 연락을 해 사태의 대응에 임했다.
대흥 18년(755년), 안로쿠잔의 연군은 당의 동도인 낙양을 점거해, 이윽고 동관을 통과해 장안에 이르렀다.이것에 의해 현종은 시센으로 피했지만, 일련의 전투의 영향을 접수영주 지역은 흐트러져 발해와 당의 교통이 토막토막 끊기는 사태가 되어, 이 전후 4년간, 당측의 기록에서는 발해입공의 기록은 자취을 감추었다.
이것에 대해당은 지방 기관보다 2도 사자를 발해에 파견하고 있다.처음은 대흥 19년(756년) 추에 평노 후(절도사의 대행)인 서귀도에 의한 사절이며, 발해에 대해 반란 진압을 위한 군사의 출병을 요구하는 것이었다.이 때는 서귀도가 당 을 거역해 안로쿠잔에게 달린 것을 알아 출병은 보류되고 있다.또 대흥 20년(757년)에는, 권지평노 절도사의 왕현지가 황제칙서를 받들어 장군의 왕진의를 파견했다.당시 현종은 시센에 피해 태자 이 토루가 령무군에서 즉위 해, 장안 및 낙양의 회복을 계획하고 있었던 시기에 상당해, 이것에 관련한 사절 파견이다고 추측된다.그러나 이 때도 문왕은 신중한 태도를 취해 구체적인 행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안사의 난에 즈음하여 발해는 제비에게 호응 하는 것이나, 혼란을 타 세력 확대를 행하는 것을 피해 지극히 신중한 행동을 취해, 일관해서 당을 지지하고 있었다.이것은 안사의 난 평정 후의 대흥 22년(759년)에 양방경을 당에 입조시켜, 다음 해의 정월을 축하하고 있는 행동이 하나의 방증이라고 생각되고 있다.또 당도 대흥 25년(762년)에 문왕을 발해군왕으로부터 발해 국왕으로 변경하고 있어, 이것으로부터도 발해와 당의 반란 기간중의 양호한 관계가 추측된다.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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