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위기



쿠바 위기(쿠바 (들)물어, 영: Cuban Missile Crisis, 서: Crisis de los misiles en Cuba, 이슬:Карибскийкризис)는, 1962년 10월부터 11월에 걸쳐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의 건설이 밝혀진 것으로부터 아메리카 합중국이 카리브해에서 해상 봉쇄를 실시해, 아메리카 합중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이 대립하고 긴장이 높아져, 전면핵전쟁 직전까지 달한 위기적인 상황.
목차
개요
1962년 여름에 극비에 소련과 쿠바는 군사 협정을 체결해, 소련이 쿠바에 은밀하게 핵미사일이나 병원, 발사대, 로켓, 전차등을 보냈다.그것을 정찰비행으로 핵미사일 기지의 건설을 발견한 미국이 쿠바를 해상 봉쇄(격리)하고, 핵미사일 기지의 철거를 강요해[주 1],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태에 빠져, 당시의 케네디 대통령과 흐루시초프 수상으로 서간으로 교환하면서, 최종적으로 소련이 핵미사일을 철거해 이 위기는 끝났다.
위기의 기간에 대하고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이 공중사찰로 미사일 기지를 발견한 1962년 10월 14일부터 혹은 대통령에 그 정보가 들어간 10월 16일부터 흐루시초프가 미사일 철거를 전한 10월 28일까지로 하는 것이 많은[주 2].그러나 소련이 핵미사일을 쿠바로부터 철거해, 미국이 봉쇄 해제한 것은 11월 21일이다.
이 위기는 쿠바・미사일 위기라고도 불려 또 이 1년반전의 1961년 4월의 핏그즈만사건을 제1차 쿠바 위기라고 불러, 이 1962년 10월의 위기를 제2차 쿠바 위기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경과
쿠바 혁명
1959년 1월에 쿠바 혁명으로 친미 한편 군사 독재의 후르헨시오・바티스타 정권을 타도해, 그 후 수상의 자리에 든 피델・카스트로 수상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학생들과 함께 게릴라 활동을 실시해 친미 정권을 넘어뜨린 것으로부터, 혁명 후에 미국에 대해서 어떠한 자세를 취하는지 염려되고 있었다.
이러한 염려에 반해 카스트로는 「아메리카 합중국에 대해서 변함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라고 표명해, 이미 4월에 워싱턴 D.C.(을)를 방문해 미국 정부에 대해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과 동시에, 혁명 정권의 승인을 요구했다.
그러나 카스트로로부터의 공식 회담의 신청을 받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카스트로가 혁명 전보다 CIA의 보고로 「용공적」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마저도 축 늘어차고 있었던 것에 가세해(당시 카스트로는 자신이 공산주의자인 것을 명확하게 부정하고 있던), 아메리카 합중국의 괴뢰 정권이었던 바티스타 정권을 배후로부터 조종해 쿠바에 많은 이권을 가지기에 이른 미국의 대기업이나 마피아로부터의 압력을 받고, 「평소부터 예정되어 있던 골프하러 간다」라고의 이유로 공식 회담에 결석해, 대신해 회담한 리처드・닉슨 부통령과도 단시간의 면회 정도로 끝낼 수 있는 등, 명백한 푸대접을 받게 되었다.[요점 출전]
쿠바와 소련의 접근
이러한 「예상외」의 푸대접에 반발한 카스트로 수상은, 미국과의 우호 관계의 계속과 지원을 받는 것에 아직 기대를 가지면서도, 귀국후에 농지의 접수를 포함한 농지개혁법의 시행을 발표했다.당시 유나이티드・프루츠와 그 관련 회사가 쿠바의 농지의 7할 이상을 소유하고 있던 것으로부터, 이것은 사실상 미국 기업의 자산의 접수를 목적으로 한 법의 시행이라는 것이 되어, 미국 정부나 기업으로부터의 큰 반발을 받게 되었다.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중, 카스트로는 전방위 외교를 내거는 것으로 각국으로부터 혁명 정권의 승인을 받는 것을 목론 봐, 혁명의 동지로 공업 대신으로 취임한 엘네스트・최・게바라를 일본을 시작으로 하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제국에 파견했다.한층 더 카스트로는, 남동생 라울・카스트로 국방 대신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의 수도의 모스크바를 방문시켜, 아나스타스・미코얀 제일 부수상을 하바나에 초청 하는 등, 냉전하에서 아메리카 합중국과 대치하고 있던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과의 접근을 개시한다.
그 후도 쿠바와 미국의 관계는 악화의 일로를 더듬어, 1960년 1월에는 유나이티드・프루츠의 농지의 접수를 실시한 것 외, 2월에는 소련의 아나스타스・미코얀 제일 부수상의 하바나 방문을 받아 들여 소련과의 설탕과 석유의 사실상의 바터 거래나 유리한 조건으로의 차관의 수락, 한층 더 소련으로부터의 무기 조달의 거래에 조인했다.아메리카 합중국 본토의 이웃나라인 쿠바가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과 손을 잡는 사태를 받아 아메리카 합중국은 공산주의국가가의 위협을 가까이서 느끼게 되었다.
미국과의 대립
동년 4월에는 이미 소련의 탱커가 쿠바의 항구에 도착해, 게다가 6월에는, 쿠바 정부에 의해 유나이티드・프루츠나 체이스・맨해튼 은행, 퍼스트・내셔널・시티 은행을 시작으로 하는 아메리카 합중국의 정부나 기업, 국민이 소유하는 모든 쿠바 국내의 자산의 완전 국유화를 개시하는 것과 동시에, 온건적인 르포・로페스 대장 대신의 경질(그 후 미국에 망명) 등, 쿠바와 미국의 대립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게다가 9월에 미국 정부는, 미국내에 있는 모든 쿠바 자산을 압류하는 것과 동시에, 쿠바에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실시한 나라에 대한 제재를 규정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같은 달 하순에 카스트로는 스스로 유엔 본부에서 개최되는 국제연합총회에 출석할 수 있도록 뉴욕시를 방문했지만, 이것에 대해서 미국 정부는 쿠바 대표단의 맨해튼 섬 외에의 외출을 금지해, 한층 더 숙박 예정의 쉘 뼈・호텔은 쿠바 대표단에 대해서 방대한 액의 「보상금」의 지불을 요구하는 등, 짖궂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 대응을 했다.또한 그 후 할렘에 있는 안호텔로 이동한 카스트로는, 호텔을 방문한 흐루시초프나 가마르・아브둘=나셀, 말콤 X등과 회담해, 게다가 26일에는 국제연합총회에 대해 4시간 29분에 걸치는 장시간의 연설을 실시해 쿠바 혁명의 의의를 자화자찬하는 것과 동시에 미국을 비난 했다.
아이젠하워 정권은 한층 더 대항책으로서 쿠바의 최대의 산업인 설탕의 수입 정지 조치를 취하는 형태로 수출입 금지 조치를 단행해, 1961년 1월 3일에는 쿠바에 대해서 국교 단절을 통고했다.이전, 대량의 쿠바로부터의 피난민이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모여, 그 수는 10만명에 이르렀다.
미국에 의한 쿠바에의 군사 침공
핏그스만사건
이것에 앞서는 1960년 3월에, 카스트로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에의 접근을 우려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CIA는 카스트로 정권 전복 계획을 비밀리에 개시했다.쿠바 혁명으로 모국을 탈출해 온 망명자 1,500명을 「해방군」으로서 조직화해, 1954년의 PBSUCCESS 작전에 의해 친미 군사 정권이 성립하고 있던 과테말라의 기지에 있어 게릴라전의 훈련을 실시했다.미국의 군사 원조와 자금 협력 아래로 쿠바 상륙 작전을 감행 시키기 때문에 있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벌써 퇴임 가까웠던 모아 두어 이 쿠바 문제로부터 손을 떼어, 그 다음은 리처드・닉슨 부통령과 CIA의 알렌・다레스 장관등에 의해서 작전계획은 진행되었다.
그리고, 병원수와 물자로 압도적으로 열세함 반 카스트로군이 쿠바 정부군에게 이기기 위해서는, 미군의 개입이 필요라고 본 CIA는 작전계획에 미군도 집어 넣고 있었다.표면적으로는 망명한 반 카스트로군이 고국 쿠바의 독재 정권을 넘어뜨려 카스트로를 추방한다고 하는 목적은 그대로 있었지만, 원래의 계획에는 쿠바 국내에서의 반정부 그룹의 지원을 전망하고, 또 카스트로 체제가 아직 반석은 아니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1960년 11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해 1961년 1월 20일에 존・F・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 이 카스트로 정권 전복 계획을 CIA와 군부로부터 케네디는 설명을 받았다.이 때에, 어디까지나 미군이 직접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CIA의 원조하에서 망명 쿠바인이 조직 한 반 카스트로군이 진행하는 작전으로서 설명을 받고, 케네디는 미국의 원조아래에서의 작전으로서 이해해 미군이 직접 개입하지 않는 것을 조건에 작전을 허가했다.작전은 2개의 단계가 있어, 최초의 4월 15일에 공군 비행장을 폭격해 쿠바 정부군기를 괴멸 시키고 제공권을 빼앗아, 4월 17일에 핏그스만(코치노스만)에 함선의 원조를 받아 상륙 작전을 실행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4월 15일에 우선 최초의 공폭 작전이 실행되었지만, 이 쿠바 공군 기지의 폭격이 실패해, 제공권을 확보 가능한 지금 뭐, 4월 17일에 1400명의 망명 쿠바인 부대가 핏그스만에 상륙했을 때에, 상륙을 예상한 쿠바 정부군의 반격을 당해[주 3], 하늘에서 쿠바 공군의 공격을 받아 앞바다에 대기한 함선이 격침되고, 탄약도 식량도 결핍하는 사태 중(안)에서 해안에서 꼼짝 못해 버렸다.여기서 당초 미군은 개입하지 않으면 군과 CIA는 케네디에게 설명하고 있었지만, 미군을 개입시키고 싶다고 군이 주장하는에 두고, 케네디 대통령은 거부해 혼란 중(안)에서 작전은 실패에 끝났다.1189명이 포로가 되어, 114명의 망명 쿠바인이 전사한[주 4].그리고 최초의 폭격에 미군이 관련되고 있는 것이 밝혀지고, 세계에서 미국으로 비난이 집중한[주 5].
이 핏그즈만사건의 직후의 4월 28일에, 케네디는 「서반구에 있어서의 공산주의자와는 교섭의 여지가 없다」로서 쿠바에 대한 경제 봉쇄의 실시를 발표한[주 6].또한 미국의 이러한 군사 침공이나 경제 제재의 실시를 받고, 쿠바 정부는 앞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인 것을 선언해 미국의 도발에 대답했다.1962년초에는 미주 기구(OAS)로부터 쿠바는 추방되었다.
빈 회담
핏그즈만사건으로부터 2개월의 6월 3~4일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케네디 대통령과 흐루시초프 수상은 처음이자 마지막의 정상회담에 임했다.이 회담에서 케네디가 지론인 대국끼리의 「오산」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흐루시초프는 쿠바 문제에 대해 「바티스타를 지지했던 것이 쿠바 국민의 분노가 미국을 향하고 있는 이유입니다.쿠바 상륙 작전은 쿠바의 혁명 세력과 카스트로의 지위를 강하게 한 것만으로 있다.불과 600만명의 쿠바가 미국에 있어서 위협입니까?미국은 타국의 국내 문제에 개입하는 선례를 만들어 버렸다.이 상황은 오산을 일으키게 된다」라고 말해, 케네디는 쿠바의 상황에 관해서 판단 미스가 있어 핏그스만사건은 잘못인 것을 인정해 양자는 「오산을 낳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에 동의 한[1].이 때, 케네디는 「 나는 정책 판단을 하는 경우에, 소련이 다음에 세계에서 어떻게 움직일까에 근거해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이것은 당신이 미국의 움직여에 관해서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와 같다.고로 이 회담을 이러한 판단에 의해 큰 정확함 을 가져오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하고 싶다」라고 흐루시초프에게 말해, 그리고 흐루시초프는 「위험은 미국이 혁명의 원인을 오해했을 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반격한[2].
몽구스 작전
핏그스만사건의 7개월 후의 1961년 11월, 케네디는 군사 작전과는 별도로 은밀 작전의 검토를 시작해 그 특별 그룹을 편성한[3].그리고 카스트로 타도 계획을 세우는 중심 인물로서 에드워드・란스데이르 공군 소장[주 7]을 작전 입안자로 지명해, 정권의 총력을 들어 카스트로 정권 타도를 목표로 하는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을 극비리에 개시했다.다만 군사 훈련을 베푼 망명 쿠바인을 쿠바 본토에 파견해 파괴 활동을 실시시켜, 재차의 쿠바 침공 작전의 계획 입안을 진행시킨 것은 아니고, 란즈데이르가 국방총성으로 검토를 더한 것은 파괴 공작・경제적 방해・심리전등에서 될 계획으로 은밀 행동이 주요하고, 그 중에는 카스트로 암살 계획도 있어, 1962년 10월까지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킨다고 하는 것이었다.
오늘, 케네디 정권이 어디까지 진심으로 이 몽구스 작전을 실행할 생각에서 만났는가는 불명한[주 8].미군에 의한 쿠바 침공 작전이라고 하는 대규모인 계획은 아니고 은밀하게 카스트로를 암살하는 것이었다고 하는 견해와 한편에서는 당시 CIA는 벌써 카스트로 체제가 예상 이상으로 강하고 은밀 작전만으로 체제를 전복 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고, 대규모 군사 행동이 필요하다라는 생각으로부터 군사 작전의 기본계획을 가다듬고 있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는[4].
「몽구스 작전」은 서서히 속도를 올려 진척 해, 쿠바에서 미사일 기지가 발견되었을 때의 1962년 10월 15일에 작전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급거 중지가 된[주 9].그것은 기이하게도 쿠바에의 미사일 배치 계획과 거의 시기를 1으로 하는 것이었다.
쿠바에의 핵미사일 배치
아나디르 작전
그러한 상황하로, 쿠바와 소련의 관계는 한층 친밀화해, 카스트로는 미국의 쿠바 침공에 대비해 소련에 최신예의 제트 전투기나 지대공미사일등의 공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그러나 소련은 1962년 여름에는, 최신 병기의 제공 대신에 비밀리에 핵미사일을 쿠바 국내에 배치하는 아나디르 작전[주 10]을 가결해, 쿠바측의 카스트로도 이것을 승낙했다.
쿠바에의 미사일 배치를 흐루시초프가 검토를 시작한 것은 1962년 4월의 끝나갈 무렵으로, 미코얀 제일 부수상과의 회화속에서 미사일 배치가 화제가 되어, 그 후 마리노후스키 국방장관이라고도 협의를 시작하고 있다.미코얀은 당초 회의적이었다.후에 흐루시초프가 쓴 회고록에 의하면 그가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한 동기는 무엇보다도 쿠바의 방위인[5].그러나 단지 방위 뿐이었다면, 일부러 은밀하게 극비에 핵미사일을 옮기지 않아도 당당히 쿠바와 협정을 연결해 통상 병기를 공여하는 것이 케네디도 반대할 수 없었고, 만일 그것이 소규모의 것이어도 미국이 공격해 오는 경우는 소련병과 직접 전투가 되는 리스크가 생겨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과 소련이 직접 무력으로 싸울 각오를 필요로 해, 그러므로에 미국의 쿠바 침공의 억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흐루시초프에게는 미사일 배치의 밸런스로 미국과 균형 시키기 위해서 굳이 핵미사일의 배치를 고집했다고 말할 수 있는[6].
아나디르 작전의 배경에는, 당시 핵미사일의 공격 능력으로 대폭적인 열세하게 서게 되어 있던 소련이 그 불균형을 만회하는 목적이 있었다.미국은 본토에 소련을 공격 가능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배치해, 더해 서유럽, 그리고 터키에도 최근 중거리핵미사일을 배치하고 있었다.이것에 대해, 소련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은 아직 개발 단계에서, 잠수함과 폭격기에 의한 공격 이외에 미국 본토를 직접 공격하는 수단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소련이 아나디르 작전에서 쿠바에의 군사력의 전개를 하려면 사전의 발각을 피해 그래서 있어 고성능의 전투기, 지대공미사일, 그것을 관리하는 부대나 대량의 장비품, 그리고 약 5만명의 파병이 필요하고 그러한 인원이나 장비품을 수송하는 선박이 대략 85척이 필요하고, 게다가 그 선박은 몇번이나 왕복해야 했다.이 때에 옮긴 인원 및 장비는 이하와 같은[7].
- 전술 핵병기
- 중거리 탄도 미사일(IRBM) 24 모토이, 히토시 중거리 탄도 미사일(MRBM) 36기
- 육상 병력
- 4개 연대 배합해 1만 4000명.이것들은 기갑화 되어 있지 않지만 각 연대에 전차, 대포, 대전차미사일을 장비.그리고 사정 40킬로의 단거리 로켓 36기.
- 항공 병력
- 경폭격기 「이류신」(II28) 42기, 전투기(MiG21) 40기, 그 외 지대공미사일 72기.
- 연안 방위
- 순항 미사일(KR-1) 80기, 순항 미사일(S-2) 32기, 순시정 12척.
이 그 밖에, 해상 병력으로서 잠수함 11척등도 예정하고 있었지만, 결국 쿠바에는 보내지지 않았다.그리고 쿠바에 파견된 인원은 4만 5234명으로, 이 내해상 봉쇄가 시작된 시점에서 3332명은 아직 공해상에서 만난[8].
군사 협력 협정
쿠바와 소련은 전에 없는 대담하고 광범위한 군사 협력이었기 때문에, 7월에 라울・카스트로가 모스크바를 방문해 양국간의 권리・의무・책임을 확인해 「쿠바 주둔 소련군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이 앞으로 8월에 최・게바라등이 소련방문 해 재조정해 재차 2국간의 「군사 협력 협정」이 연결되었다.그 때에 공표를 요구하는 쿠바에 대해서 흐루시초프는 공표할 필요는 없다고 해 치우고 있는[9][주 11].
정찰비행
1962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소련이나 그 동맹국의 화물선이 집중적으로 쿠바의 항구에 출입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의심스럽게 생각한 미군은, 쿠바 근해의 공해상을 왕래하는 소련이나 그 동맹국의 선박이나 쿠바 국내에 대한 정찰비행을 강화하고 있었다.CIA는 소련선의 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의 의미를 검토하고 있었다.또 망명 쿠바인이나 동맹국(덴마크・터키・스페인등)의 정보 기관으로부터도 정보가 들어 왔다.8월에 CIA는 4000~6000명의 소련인이 쿠바에 입국하고 있다고 결론 지었다.소련이 전략 미사일을 배치하려고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소련은 그만큼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상 전무인[10].그리고 8월 23일에 케네디는 마콘 CIA 장관에게 쿠바에 핵미사일이 존재하는 것은 용인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이 때에 소련이 핵미사일의 배치를 시도하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마콘 이외 네 없었다.그리고 CIA 내부에서도 소련은 핵을 옮기고 있다고 분석할 것은 없고, 9월 19일에 CIA가 정부에 제출한 보고 「특별 국가 정보 평가」안의 「쿠바의 군사력 증강」에서도 같은 견해였다.그것은 소련의 과거의 행동 패턴에도 예측하는 정책에도 합치하지 않는 것인[11].그리고 9월에 쿠바 상공에 정찰기를 날리는 것을 제한한[주 12].
국내의 움직임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케네디 대통령은, 확실한 증거가 아직 손에 들어 오지 않지만 만약 배치되고 있으면 용서는 하지 않는다는 경고를 낼 결의를 했다.8월 31일에 뉴욕주 선출 상원의원 케네스・키팅[주 13]은 케네디 정권은 쿠바 문제에 대해서 의도적인 태만을 계속하고 있다고 비난 하고, 이후 소련은 1000명 이상의 부대를 쿠바에 파견해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고 지적해, 그 밖에 배리・고르드워타[주 14], 존・타워등의 유력한 공화당 상원의원으로부터도 쿠바에의 행동을 취하도록(듯이) 요구를 내고 있었다.의원의 아래에서 망명 쿠바인으로부터의 정보가 들어가 있었다.9월 4일, 케네디는 의회의 대표자와 회담해, 현시점에서 소련군의 대규모 전개는 있지만, 지금까지의 감시에서 봐 방어적인 성격이다고 설명하고, 같은 날에 성명을 발표해 「전투부대가 조직도 파견되고 있는 증거는 없다.군사기지를 제공하고 있는 증거도 없다」라고 서론 해 「이러한 증거가 있다고 되면, 가장 우려해야 할 문제가 생겨 극히 심각한 사태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9월 6일에 소련의 드브르이닌 주미대사로부터 「중간 선거전에 소련이 국제 정세를 복잡하게 하거나 미소 관계의 긴장을 늘리거나 하는 조치는 취하지 않는다.단 미국이 그러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이 조건이다.소련은 쿠바에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있지 않고, 모두 방위적 성질의 것으로 미국의 안전하게 위협을 주는 것은 아니다」라는 코멘트가 소렌센 대통령 고문을 통해서 전해졌다.9월 7일에 케네디는 1만 5000명의 예비역을 소집하는 권한을 의회에 요구해, 게다가 9월 11일에 「언제 어떤 형태든 쿠바가 소련에 군사기지를 제공했을 경우는, 미국은 자국 및 동맹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모두 실시한다」라고 다시 성명을 낸[12].
같은 9월 11일에 소련은 성명을 발표해 쿠바에 대한 어떤 군사 행동도 핵전쟁을 일으킬 고 경고 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사이에도 소련으로부터, 통상의 공작기기의 수출에 교묘하게 위장 된 소련제핵미사일이나, 핵병기가 탑재 가능하고 미국 동해안의 주요 도시에 이르는 항속 거리를 가진 이리유신 Il-28 폭격기가 비밀리에 화물선으로 쿠바에 옮겨졌다.한층 더 핵병기의 배치에 필요한 기술자나 군병사도 쿠바에 보내져 급속히 핵미사일이 쿠바 국내에 배치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초 미군의 해석반은, 이러한 화물선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미국으로부터의 경제 제재의 발령에 수반하고 공급이 멈추어, 그 대신에 소련에서 보내지게 된 드럼통에 들어간 가솔린이나 목재이라고 해석했다.한층 더 중앙정보국(CIA)에 의한 분석으로는, 화물선으로 쿠바에 옮겨진 소련 군병사의 수도 실제는 4만 3000명 정도 있던 것을, 그 4분의 1 이하의 약 1만명으로 추측하는 등, 케네디의 명령에 의해 정찰기에 의한 촬영이 제한되어 버린 미국의 정보 팀은, 소련에 의해서 행해진 교묘한 위장을 전혀 간파할 수 없었다.
간신히 9월 하순에 들어간 케네디는 쿠바 상공의 정찰비행을 재개시켰지만, 이전에 쿠바에 소련으로부터 SS-4핵미사일과 그 탄두 99개, 한층 더 핵병기의 탑재가 가능한 이리유신 Il-28 폭격기가 비밀리에 옮겨져 동시기에 화물선의 배 밑바닥에 꽉꽉에 담겨 보내진 만 단위의 소련 장병과 함께, 쿠바 국내에의 배치가 시작되어 있는 것에는 깨닫지 않은 채에서 만난[13].
핵미사일 기지의 발견
1962년 10월 9일, 미군의 상공 정찰 위원회는 U-2 정찰기에 의한 하바나 남방의 산크리스트발 일대의 정찰비행을 제언했다.쿠바로부터의 인적 정보로 특히 이상하다고 본 지역이다.케네디는 곧바로 허가했지만 이 임무는 악천후 때문에 며칠이나 연기가 되어, 간신히 10월 13일 오후 11시 반에 캘리포니아주 에드워즈 공군 기지로부터 날아 올랐다.그리고 다음 10월 14일의 아침까지는 쿠바에 이르러, 쿠바 상공에서 정찰비행을 실시해, 플로리다에 귀착한[14].
이 미국 공군의 록히드 U-2 정찰기가 촬영한 사진을, 다음 15일 월요일의 오전에 워싱턴의 국가 사진 해석 센터(NPIC)에서 필름의 해석을 해 오레그・펜 뽐내며 자부함 스키 대령이 가져온 기술 시방서나, 메이데이 시에 크레믈린 광장을 미사일 탑재차가 퍼레이드 했을 때의 사진이라고 봐 비교해 해석한 미국 공군과 CIA의 해석반은, 미국 본토를 사정내로 하는 소련제 준중거리 탄도 미사일(MRBM)의 존재를 발견, 한층 더 그 후 3개의 중거리 탄도 미사일(IRBM)을 발견한[15].
10월 16일(화)
이러한 사진은 10월 16일 아침에 CIA 고관 리처드・헬무즈에 의해서 백악관에 도착된[주 15].케네디 대통령은 16일 오전 9시에 마크죠지・밴 디 국가 안전 보장 담당 보좌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아 11시 45분부터 긴급하게 국가 안전 보장 회의를 소집하는 결정을 내렸다.게다가 이 회의에는 평소의 멤버에 가세하고, 그 이외의 멤버를 모았으므로 후에 국가 안전 보장 회의 집행위원회(액스 컴)로 불리게 되었다.
액스 컴
이 액스 컴의 회의에는 14~15명이 모여, 주된 멤버는 존슨 부통령, 러스크 국무장관, 볼 국무차관, 마크나마라 국방장관, 기르파트릭크 국방 차관, 마콘 CIA 장관, 로버트・케네디 사법 장관, 디 론 재무 장관, 스티븐 손 유엔 대사, 테일러 통합 참모본부 의장, 마크죠지・밴 디 보좌관, 오돈넬 대통령 특별 보좌관, 소렌센 대통령 고문, 애치슨 모토쿠니 츠토무 장관, 라베트 모토쿠니 보초관등에서 있던[16].이 자리에서 케네디는 직면하는 위험과 이것에 대처하는 모든 행동을 즉시 철저하게 조사하도록(듯이) 명했다.그리고 철저한 기밀 보관 유지도 명했다.이 10월 16일부터 13일간이 역사에 깊게 새겨져 핵전쟁의 직전까지 말한 쿠바 위기의 기간이다.
대통령 고문인 소렌센이 1965년에 쓴 저서 「케네디의 길」안에서, 이 16~19일까지의 96시간이 오전・오후・야간을 불문하고 회의의 연속이었다고 한다.그 사이에 새로운 공중 사진의 분석이 진행되어, 근거리용 공격용 미사일이 배치된 지점이 6개소에 올라, 중거리용 미사일(IRBM) 용의 기지로 하기 위해서 파진 곳이 3개소 발견되었다.
6개의 선택사항
여기서 멤버가 지금부터 행동으로 옮기는 가능한 코스로서
- 소련에 대해서 외교적 압력과 경고 및 정상 회담(외교교섭만)
- 카스트로에게의 비밀리의 어프로치
- 해상 봉쇄
- 공폭
- 군사 침공
-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의 6개의 선택사항을 들었다.그리고 1.의 외교교섭만과 6.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은 최초부터 진지하게 토의되었다.18일밤의 단계에서도 외교교섭만의 안을 지지하는 멤버(주로 국무성 관계자)도 있었지만, 케네디는, 1.(와)과 6.의 어느쪽이나 각하 했다.2.의 카스트로에게의 어프로치도 상대는, 쿠바는 아니고 소련이 상대인 것으로 각하가 되었다.그리고 5.의 군사 침공도 1명[주 16]을 제외해 적극적인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케네디가 「침공은 마지막 손이며 최초의 손은 아니다」라는 의견이, 거의 전체의 의견 일치가 되었다.남고는 3.의 해상 봉쇄나 4.의 공폭으로, 처음은 공폭이 유력했다.소렌센은 적어도 17일의 단계까지 케네디도 공폭에 기울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17][주 17].
마크나마라는, 16 일 저녁의 회의에서 해상 봉쇄를 해 쿠바의 움직임을 지켜봐, 그 반응에 따라서는 소련과 싸운다고 말한[18].로버트・케네디는, 사전 경고 없음의 공폭은 「진주만 공격의 반대」이며 역사에 오명을 남긴다고 말해 이 사전 경고를 했을 경우는 반대로 소련에 반격의 찬스를 주어 한편 흐루시초프가 반격에 나서 바구니 얻지 않는 상황에 몰아넣고, 오히려 위험한 상황이 되는 것이 예상되었다.
테일러 통합 참모본부장은 저녁까지의 사이에 다른 참모들이라고 협의하고, 1회의 외과 수술적 공폭으로는 불충분하고, 쿠바의 군사적인 목표 전체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공폭이 필요라고 인식하고 있던[19].
10월 17일(수)
사전 경고의 문제
17일의 회의에서 아드레이・스티븐 손 유엔 대사는 「평화적 해결 수단이 모두 쓸데 없게 끝날 때까지 공폭 등은 하고는 되지 않습니다」라고 대통령에 강하게 주장한[20].여기서 공폭 전에 사전 경고의 필요가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통합 참모본부의 멤버는 쿠바에의 공폭을 지지하고 있었지만, 마크나마라나 로버트・케네디는 해상 봉쇄를 주장했다.존・마콘 CIA 장관은 사전통고 없음의 공폭에는 반대였다.그는 흐루시초프에게 24시간의 유예를 주어야 하는 것으로 이 순서를 밟아 그러나 최후통첩에 응하지 않는 경우에 공격을 실시한다고 주장했다.딘・애치슨 모토쿠니 츠토무 장관은 보다 강하고 발견된 미사일을 시급하게 파괴하기 위한 외과 수술적 공폭에 찬성했다.여기서 아인젠하워에 전화로 케네디는 의견을 듣고 있지만, 전대통령은 쿠바에 있는 군사 목표 전체에의 공폭을 지지했다.한편 스티븐 손 유엔 대사는, 터키에 있는 주피터・미사일과 쿠바에 있는 핵미사일을 거래하는 것을 검토하도록 요구한[21].
잭 린 부인의 결의
이 날까지 케네디 대통령은 잭 린 부인에게 사태가 용이하면 바구니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전하고 있었다.
백악관 경호관으로 대통령 부인 담당의 크린트・힐[주 18]은 긴급사태에 대비해 대통령 부부와 협의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이 10월 17일에 잭 린 부인과 불측의 사태가 일어났을 경우의 대응에 대해 솔직하게 서로 이야기하기로 했다.그때까지 비밀 정보 기관은 대통령의 가족 및 정부의 요인을 피난시킬 계획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사태가 발생한 직후는 급히 백악관의 지하의 핵피난소에 들어가게 되어 있던[22].
이것을 잭 린 부인에게 전하려고 했을 때에, 반대로 대통령 부인은 「핵피난소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때, 내가 어떻게 하는지, 알려 두어요」로서 「만약 사태가 변화하면, 나는 캐로라인과 존 JR의 손을 잡아, 백악관의 남뜰에 갑니다.그리고 용감한 병사와 같이 거기에 서, 모든 미국인과 같이 운명으로 향합니다.」(이)라고 말했다.크린트・힐은 「그렇게 되지 않게 신에 기도합시다.」(이)라고 대답하는 것만으로 있던[23][주 19].
10월 18일(목)
로버트의 5살의 시안
18일의 회의에서 로버트・케네디는,
- 1주일의 준비와 서구 제국과 라틴 아메리카 제국에의 통고의 뒤에 24일에 MRBM의 시설을 폭격한다
- 흐루시초프에게의 경고의 뒤에 MRBM의 시설을 폭격한다
- 미사일의 존재・향후 저지할 결의・전쟁의 결의・쿠바 침공의 결의를 소련에 통고한다
- 정치적 예비 회담을 실시해 실패의 경우에 공폭과 침공을 실시한다
- 정치적 예비 절충 없이 공폭과 침공을 실시한다
의 5개의 선택사항을 제시한[24].러스크는 1.에 반대해, 국방성 관계자는 2.에 반대했다.국무성 관계자는 3.에 찬성이었지만, 단 공폭의 전제는 아니고 감시 강화가 전제였다.4.(와)과 5.에는 의견은 없었던[25].
이 날에 소련 문제 담당 고문으로, 후에 주소 대사가 된 류웨린・톰프슨이 출석하고, 흐루시초프는 어떠한 거래를 목적으로 미사일을 배치해, 그것은 베를린 문제로 어떠한 미국의 양보를 끌어 내기 위해서가 아닌지, 라고 생각해 흐루시초프에게 교섭의 기회를 주는 것이 소중하다고 주장했다.갑자기 군사 행동으로는 보복을 부르는 것만으로 있어, 그 다음은 예측도 제어도 할 수 없다고 하고, 해상 봉쇄이면 소련은 봉쇄를 돌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미사일 기지의 작업의 중지 및 철거는 어렵다는 염려를 나타낸[26].
전날 공폭 반대를 주창한 스티븐 손 유엔 대사는 이 날뉴욕으로 돌아오기 전에 대통령에 문서를 보내, 쿠바에의 공격은 소련이 터키나 베를린에 보복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높고, 결과적으로 핵전쟁이 된다고 강조한[27].
이 단계에서 봉쇄와 공폭의 2개의 선택사항이 남아 있었지만, 실제는 양자택일이 아니고, 해상 봉쇄로부터 공폭으로 하는 생각과 어느 쪽이든 최후는 쿠바 침공으로 하는 생각으로, 이 액스 컴 회의에 출석하고 있던 멤버의 대부분은 최후는 침공할 필요가 있는 것을 이해하고 있던[28].
그리고 해상 봉쇄의 경우에, 흐루시초프가 철거에 응하는 대신에 요구해 오는 요소를 여러가지로 검토하고, 터키의 미사일이 부상해 왔다.또 해상 봉쇄가 엄밀하게는 전쟁 행위이므로, 전쟁에 돌입하는 일 없이 해상 봉쇄를 법적으로 정당화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지, 이 문제로는 러스크 국무장관과 마틴 국무 차관보가 1947년에 체결한 리오 조약(미주 상호 원조 조약)에 근거해 미주 기구(OAS)의 승인을 얻는 것을 제안해, 또 18일밤에 미 카 국무성 법률부고문이 「해상 봉쇄」를 「격리」라고 해 바꾸는 제안이 나왔다.
여기까지 강경하게 공폭을 주장해 온 군도 처음은 봉쇄하고, 흐루시초프의 나오는 태도에 따라서는 공폭이나 군사 침공도 시야에 넣는 것으로 그 주장을 후퇴 시켰다.그리고 봉쇄의 경우에 철거시키는 것은 공격용 미사일만으로 하는 것으로, 이 날에는 케네디는 해상 봉쇄의 선택에 기울었다.
그롬이코 외상 방문
이러한 백악관내의 극비의 움직임 중(안)에서, 이 날오후 5시에 소련 외상 안드레이・그롬이코가 백악관을 찾아 왔다.이것은 그 이전부터 예정하고 있던 것으로 국제연합총회를 위해서 방미해 의례적인 방문이었다.케네디는 이 장소에서는 공격용핵미사일을 발견한 것을 일절 말하지 않고 , 또 그롬이코 외상은 소련의 대쿠바 원조는 「쿠바의 국방 능력에 기여하는 목적을 추궁한 것」으로서 「방위 병기의 취급에 대해 소련 전문가가 쿠바인을 훈련하고 있는 것은 결코 공격적이지 않다」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았으면 소련 정부는 결코 이러한 원조를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쿠바에 배치된 미사일은 방어용의 통상 병기이다」라고 9월에 말한 것을 되풀이하여 말했다.이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로의 회담은, 그 후 냉전 사상에 남는 가장 기묘하고 긴장한 회담이며, 차달이는사람극이기도 했다.그롬이코 외상은 회담후에 모스크바에 워싱턴의 상황은 만족이 가는 것이었다, 라고 보고하고 있다.케네디가 무엇인가를 잡고 있다고는 미진도 느끼지 않았던 것인[29].그리고 케네디는 4일 후의 성명으로, 이 날의 그롬이코 외상과의 교환을 분명히 하고, 「거짓이었다」라고 비난 한[주 20].
그롬이코 외상과의 회담 종료후, 케네디는 같은 백악관의 회의실로 돌아왔다.그리고 이 날의 밤에 급속히 해상 봉쇄가 유력한 안이 되었다.또 국무・국방・사법의 각 성은 그 법률 전문가에게 봉쇄 선언의 근거로 대해 검토 작업을 시작했다.
10월 19일(금)
요즘은 중간 선거가 11 월초로 예정되어 있어 그 응원 연설을 위해 유세가 있어, 케네디 대통령은 이 날크리브랜드, 일리노이주 스프링 필드, 그리고 시카고에 갈 예정이었다.그것들을 캔슬하면 정부내에서의 움직임이 감 즈 쉴 우려가 있었으므로, 언제나 예정 대로 가고 있었다.존슨 부통령도 같고 존슨은 결국 선거 유세로 회의에 나와 있지 않은 것이 많았다.그리고 케네디는 군부와 아침에 회의를 실시했다.
통합 참모본부의 강행안
아침, 이 통합 참모본부의 멤버라는 협의의 자리에서, 테일러 의장은 쿠바에의 군사 행동은 베를린을 위험하게 해 서구 제국으로부터 비판을 받아 미국을 고립 시킬지 모른다고 하는 대통령의 입장을 인정하면서, 시급한 군사 행동이 필요로 하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그리고 참모총장등이 공폭이나 침공을 강하게 주장해, 공군참모총장의 카치스・르메이는 봉쇄는 저자세라고 판단된다고 하여 케네디를 초조하게 했다.이 직후, 케네디는 「훌륭해 응들의 의견을 그대로 해 잘못되어 있으면, 잘못되어 있었다고 하려고 해도 아무도 살지 않게 된다」라고 보좌관의 케네스・오돈넬에 토해 버리도록(듯이) 말을 남긴[30][주 21].
봉쇄와 공폭
이 날오전의 회의(대통령은 중간 선거 유세로 결석)로는 2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져 해상 봉쇄와 공폭에 대해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를 제시하기로 했다.해상 봉쇄 팀에는 볼 국무차관, 알렉스・존슨 국무 차관보, 마크나마라, 러스크, 톰프슨 고문.공폭 팀은 로버트・케네디, 애치슨 모토쿠니 츠토무 장관, 디 론 재무 장관, 마크죠지・밴 디 보좌관이었다.오후의 회의로는 전체 회의를 실시해, 애치슨 모토쿠니 츠토무 장관, 디 론 재무 장관, 마콘 CIA 장관, 마크죠지・밴 디 보좌관이 공폭에 찬성, 라베트 모토쿠니 보초관은 봉쇄에 찬성했다.여기서 마크나마라의 공폭을 인정하면서 해상 봉쇄를 우선시켜야 하는 것이라는 의견과 로버트의 「회의에서 공폭과 결론을 내도 대통령은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견이 대로, 해상 봉쇄를 실행해 사태가 진행되지 않는 경우는 공폭 실시라고 하는 절충안이 결정된[31].
10월 20일(토)
그리고 로버트로부터의 요청을 받아 케네디 대통령은 「가벼운 감기 때문에」로서 선거 유세를 빨리 끝맺어 헬리콥터로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해상 봉쇄 결정
20일 오후 2시 30분부터의 정식적이다 회의(국가 안전 보장 회의 제 505회 회의)[주 22]로, 케네디는 우선 마콘으로부터 새로운 항공사진과 그 외의 정보를 제출시키고, 그 나중에, (1) 우선 봉쇄로부터 시작해 필요에 따라서 행동을 강하게 해 가는지, (2) 우선 공폭으로부터 시작해 최후는 침공을 각오하는지, 라고 하는 2개의 선택사항을 기간으로서 그리고 파생하는 분지의 문제가 제시되었다.그 후에 케네디는 우선 봉쇄로부터 착수 해야 한다고 하고, 공폭과 침공을 주장하는 멤버에 그렇게 말하는 작전이 그 후에 절대로 취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면 풀어 좋다고 말을 계속했다.소렌센에 의하면, 결정하기 전에 한정적인 공폭을 우선 할 수 없는 것을 거듭해 확인할 생각에서 만났지만, 결국 스스로 결론을 냈다.대통령이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결단이며, 그것을 할 수 있는 것도 대통령만이니까이라고 저서로 쓰고 있다.케네디는 이 때 해상 봉쇄의 실시를 결단했다.케네디가 그 다음에 대응수단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흐루시초프에게도 선택의 여지를 남기는 이점이 있는 것으로 봉쇄로의 힘의 과시가 소련에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게 되는 것이 결정적 수단이었다.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만약 미사일 기지의 철거에 동의 하지 않았던 경우는 의견이 나뉘었다.많은 멤버는 공폭을 지지했지만 마크나마라와 스티븐 손 유엔 대사는 반대해, 스티븐 손은 그안타나모 미군 기지의 철수까지 언급해 군사적 충돌은 피해야 하는 것이다고 주장한[32].이 봉쇄 이외로의 외교교섭으로의 카드로 해서 터키의 미사일 철거가 있었지만, 이 때에는 케네디는 다른 유럽 제국에 있어서 관심이 없는 카리브해의 오구니의 문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유럽의 안전을 희생하는 것은 아닌지, 라고 하는 의혹을 이서하는 것으로 동맹을 파괴할 수도 있는 양보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이 문제는 마지막 국면에서 중요한 과제가 된[주 23].
이 후에, 케네디는 21일(일)에 텔레비전・라디오를 통해서 국민에게 연설할 의향을 나타냈지만, 국무성으로부터 사전에 다른 동맹국이나 중남미 제국에 설명할 필요가 있어, 일요일은 아니고 월요일에 그것들을 모두 실시하기 위해, 결국 22일(월)오후 7시에 연설하는 것으로 동의 했다.여기서 국무성으로부터 있던 봉쇄(Blockade)라는 말이 호전적이고 전쟁 행위라고 해석되므로 이후는 격리(Quarantine)를 말로서 사용하는 일도 정해진[주 24].
회의가 끝나고 나서 외교 루트로 미주 기구에의 신청, 유엔에의 안보리 개최의 신청, 각국 수뇌와 서베를린 시장 앞으로 된 편지, 흐루시초프에게의 간단한 통고 문서의 작성에 걸렸다.
10월 21일(일)
문제 해결의 곤란함
21일에 케네디는 공군의 스이니 사령관과 회담했다.스이니는 솔직하게 한 번의 공격으로 쿠바의 모든 미사일을 파괴할 수 있는 보증은 없다고 전했다.공격해도 결국 남은 미사일로 반격 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미사일의 문제는 봉쇄에서도 공폭에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케네디는 이해했던 것이다[33].그리고 슈레진쟈 보좌관에게 「최종적으로는 거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이)라고 말하고 있다.이 날에 맥밀런 영국 수상에 친서를 보냈다.그 내용은 「흐루시초프의 의도가 베를린 문제에 대해 자신의 선택사항을 늘리는 것에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그러므로 카리브해와 같게 베를린에 대해서도 충분한 역할을 완수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만약 흐루시초프가 약함이나 부결단을 목표로 해 행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의 오산이라고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에서 만난[34].보다 상세한 내용은 다음날 주영 대사보다 보고가 있었지만, 이 그 밖에 다음날의 텔레비전 연설의 직후에도 맥밀런과 전화로 회담을 하고 있다.맥밀런은 유럽이 벌써 몇 년이나 소련의 핵미사일의 사정 권내에 들어간 채로라고 말해 과잉 반응을 경고해 카스트로를 기피 하는 미국에 염려를 나타냈다.케네디는 맥밀런에 이번 비밀의 움직임은 베를린에 관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케네디의 생각안에는, 이번 쿠바에의 미사일 배치는 베를린 문제에의 술책이 있으면 예 그리고 있었다.흐루시초프의 쿠바 전략과 베를린 전략은 연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케네디는, 흐루시초프가 쿠바에서 흔드는 것으로 서베를린을 한꺼번에 해결하는(요컨데 소련에 있어서는 획득한다) 일을 목표로 한 것이다고 결론을 내고 있었다.통합 참모본부의 멤버에게 「쿠바에 폭격을 더하면, 그것은 그들에게 베를린을 탈취할 구실을 주게 된다」 「우리가 쿠바에의 상황에 참는 근성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베를린을 잃었다고 나중에 서독 국민으로부터 보여질 것이다」 「서구의 사람으로부터 하면 베를린이나 자국의 안전하게는 걱정하지만, 쿠바 등 멀게 떨어져 있어 걱정하지 않았다」라고 말한[35].
10월 22일(월)
모스크바의 사전의 움직임
한편 소련에서는, 모스크바 시간의 22일 아침으로부터 움직임이 갑자기 분주하게 되었다.케네디가 밤 늦게 텔레비전 연설을 실시한다고 하는 정보가 들어가고, 소련군참모본부 정보총국(GRU)이 미군의 행동이 극히 비정상이다고 보고하기 시작해 국가 보안 위원회(KGB)는 워싱턴에서 무엇인가 중대한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라는 기색을 찰지하고 있었다.흐루시초프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를 긴급 소집했다.흐루시초프는 쿠바의 미사일이 발견된 것을 케네디가 공표하는 것이라고 확신해, 마리노후스키 국방장관은 미국이 빨리 행동을 취할 것은 없다고 했다.그러나 간부회의 멤버는 해상 봉쇄를 선언해 아무것도 해 오지 않는다고 예측하는 분보다, 늦어도 몇일 이내에 카리브해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많았다.이 시점에서 흐루시초프는 「최종적으로는 대전쟁이 될지 모른다」라고 생각한[36].그리고 쿠바 주둔 소련군총사령관 방어-에프에 내는 지시의 내용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전면적인 경계태세를 취해, 어떤 경우도 핵병기의 사용은 정부의 명시적인 사용 허가가 없다고 사용해서는 안 되는 취지를 전달하는 것이 정해졌다.그러나 포위된 가운데의 방어전에서는 전술 핵병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방어는 절망적이다는 생각이 강해져, 만약 모스크바로부터의 통신이 차단되었을 경우는 방어-에프 사령관에 허가하는 일도 일단은 결정했지만, 이 부분은 사태의 진전을 기다려라고 하는 것으로 유보되었다.마리노후스키는 정보가 감청되어 핵병기 사용의 권한을 현지 사령관에 이양하는 등과 미국이 알면, 반대로 선제 공격의 구실을 주게 되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37].
워싱턴의 움직임
미국에서는 이 날 22일의 오전부터 중요한 동맹 각국에의 통지를 했다.트르만 정권으로의 국무장관이었던 딘・애치슨을 프랑스의 샤를르・드・골의 아래에서 파견하는 것과 동시에 영국의 할로 루도・맥밀런, 서독의 콘라트・아데나우아, 캐나다의 데 펜 베이커의 각 수상의 아래에서도 특사를 파견해, NATO 주요국인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이 그 밖에 서베를린 시장 브란드, 이탈리아 수상 판파니, 인도 수상 네루-에도 친서를 보내, 또, OAS 제국에는 현지의 미국 대사로부터 정부에 사태를 알렸다.전 대통령의 후바, 트르만, 아이젠하워에 대해서는 백악관으로부터 전화로 케네디 자신이 상황 설명을 실시해, 한층 더 오후 5시부터 의회 지도자에 대해서도 자신으로 상황 설명을 실시했다.이 의회 지도자와의 회담으로는 많은 의원으로부터 반대의 소리가 들려 J・윌리엄・풀 브라이트, 리처드・러셀・주니어의 양상원의원은 해상 봉쇄에 반대해, 쿠바 폭격을 주장했다.소련의 드브르이닌 대사가 국무성에 초대된 것이 오후 6시에 거의 같은 시각에 모스크바에서 콜러 주소 대사가 크레믈린으로 향했다.
텔레비전 연설
그리고 케네디 대통령은 10월 22일 오후 7시(동부 표준시)부터 텔레비전・라디오를 통해서 미국 국민에게 쿠바에 있어서의 새로운 사태의 설명을 시작했다.
평소부터 국민 여러분에게 약속한 거리, 정부는 쿠바섬에 있어서의 소련의 군사력 증강을 엄중하게 감시해 왔습니다.과거 1주일 이내에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일련의 공격용 미사일 기지가 현재 쿠바섬에 준비되어 있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이러한 기지의 목적은 서반구에 대한 핵공격력을 제공하는 것에 외 되지 않습니다.……이것들은 1947년의 리오 조약,……국제 연합 헌장 및 소련에의 경고를 중대하고 고의로 무시한 전미주 국가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다.이러한 조치는, 소련이……쿠바에의 군비 증강의 방위적 성격의 유지, 타국에의 미사일을 배치할 필요도 소망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라는 재삼의 보증에 반하는 것이다.……미국은……의도적인 기만이나 공격적인 협박에도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38].
이 연설로, 쿠바에 소련의 공격용 미사일이 반입된 사실과 미국에 의한 쿠바 해상 봉쇄 조치를 발표해, 소련 및 쿠바 국민에 대해서 공격용 미사일은 무슨 이익도 안 된다고 강조하고, 이 안에서 이하의 7항목의 조치를 신속하게 실시할 것을 밝혔다.
- 쿠바를 위한 선박의 「해상 격리 조치」
- 쿠바에의 공중 감시
- 타국에의 쿠바로부터의 미사일 발사는 미국에의 공격으로 간주하는 것
- 쿠바 시마우치에 있는 그안타나모 기지의 증강 및 전부대에게 경계태세를 지시
- 미주 기구(OAS) 전체 회의의 소집
-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긴급 소집
- 흐루시초프에게 「세계를 괴멸의 지옥으로부터 되돌리기 위한 역사적 노력」에 참가하는 것[39]
그리고 마지막에 이 말로 묶었다.
이것이 우리가 착수한 곤란하고 위험한 노력인 것은, 몇 사람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향후 어떠한 경과를 더듬는지, 얼마나 인적 손해를 부를까 정확하게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우리의 의지와 인내를 시련에 쓸 수 있어서……우리의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항상 우리에게 감지시킬 것이다……제일 큰 위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우리가 선택한 길은 위험에 가득 차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은……우리가 세계에 지고 있을 책임에 가장 적격인 길입니다……자유의 대가는 항상 비싼, 하지만 미국은 항상 지불해 왔다.……자유를 희생한 평화롭지 않고 세계에 있어서의 평화와 자유롭다.신이 허락한 이제라면 이 목표는 달성되어일 것이다.……[40]。
이 연설은, 합중국 해외 정보국(USIA)을 통하고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중남미 제국에 방송되었다.
소련의 대응
소련에서는 케네디의 연설의 뒤에, 흐루시초프는 당분간 유예가 주어졌다고 생각해 미사일 기지의 건설을 계속하는 것을 결정했다.간부회로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병력에 대해서 낮은 레벨로의 경계태세에 들어가도록(듯이) 명했다.또 소련을 출발해 아직 시작한지 오래되지 않은 선박에 대해서는 되돌리도록(듯이) 지시해, 쿠바에 가까운 배에 대해서는 예정하고 있는 항구가 아니고 제일 가까운 항구에 전속력으로 향하도록(듯이) 명했다.이 타국내의 R-7이나 쿠바의 R-12를 발사 준비에 넣은 외, 하바나 시내를 시작해 쿠바 국내의 주요 지점에 대공포를 지어 미군의 공격에 대비했다.또 쿠바의 공업 대신을 맡고 있던 최・게바라는, 산크리스트발의 미사일 기지의 가까이의 동굴에 긴급의 지령실을 만들어, 거기서 현장의 지휘를 맡았다.
미군의 움직임
미국내의 군대를 미국 남동부에 이동시켜, 공군 전략 항공 군단은 경계 레벨을 끌어올려 180척의 해군 함정을 카리브해에 전개시켜 해상 봉쇄의 준비를 갖춘[주 25].미군 전부대의 경계태세는, 22일의 대통령 연설중에 DEFCON(Defence Condition;방위 태세) 3이 되었다.이것은 최고도의 경계 레벨인 DEFCON1과 평시의 DEFCON5의 중간에 있는 경계 레벨이다.요격기가 각지에 배치되어 벌써 미 공군 전략 항공 군단(SAC)은 경계 레벨을 올리고 있었다.그리고 전략폭격기중8 분의1은 상시 상공에 대기하는(비행중) 체제가 되었다.만일 소련이 기습해도 폭격기를 확실히 살아 남을 수 있듯이 하기 위한(해)에서 만난[41].
펜 뽐내며 자부함 스키 체포
또한 이 날에, 미국의 첩보원에게 쿠바에 있어서의 미사일 발사 사이트의 계획안을 시작으로 하는 핵미사일의 배치 상황을 전해 미국의 정찰기에 의한 핵미사일의 발견에 다대한 공헌을 하고 있던 소련군참모본부 정보총국의 대령으로, 소련군참모본부 정보 총국장관인 이완・세이로후나 육군의 병과 후사모토수의 셀게이・바렌트후와 친구였던[42]오레그・펜 뽐내며 자부함 스키가 모스크바 시내에서 체포되었다.
펜 뽐내며 자부함 스키의 체포에 의해서, 쿠바 국내의 핵미사일의 배치 상황 뿐만 아니라, 니키타・흐루시초프가 당초부터 타협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등의 크레믈린내의 동향이 미국 측에 전해지지 않게 되어 버렸지만[43], 지금까지 미국에 전해지고 있던 정보는, 미국과 소련의 사이의 교섭에 대해 많이 도움이 되었다.소련군참모본부 정보총국 대령으로 후에 망명한 빅토르・스보로후는, 「역사가는 GRU 대령 오레그・펜 뽐내며 자부함 스키의 이름을 감사의 생각과 함께 명심하게 될 것이다.그의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있는 정보에 의해서 쿠바 위기는 마지막 세계대전으로 발전했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44].
해상 봉쇄
10월 23일(화)
10월 23일에 미국의 요청을 받아 오전에 회의를 연 미주 기구(OAS)는, 쿠바의 미사일을 없애는 모든 조치를 인정하는 결의를 20 대 0(기권 3)으로 채택된[주 26].이것으로 이번 해상 봉쇄《격리》라고 하는 조치의 적법성을 강하게 할 수 있어 집단적 자위 행동이 되었다.
봉쇄 선언
이 날액스 컴의 회의는 오전 10시와 오후 6시에 열려 「쿠바에의 공격용 병기 인도해 금지해」선언의 내용을 토의해, 케네디는 전시 국제법을 적용 해석하고, 쿠바 해역 부근의 공해상으로 설정된 해상 봉쇄선을 향해서 항행하는 소련의 화물선에 대해서, 미국 해군 함정이 임검을 실시하는 것으로 명령서에 서명했다.임검에 따르지 않는 화물선에 대해서는 경고 후에 포격을 실시하는 것, 한층 더 이러한 화물선을 호위 하는 잠수함에 의한 공격이나, 미국 해군 함정이나 항공기에 대한 총격등의 적대 행위를 취해 왔을 경우는 즉석에서 격침하는 것을 아울러 지시했다.이 때에 다른 의제로서 쿠바 상공을 지대공미사일(SAM)의 사정 권내가 되는 저공 정찰비행을 허가해, 만약 만일 소련에 격추되면 그 미사일 기지를 폭격하는 일도 결정했다.이것은 4일 후에 큰 파란을 부르게 되었다.
유엔
유엔으로는 안보리 특별 회합이 오후에 열리고, 스티븐 손 유엔 대사는 소련의 미사일 배치를 비난 해, 소련의 조린 유엔 대사는 쿠바에 미사일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 이상의 질문에는 모두 거부했다.이 때는 미국측은 증거가 되는 공중 사진을 아직 공개하고 있지 않는[45][주 27].이 때에 조린 유엔 대사도 드브르이닌 주소 대사도 본국으로부터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유엔 사무총장 대행 우탄트[주 28]은 미소 양국에 서간을 보내, 자제를 요구했다.
흐루시초프의 서간
한편 소련에서는 흐루시초프가 2통의 서간을 송부했다.1개는 케네디 대통령 앞으로 「평화에의 중대한 위협이며, 해상 봉쇄는 국제법의 중대한 위반행위로 미국은 괴멸적 결과를 부를 가능성이 있다」라고 해 격렬하게 비난 했다.케네디 앞의 서간은 이 이후 쿠바 위기의 사이에 10통 이상이 닿았다.이 시대는 미소 냉전의 시대이며, 현재와 같이 미소간에 핫 라인을 마련해 수뇌끼리가 직접 대화하는 것은 할 수 없었다.핫 라인이 원래 없는 시대였다.이 쿠바 위기가 계기로 미소간에 핫 라인이 설치되어 양국의 수뇌가 처음으로 전화로의 회담이 언제라도 열리게 되었다.
이 흐루시초프로부터의 케네디 앞의 서간에 대해서, 케네디는 답장을 보내 비밀리에 쿠바에 공격용 미사일을 준 것으로 해상 「격리」를 실시한 것을 확인해 「이성을 가져 상황을 관리 불능인 상태으로서는이라면 없다」라고 요망한[46][주 29].이 후에 대통령은 로버트에게 비밀리에 드브르이닌 대사와 만나 소련의 행동은 잘못되어 있는 것을 전하게 했다.이 때 드브르이닌은 「격리는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봉쇄는 돌파한다」라고 로버트에게 대답했다고 하는[47].
이제 1개의 흐루시초프 서간은 카스트로 앞으로 「소련은 물러날 것은 없다」라고 확약했다.쿠바는 최고 레벨의 경계태세에 들어가, 동부로 라울・카스트로를, 서부에 최・게바라를 파견해 방위 준비를 나누게 했다.그리고 3일간으로 30만명 이상의 쿠바인이 무장해 최악의 사태에 대비한[48].
저명한 철학자인 바트 랜드・러셀은 케네디에게 「귀하의 행위는 무모하고 정당화의 여지가 없다」라고 전보를 보내, 흐루시초프에게는 「귀하의 인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다」라고 전보 하고 있다.
10월 24일(수)
10월 24일 오전에 모스크바에서는 당중앙위원회 간부회의 승인을 받아 흐루시초프는 케네디에게 서간을 보내 「세계핵전쟁의 수렁에 밀어 떨어뜨리는 공격적 행동」으로 「해적 행위」이며 「봉쇄를 무시한다」라고 한[49].이 날의 밤에 다시 흐루시초프로부터 서간이 도착해, 봉쇄에는 따르지 않는, 필요한 모든 수단을 취한다고 적어 있던[50].
봉쇄 개시
이 날오전 10시에 해상 봉쇄가 개시되어 미국은 육지 해군 및 해병대, 연안경비대등을 총동원한 체제를 취해, 항공기, 함선, 잠수함등에서 해상 봉쇄선부근의 경비를 강화한 것 외, 소련의 화물선이 해상 봉쇄를 돌파해 미군이 이것을 격침했을 경우, 즉석에서 전면 전쟁이 될 가능성도 있던 것으로부터, 일본이나 독일을 시작으로 하는 해외의 기지에 있어도 총동원 체제를 걸쳐 미군인 뿐만 아니라 독일군등도 휴가의 병사를 귀환시켰다.이 날의 아침 액스 컴의 회의로는 항공 정찰 사진의 분석 결과로부터 R-12, R-14 양쪽 모두의 미사일 기지 건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알았다.봉쇄선에 소련의 선박이 가까워져 있어, 회의의 분위기는 긴박한 것이었다[51].그러나 흐루시초프는 실제로는 신중했다.이러한 선박은 본국으로부터의 지시에 의해 미국 해군에 의해 통지된 해상 봉쇄선을 돌파하는 것은 하지 않고, 해상 봉쇄선앞에서 U턴 해 되돌렸다.소련의 화물선은, 만약 공해상에서의 임검을 받아 들였을 경우는 미국의 「공갈」에 굴복 하는 형태가 될 뿐만 아니라, 미국 측에 여러가지 군사 기밀이 흘러 버릴 우려가 있는 것부터 임검을 받는 것을 좋아로 하지 못하고, 또 해상 봉쇄를 돌파해 공격을 받았을 경우는 즉석에서 보복 전투가 되어, 한층 더 전면핵전쟁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부터, 회피 행동을 취했던 것이다.
미군이 실제로 첫 임검을 실시한 것은 26일(금)의 오전이다.
우탄트의 중개 제안
이 날, 우탄트 유엔 사무총장 대행은 미소 양국에, 수주일은 양국 모두 대결 자세를 느슨하게하는 조치를 취해, 소련은 쿠바에의 병기 수송을 일시정지하는 것, 미국은 쿠바에의 해상 봉쇄(격리)를 일시정지하는 것으로 해, 게다가 미사일 기지 건설도 정지되면 그 공헌은 크다고 해 중개하는 것을 제안했다.이것에 대해서 흐루시초프는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지만 미사일 기지 건설 정지는 동의 하지 않았다.케네디는 미사일 기지 건설을 중지한다면 격리를 정지하면 표명했다.이 유엔의 중개아래에서의 예비적 교섭에는 양국도 동의 한[52].이 정지 조치의 제안은 3일 후의 극적 전개로 실질적인 물건은 되지 않았지만, 흐루시초프에게 있어서는 출구에서의 구실을 얻은 것이 되었다.즉, 미국의 위법한 요구가 아니고, 유엔의 요청에 따라라고 하는 것으로 체면을 유지할 구실이었다.
10월 25일(목)
흐루시초프의 모색
흐루시초프는, 사태가 심각화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자세를 재검토하게 되어 있었다.미사일이나 다른 병기를 쿠바에 보내도 카스트로 체제의 방위 강화가 되지 않고, 반대로 지금 미국으로부터 침공되는 위험이 커졌다.여기서 미국이 향후 쿠바에의 침공을 실시하지 않는 확약을 하는 대신에 미사일 기지를 철거하는 것을 신청하는 것을 당중앙위원회 간부회에 제안했다.이것이면 당초의 아나디르 작전의 목표는 무가 되지만, 적어도 쿠바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고, 그런대로의 성과이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여, 찬성이 많이 승낙되었지만, 이 거래에 응할 뜻이 있다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은 당분간 삼가하기로 한[53].
유엔 안보리로의 미소 대결
10월 25일의 긴급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아드레이・스티븐 손 유엔 대사가 그것까지 극비로 공개하지 않았던 항공사진을 이용해 소련의 조린 유엔 대사와 대결해, 극적인 효과를 거둔[주 30].아드레이・스티븐 손은, 소련의 대표단에 미사일을 쿠바에 설치하고 있는지 물어 조린이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부정한 후, 그것을 반증 하는 결정적인 사진을 보여 이하의 교환이 되었다.
스티븐 손「통역은 필요없을 것입니다.예스나 노우로 대답해 주세요( Don't wait for the translation, answer 'yes' or 'no'! )」
조린 「 나는 미국의 법정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다」
스티븐 손「당신은 지금, 세계 여론의 법정에 처해 있습니다」
조린 「그런 검사와 같이 질문을 하셔도 대답할 수 없다」
스티븐 손 「지옥이 얼어붙을 때까지 회답을 기다려요( I am prepared to wait for my answer until Hell freezes over. )」
이 술책으로,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게 하는 것에 성공한[주 31].
10월 26일(금)
봉쇄선으로의 승선 임검
전날에 소련선의 탱커 1척을 정선 시켰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른 탱커와 함께 통과시켰다.동독의 여객선도 아무것도 없게 통과시켰다.그리고 이 날의 미명에 레바논 선적으로 파나마인의 선주의 소련이 차터 한 화물선을 정선 시켜 승선해 임검에 이르렀다.케네디는 필요하게 될 때까지 소련선의 항행을 방해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미국이 진심인 것을 어디선가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소련에 차터 된 중립국의 선박에 대해서 승선 임검하는 것을 우선시켰다.이 때는 문제 없다고 봐 통과를 허가했다.이전에 잇달아 소련선이 U턴 하고 있다라는 정보가 들어 온[주 32].
미사일 기지 건설의 움직임
매일 아침 액스 컴 회의의 모두에 CIA로부터의 보고가 있지만, 이 날미사일 기지 건설이 아직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 정보가 들어가, 중거리 미사일(MRBM)은 주말에는 실전에 사용할 수 있게 될 전망이 되었다는 마콘 장관으로부터의 설명에, 해상 봉쇄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지 않다고 하고 미사일을 어떻게 할까에 액스 컴의 논의가 돌아오고 있던[54].그 효과에 대한 의문의 소리가 증가해 25일부터 26일에 걸쳐 케네디와 다른 멤버로 소련에의 압력을 한 걸음 강화하는 방책을 심사숙고 검토하고 있었지만, 군은 공폭이나 침공을 주장해, 케네디는 저돌 맹진에 반대하고 있었다.대통령은 「쿠바로부터 미사일을 철거시키려면 , 침공하는지, 거래 할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하고 있었다.이 때,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 마음 속은 정해져 있던[55].
26일 정오에 국무성 보도관이 정례의 기자 회견에서 향후의 행동에 대해 조심성없게 「한층 더 행동」에 코멘트했기 때문에 억측을 부르고, 공폭이나 침공이 다가오고 있다라는 정보가 흘러 케네디가 격노하는 한 장면이 있었다.이 보도관은 대통령 집무실에 불려 대통령으로부터 질책 되었다.그러나 24시간 후에 케네디는 이 보도관의 잘못이 도움이 되는 효과를 낳았을지도 모르다, 라고 농담 섞여에 말하게 되었다.
흐루시초프의 서간
10월 26일의 아침, 흐루시초프에게, 미국으로부터의 정보로서 미 공군 전략 항공 군단에 사상최초째라고 경계 레벨 DEFCON2의 방위 준비 태세에 들어가도록(듯이) 명할 수 있었다는 보고를 KGB로부터 받았다.이 때에 흐루시초프는 이미 기다릴 여유는 없어졌다고 작정하고, 케네디 앞으로 서간을 보내는 것으로 했다.그것은 미사일 철거에 대한 제안이었다.
「당신으로부터 10월 25 날짜의 서간을 받았습니다.당신이 사태의 진전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 책임감도 갖추고 있다고 느꼈습니다.나는 이 점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안전을 정말로 걱정하고 있어진다면 나를 이해해 주시겠지요・・나는 지금까지 2개의 전쟁에 참가했습니다・・도달하는 곳(중) 죽음을 넓은 다하고 처음으로 전쟁은 끝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러니까 정치가로서 적격인 영지를 보이지 않겠습니까・・지금 전쟁이라고 하는 로프의 매듭을 서로 이끌어야 하는 것 가 아닙니다・・서로 강하게 이끌면 묶은 본인마저 풀지 못하고・・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씀드릴 것도 없습니다[56]」
이 서간은 송신에 시간이 걸려 이 날의 밤, 워싱턴에 닿았다.이 때까지 실무적으로 미소간에 미사일 철거 교섭이라는 것이 있었던 적은 없다.이 시대의 이 단계에서는 대략 무리한 이야기이며, 최고 지도자의 사이에서의 교환으로 결정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이 의미로 10월 26일부터 28일까지의 사이의 케네디와 흐루시초프와의 숨이 막히는 교환은 이 2명의 지도자가 냉정하게 상대의 진심을 서로 찾는 것 였다.
10월 26일에 도착한 서간은, 미사일을 쿠바에 둔 것은 쿠바를 침공으로부터 지키기 때문에, 만약 미국이 쿠바를 공격・침공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유엔의 감시하에서 철거하는 취지의 내용이었다.이 내용의 서간은 우탄트 유엔 사무총장 대행에도 조린 유엔 대사로부터 도착되고 있는[57].
그리고 하나 더 비공식인 루트로 소련 대사관원으로 KGB 담당자이기도 한 아르크산돌・파민(페크리소후)이 ABC TV의 특파원인 존・스카리에 전화를 걸어 두 명은 레스토랑에서 만나[주 33], 점심 식사를 배달시키면서, 소련이 미사일을 철거하는 대신에, 봉쇄를 해제하고, 향후 쿠바에 침공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실시하는 것에 케네디 정권은 관심이 있을까, 라고 물어 케네디 정권의 의향을 찾으면 좋겠다고 의뢰하고 있다.스카리는 국무성에 곧바로 전언 국무성은 곧바로 액스 컴에게 전했다.그리고 이 날의 밤 7시 반경에 두 명은 다시 만나, 스카리는 「정부내의 최고 수뇌 레벨」[주 34]로부터 승인을 받아 미국은 그 제안에 관심이 있다고 전하도록 들었다고 파민(페크리소후)에게 전한[58].
준전시체제 발령
26일 오후 10시에 DEFCON2[주 35]가 되어 준전시체제가 깔렸다.소련과의 전면 전쟁에 준비 미국내의 아틀라스나 타이탄, 소, 주피터라고 하는 핵탄두 탑재의 탄도 미사일을 발사 준비 태세에 두어, 소련과 인접하는 알래스카주등의 미국내의 기지 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터키, 영국 등에 주둔하는 미군 기지도 임전 태세에 두었다.
또, 핵폭탄을 탑재한 보잉 B-52 전략폭격기나 북극성 전략 미사일 원자력 잠수함이 소련 국경 근처까지 진출해, B-52는 보잉 KC-135에 의한 공중 급유를 받으면서 24시간 체제로 알래스카나 북극 부근의 소련 공역 부근을 복수기로 계속 비행해 전쟁 발발과 공격 개시에 대비했다.
이 DEFCON2의 발령을 받아 「전면핵전쟁」의 가능성을 미국안의 매스컴이 알린 것을 받아 미국 국민의 대부분이 슈퍼마켓에, 음료수나 식료등을 사 쇄도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 외,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쿠바에의 미국의 개입」을 비난 하는 일부 좌익단체의 데모를 했다.
10월 27일(토)
암흑의 토요일
10월 27일은 후에 「암흑의 토요일」이라고 불리게 되었다.10월 27일에 위기는 극한으로까지 달했다.워싱턴 D.C.의 소련 대사관에서, 대사관원이 서류를 소각하는 모습이 목격되어 개전에 대비하고 있다라는 억측이 날았다.그리고 쿠바의 기지 건설이 진행되어, 해상 봉쇄의 봉쇄선에 소련 선박 6척과 동쪽의 3척의 선박이 향하고 있다라는 정보가 들어가 있었다.
흐루시초프의 서간
이 날의 아침, 모스크바에서는 흐루시초프는 갑자기 자신이 깊어지고 있었다.봉쇄 선언으로부터 5일 지나도 미국은 공격해 오지 않는, 미사일 철거의 조건에 쿠바를 침공하지 않을 약속 이상의 양보도 미국은 생각하고 있다라는 감촉을 얻고 있던[59].당시 미국에서 저명한 평론가인 월터・리프만이 25일의 신문 칼럼에서《쿠바의 미사일》과《터키의 미사일》을 「체면을 유지하면서」거래하는 것은 어떨까라고 논하고 있었던 것이다.리프만이 케네디 정권의 의사를 대변하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흐루시초프에게는 미국의 유연한 대응을 시사하는 것과 감지한[주 36].그리고 「터키의 미군 기지의 청산까지 달성할 수 있으면 우리의 승리다」라고 말한[60].조속히 어제와는 현저하게 내용을 달리하는 서간을 준비해, 전날 송신에 시간이 걸려 늦게 된 것을 생각해 모스크바 방송으로 공표했다.
그리고 워싱턴 시간에 이 날의 오전중에 새로운 흐루시초프의 서간의 내용이 라디오를 통해서 액스 컴 회의에 들어 왔다.전날의 내용에 전혀 접하지 않고 터키에 있는 미사일의 철거를 교환 조건으로서 요구했기 때문에 있다.이것을 (들)물은 워싱턴에서는 전날 닿은 서간이 유연한 내용이었는데, 아침에 라디오로 들은 이번 서간의 내용이 강경했어로 당황하고 있던[주 37].이것은 동서 대립의 어려운 상황속에서 유럽으로는 동구의 공산권이 있고, 소련에 있어서는 동구가 중립 지대에서 직접 미국의 핵미사일이 위협은 아니었다.그러나 터키는 소련과 경계를 접해, 터키 국내의 핵미사일이 직접 소련 영내로 향해지고 있으므로, 이 시대의 소련은 터키의 미군의 미사일은 위협이었다.일전에년의 베를린 위기에서도 미국은 터키가 소련의 공격 목표가 되는 것을 항상 염두에 넣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단 1960년대에 들어와 터키에 배치하고 있는 미사일은 벌써 구형이며, 미국에서는 원자력 잠수함 등에 이동형 미사일의 배치가 진행되어, 한층 더 미소간의 미사일의 보유수로 압도적으로 미국이 우위이며[주 38], 반드시 핵미사일의 고정 기지가 절대 필요라고 하는 시대로는 더이상 없었지만, 간단하게 철거를 이해하면 소련의 압력에 굴한 것을 인상을 남겨 다른 동맹국과의 신뢰가 저하하는 것을 케네디는 염려하고 있었다.
미군기의 격추
그리고 이 날의 오후, 쿠바 상공을 정찰비행 하고 있던 미국 공군의 루돌프・앤서 손 소좌가 조종 하고 있던 록히드 U-2 정찰기가, 소련군의 지대공미사일로 격추되는 사건이 일어났다.실은 23일의 회의에서, 만약 정찰비행중에 미군기가 격추되는 사태가 생겼을 경우는 SAM(지대공미사일) 기지에 1회만 보복 공격을 더해 그 후도 상대가 공격을 더해 왔을 경우는 전면적으로 두드려 잡을 방침을 결정하고 있었다.따라서 이것에 대한 행동은 액스 컴의 거의 전원이 SAM 기지의 파괴로 일치했다.그러나 케네디는 이 결정을 되돌려, 쿠바에 대한 공격은, 베를린이나 미국의 주피터・미사일이 배치되어 있는 터키에 대한 소련의 공격을 유발해 극히 신중한 자세를 나타내, 빨리 반격은 아니고 1일 기다리는 것으로 했다.그러나 참모본부는 단번에 태도를 경화해 즉시 공폭을 주장하고, 10월 30일의 시점에서 대규모 공폭을 걸어 즉침공 부대를 보내야 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강해졌다.사태가 진행되기 시작하고 있었다.그리고 위기가 제어 불능인 단계까지 에스컬레이트해 버렸을 때의 중대한 결말을 케네디는 무서워하고 있던[61].
알래스카에서의 영공 침범
한층 더 나쁜 사건이 일어났다.알래스카를 비행중에서 만난 록히드 U-2 정찰기가 항행상의 곤란에 만나고, 소련 영내를 깊게 침입하는 사태가 생겼다.소련 전투기가 발진했지만 다행히 발포는 없고, U-2형기는 곧 침로를 되찾아 소련 영공을 나왔지만, 케네디는 미국이 핵선제 공격을 위한 목표를 조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흐루시초프에게 수취되는 것을 염려했다.이 사건은 그 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후에 흐루시초프는 전투 태세에 들어가 있을 때에 핵폭격기와 오인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사태였다, 라고 말하고 있다.
카리브해에서의 일촉즉발
또 소련의 4척의 디젤 잠수함[62]가 1962년 10월 1일 무르만스크를 출항해, 쿠바의 마리엘항으로 향하고 있어 정확히 쿠바 위기때에, 미국 해군이 설정한 해상 봉쇄선 근처에 있었다.4척 모두 핵어뢰를 탑재해, 만약 공격을 받으면 발사하도록(듯이) 구두 명령을 받고 있었다.미국 해군은 쿠바 해역으로 향하는 잠수함을 발견해, 이것에 대해서 쿠바 해역을 떠나도록(듯이) 경고해도 따르지 않는 경우, 피해가 없는 정도의 폭뢰를 투하해 경고하게 되어 있던[63].
10월 27일 낮무렵, 냉전 종결후가 되고 안 것이지만, 미국 해군은 해상 봉쇄 선상에서 경고를 무시해 쿠바 해역으로 향하는 소련의 폭스 트롯형 잠수함 B-59에 대해, 그 함이 핵병기(핵어뢰)를 탑재하고 있을지도 알지 못하고 , 폭뢰를 바다 속에 투하한[64].공격을 받은 잠수함으로는 핵어뢰의 발사가 결정될 것 같았지만, 잠수함대 정치 장교 바시리이・아르히포후의 강한 반대로 따르고 발사를 멈추어 또 부상해 교전의 의사가 없는 것을 나타내, 그 후 해상 봉쇄선으로부터 떠나는 것으로 핵전쟁은 회피되었다.
케네디의 서간 작성
이 날오후의 회의에서 「터키의 미사일로 거래하면, 쿠바의 미사일을 정리할 수 있는데, 고생하고 피를 흘려도 쿠바 침공은 잘 되지 않는다.만약 후세에 따르는 기록되면 전쟁을 해서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라고 케네디는 중얼거리고 있던[65].그러나 회의로는 터키의 미사일 철거에 반대가 많아,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가 분열할 수도 있다고 염려하는 의견도 있었다.거기서 이 날에 닿은 서간(터키의 미사일 철거)을 감히 무시해, 어제 닿은 서간에게만 회답해 그 서간의 흐루시초프 제안(쿠바를 향후 공격하지 않는다)을 받아 들이는 안이 나왔다.그리고 케네디는 전날에 도착한 유연한 내용의 흐루시초프의 서간 에 대해서만 회답할 방침을 결정해 로버트・케네디와 대통령 고문 테드・소렌센에 그 회답의 기초를 명했다.그리고 스티븐 손 유엔 대사가 퇴고 해 동일 오후 8시에 공표했다.이 회답의 내용은 3개의 조건, (1) 쿠바의 미사일 기지 건설의 중지, (2) 공격형 미사일의 철거, (3) 유엔의 사찰의 수락, 을 제시해 이 조건을 이해하면 미국은 해상 봉쇄를 풀어, 쿠바를 공격・침공하지 않는다고 확약하는 것인[66].
「 나는 당신으로부터의 10월 26 날짜의 서간을 대단히 주의 깊게 읽어, 이 문제에의 시급한 해결을 요구하는 열의가 기술되어 있던 것을 환영합니다.……서간으로 나타난 선에 따라서 해결을 향한 대처를 이 주말에 유엔 사무총장 대행아래에서 작성하도록(듯이) 지시했던[67]」
드브르이닌 대사와의 절충
이것이 송신된 후, 로버트・케네디는 대통령의 요구로 주미 소련 대사 아나톨리-・드브르이닌과 밤 8 시경에 은밀하게 만나는 것으로 한[주 39].이 드브르이닌 대사와의 자리에서 로버트는, 이 답장은 대통령 개인의 것이며, 군부로부터의 강경한 의견을 무시한 결단인 것, 미군기의 격추와 조종사의 사망은 군부를 강하게 자극해 이미 평화적인 해결을 도모하려면 시간이 없어진 것을 강조한[68].그리고 현안의 터키의 미사일 철거에 대해 「쿠바의 미사일 철거가 확인된 단계에서 반드시 터키로부터 철거한다」라고 해도 해 이 약속이 새면 책임은 모두 소련 측에 있어, 이 제안 모두가 휴지가 되면 강하게 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던[69].
백악관의 밤
10월 27일은 종일 회의에 쫓겼다.미국 비행기 격추로 공폭을 주장하는 멤버가 증가해 서간의 회답을 만들어 끝내 송신한 다음은, 오후 8시 지나 일단 휴식해 대통령은 식사가 되었다.오후 9시에 재개해 잠시 후로부터 내일 아침 10시에 회의를 여는 것으로 이 날은 끝났다.내일의 회의는 10월 30일에 공폭이나 침공을 실시할까로 열릴 예정이었다.긴장과 피로가 섞인 가운데, 회의에 출석한 누구나가 30일 화요일에는 전쟁이 일어난다고 예측하고 있었다.마크나마라는 후에 「그 히미타포토맥 강가의 석양은 아름답고, 그 때 이 석양을 살아 한번 더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하고 있는[70].
카스트로의 서간
실은 이 날의 밤, 쿠바의 카스트로는 흐루시초프에게 주저 겉껍데기 생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라고 걱정하기 시작하고 있었다.미소간의 거래도 소문되고 있고, 과감히 흐루시초프를 격려할 생각으로 서간을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주쿠바 소련 대사 아레크세이 에프를 불러 구술시킨 서간을 흐루시초프 앞으로 보냈다.이 서간은 시차의 관계로부터 모스크바의 28일 아침에 도착해 있지만, 이 서간이 카스트로의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의 효과를 일으키게 된[71].
미사일 철거
10월 28일(일)
모스크바 방송으로의 회답
이 날의 아침, 모스크바에서는 흐루시초프에게 나쁜 정보가 들어간, 전술의 미군 정찰기의 격추가 있어, 워싱턴 시간에 저녁에 케네디 대통령이 새로운 성명을 발표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는 관측이 있어, 거기에 카스트로로부터의 서간이 도착했다.카스트로에게서는 미국에의 핵공격을 요구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내용으로 이것은 흐루시초프를 화나게 했다.흐루시초프도 사태가 제어 불능이 되고 있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던[72].
모스크바 시간 12시에 간부회를 소집하고, 사태가 급속히 진전하는 가운데, 케네디로부터의 새로운 서간과 드브르이닌 주미대사로부터 외무성을 통해서 지도부 앞으로 보낼 수 있었던 보고가 도착해 있었다.흐루시초프는 이 찬스를 놓치는 일 없이 그 자리에서 답신을 구술했다.그리고 미국에 이 답신이 곧바로 닿도록(듯이) 전회와 같이 모스크바 방송을 통해서 시급하게 읽어 내리도록(듯이) 명했다.이 성명에 관한 뉴스는 곧 세계에 펼쳐졌다.그리고 마리노후스키 국방장관은 미사일 기지 해체를 방어-에프 사령관에 명한[73].
워싱턴의 아침
워싱턴 시간 10월 28일 오전 9시, 니키타・흐루시초프 수상이 모스크바 방송으로 미사일 철거의 결정을 발표해, 동시에 미국에서도 라디오로 방송되어 전해졌다.흐루시초프는 미국이 쿠바에 침공하지 않는 것과 교환에 쿠바의 미사일을 철거하는 것에 동의 한 것이다.소렌센 대통령 고문은 자택에서 아침의 라디오로 들어, 꿈일까하고 생각했다.국방총성으로는 전날의 케네디 제안이 거부되었을 경우의 대응책을 협의하기 위해서 소집되고 있었다.마크나마라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침공 일보직전의 조치」에 대해 리스트를 작성했다.그러나 참모본부의 멤버는 이 방송을 의심해, 카치스・르메이 공군 참모등은 30일에 공폭을 해야 한다 라는 문서를 대통령에 재차 제출했다.조지・앤더슨 해군 참모도 불만을 노골적으로 나타내 즉시 침공을 주장한[74][주 40].그러나 백악관은 깊은 안도감에 싸이고 있었다.
카스트로의 분노
한편 하바나에서는 카스트로는 격노하고 있었다.흐루시초프로부터 아무런 사전의 통고도 없고, 그는 이것을 항복으로 간주했다.쿠바를 공격하지 않는 침공하지 않는다고 할 약속 아래에서 자국에 반입한 미사일을 철거하는, 공수표가 될지 모르는 것으로 쿠바의 안전 보장이 머리 다섯 손가락에 거래의 재료로 된, 카스트로는 우리 귀를 의심했다.이 날흐루시초프로부터의 카스트로 앞서간이 도착해, 자제를 요구하는 것과 동시에 미국의 공격이 박두하고 있었다고 하는 카스트로의 생각을 긍정한 다음 케네디에 의한 쿠바불침공의 확약은 큰 승리이며, 이것에 의해 쿠바의 안전이 확보되었다고 하는 평가를 밀고 나가 협의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한[75].
이 서간에는, 주의 깊게 터키의 미사일의 철거와 쿠바의 미사일의 철거가 거래되었던 것에는 접하지 않았다.카스트로는 이 후, 미사일 철거 시에 여러가지 행동을 하게 되었다.후의 흐루시초프의 회상에 의하면, 미국이 거듭되는 정찰과 해상 봉쇄에 흥분한 카스트로는 흐루시초프에게 미국을 핵공격하도록(듯이) 강요했다고 여겨져 소련도, 핵전쟁도 싫어하지 않는 오구니의 젊은이 혁명가와 점차 거리를 두게 되어 갔다
후의 역사학자의 사이에서는, 당시의 소련 제일 부수상 아나스타스・미코얀으로부터의 강한 진언이 흐루시초프에게 쿠바의 핵미사일 철거를 단행하게 했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 후
돈・만톤과 데이비드・A・웨르치 공저 「쿠바 위기」의 제5장 「그 후 」의 모두에 「10월 28일에 세계는 안도했지만 쿠바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었다. ・・・쿠바 위기는 최초의 13일간의 이야기보다 훨씬 길게 계속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쨌든 흐루시초프는 케네디의 조건을 받아 들여 쿠바에 건설중이었던 미사일 기지나 미사일을 해체해, 이미 11월중에는 화물선으로 소련에 돌려 보냈다.케네디도 쿠바에의 무력 침공은 하지 않는 것을 약속, 그 앞으로 1963년 4월 터키에 있는 NATO군의 주피터・미사일의 철거를 완료했다.또한 미국은 맥도넬・에어 크레프트 RF-101등의 정찰기를, 소련의 미사일 철거 성명의 직후보다 공공연하게 쿠바 국내나 항만 상공에 비행시켜, 미사일이 완전하게 철거된지 아닌지를 조사해, 소련군도 이러한 미국 공군의 정찰기를 격추하는 것을 소련군의 현지 사령관이나 쿠바군에 대해 실시하지 않게 엄명 하고 있다.
카스트로는 협력을 거절해, 케네디와 흐루시초프의 사이에 합의한 유엔 감시하에서의 병기 철거의 사찰을 방해했다.그는 사찰 조건에 대해 합의하기 전에 스스로협의하지 않았던 것으로 분개하고 있었다.10월 30일에 우탄트 사무총장 대행과의 회담에서 현지 사찰에 대한 대처를 거절한[76].흐루시초프는 미코얀 제일 부수상을 하바나에 파견했다.미코얀이 하바나에 가기 전에 카스트로는 미국에,
- 영공 침범의 전면적 정지
- 해상 봉쇄 및 수출입 금지 조치의 해제
- 체제 전복 활동의 정지
- 해적 행위의 중지
- 그안타나모 미군 기지의 반환
의 5항목의 요구를 냈지만, 결국 미국은 무시했다.
그 뿐만 아니라, 미코얀이 도중 뉴욕의 국제연합 본부에 들렀을 때에, 스티븐 손 유엔 대사로부터 새롭게 공격적 병기로 간주해 쿠바로부터 철거를 요구하는 리스트를 건네 받고, 그 중에 경폭격기 「이류신」(II28)도 포함되어 있고, 11월 4일에 흐루시초프는 분노를 가지고 반대하는 답신을 실시하고 있다.그리고, 하바나에 체재해 카스트로의 설득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미코얀도 「소련은 미국의 새로운 요구에 응할 것은 없다」라고 카스트로에 명언하고 있던[77].그러나 결국 11월 20일에 흐루시초프가 경폭격기의 철거에 동의 해, 케네디는 그 동의를 가지고 해상 봉쇄의 종료를 선언했다.국방총성은 군의 경계태세를 풀어, 쿠바 위기는 막을 닫았다.
그리고 쿠바에 대한 미국의 개입도 감소해, 냉전 체제는 평화 공존으로 향해 가게 된다(미소 데탕트).이 사건을 교훈으로 해, 수뇌끼리가 직접 대화하기 위한 핫 라인이 양국 사이에 끌렸다.
카스트로는 그 후 소련에 2회 방문해, 흐루시초프와 2명이서 사건에 대해 냉정하게 되돌아 보고 있다.카스트로는 일단은 「스스로가 미국을 핵공격을 하도록(듯이) 소련에 강요한 것을 기억하고 있지 않다」라고 했지만, 흐루시초프는 통역의 속기록까지 가지고 넘게 하고, 카스트로에 핵공격에 관한 스스로의 과거의 발언을 인정하게 했다.
냉전 종결후와 소련 붕괴 후의 정보 공개와 같이 미국의 정보 공개에 의해 안 것은, 쿠바 위기의 시점에서, 소련은 이미 쿠바에 핵미사일(워싱턴을 사정에 두는 중거리 핵탄두 미사일 R12, R14, 상륙군을 치는 전술 단거리핵미사일 「루나」)을 9월중에 42기(핵탄두는 150발) 배치가 끝난 상태이며, 그안타나모 미군 기지에의 핵공격도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게다가 임검을 받았을 때에는 자폭하도록(듯이) 명할 수 있던 미사일(핵탄두를 떼어내고 있다) 탑재선이 봉쇄선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의한 임검은 거의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또 쿠바의 병사의 수는 미국측의 견적의 수천명이 아니고, 4만명이었다.카치스・르메이 공군참모총장을 시작으로 하는 미군은, 그 위험성을 깨닫지 않고, 「압도적인 병력」이라고 믿어 버리고 있던 군사력으로 소련을 굴복 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생각했다.
만약 흐루시초프의 양보가 없고, 카치스・르메이의 주장대로,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공폭하고 있으면, 나머지의 수십기의 핵미사일이 발사되어 세계는 제삼차 세계대전에 돌입하고 있던 가능성이 높다.
해결까지의 경위
- 이 위기가 일어나기 전까지 상대가 얼마나 불안하고 위협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두 사람 모두 완전히 몰랐다.상대가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부르는지, 확실히 생각하지 않았었다.그 결과에 두 사람 모두 예기하지 않았던 대립에 (뜻)이유도 알지 못하고 헤매어 버렸던 것이다.그러나 핵전쟁의 알 수 없는 깊은 곳을 엿보게 된 두 명은 보기 좋게 회피했다.처음은 분노를 느낀 둘이서 있었지만, 그것이 들어가면 그것까지 여하에 오해하고 있었는지 서로 눈치채게 되었다.거기서 상호 이해가 깊어지려고 하면서 사태가 제어 불능이 되지 않게 노력한 것은 영웅적이었다.케네디는 월요일에 봉쇄를 발표하면서 실제로 개시한 것은 수요일로, 임검은 금요일로, 그것도 신중한 형태로 갔다.실력 행사 하지 않고, 보복을 위해 실력에 호소할 수 밖에 선택사항이 없는 상황에 흐루시초프를 몰아넣는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어느쪽이나 국내의 강경파를 상대에게 키군요 바 안 되는 상황으로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취하지 않게 주의하고 있었다.이윽고 위기가 정점으로 달했을 때에 뜻을 결코 벼랑끝으로부터 물러났던 것이다[78].
- 실제로 흐루시초프는 「정직한 곳, 미국이 전쟁을 개시해도, 당시의 우리에게는 미국에 그에 적합한 공격을 더해질 만한 준비는 없었다.(으)로 하면, 우리는 유럽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그렇게 되면 물론, 제삼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있던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후에 회상하고 있다.그 한편, 흐루시초프로서는, 쿠바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저지한 것으로 만족했다고도 생각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케네디가 터키로부터의 핵미사일의 철거를 실시할 것을 약속했던 것이 흐루시초프를 만족시켜, 마지막 순간으로의 양국간의 합의를 결정 지었다.[주 41]
- 케네디의 측근이었던 세오도어・C・소렌센의 저서 「케네디의 길」에서는, 쿠바 위기의 미소 대결이 침정화 한 것은, 로버트・케네디 사법 장관과 아나톨리-・드브르이닌 주미대사가, 심야의 워싱턴 시내의 공원에서 은밀하게 만나 서로 이야기했을 때였던 것이 기록되고 있다.그 회담에서, 실제로 어떠한 교환이 이루어졌는가는, 구체적으로는 쓰여지지 않은[주 42].그러나, 그 앞으로 1970년에 발행된 흐루시초프의 회고록 중(안)에서, 흐루시초프는 쓰고 있다.드브르이닌의 보고는 10월 28일의 간부회에서 케네디 서간을 검토하고 있을 때에 도착해 있었다.그리고 로버트・케네디로부터의 전언의 내용도 자세하게 쓰여져 있고, 터키의 미사일 철거의 건에 대한 의도와 배경에 있는 군부와 대통령과의 확집이 흐루시초프에게도 전해진 것은 분명하다.그리고 「 나는 케네디는 아직 젊은 대통령으로 군부에 대한 제어력을 잃을 가능성을 우리는 무서워하고 있었다.그는 그것을 지금, 자신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합중국 국내에서 대통령대 군부의 긴박한 관계가 확실히 위기 상태에 이르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느껴졌다」[79]여기에서는 마지막에 케네디 서간에 합의할 수 있다라는 판단으로, 곧바로 모스크바 방송으로 전한 것을 보면, 드브르이닌의 보고는 흐루시초프의 판단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ABC 네트워크의 기자, 존・A・스카리[주 43]의 중개로, 소련 대사관원으로 KGB 담당자이기도 한 아르크산돌・파민(페크리소후)은 소련이 미사일을 철거하는 대신에, 봉쇄를 해제하고, 향후 쿠바에 침공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실시하는 것에 케네디 정권은 관심이 있을까와 타진한 이야기는, 스카리가 「정부내의 최고 수뇌 레벨」(러스크 국무장관)로부터 승인을 받아 미국은 그 제안에 관심이 있다고 전하도록 들었다고 파민(페크리소후)에게 전했지만, 이 움직임은 흐루시초프와의 직접적인 연결은 없다.
- 스카리는 자신이 위기 해결을 위한 중개역을 맡고 있을 생각이었지만, 소련측은 전혀 그처럼은 보지 않았던 것이다.게다가 이것이 소련 측에서의 제안으로 움직였지만, 파민(페크리소후)은 미국으로부터의 제안으로서 본국에 전보를 보내려고 했지만, 간부회에의 송부는 드브르이닌 대사의 허가가 필요하고 결국 대사는 허가를 주지 않았다.이런 종류의 교섭에 해당하는 권한이 대사에게 줄 수 있지 않은 것이 그 이유였다.그리고 드브르이닌 대사는 별로 로버트・케네디와의 절충이 있고, 그 보고를 크레믈린에 보냈던 것이다[80].[주 44]
위기의 교훈
마크나마라 국방장관은 후에, 쿠바 위기로부터 두 개의 교훈을 배웠다고 말했다.1개는 핵병기로 무장된 국가간의 위기 관리는 「본래적으로 위험하고 곤란하고, 또 불안정하다」.2는 판단의 잘못해, 정보의 잘못해, 오산 때문에 핵무장 한 대국간의 군사 행동의 귀결을 자신을 가지고 예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하는 것인[81].
쿠바 위기는 그 후에 있어 국제 정치에 미친 영향은 크다.제일은 소련이 핵미사일의 증강하러 달린 것으로, 미소간의 미사일 갭을 묻을 수 있도록 핵미사일의 개발 경쟁하러 달려, 이 결과, 미소간으로의 핵군비 경쟁이 되어, 1980년대에 들어와 이윽고 소련 경제의 쇠퇴를 부른[82].
제2는 미소 양국의 핵전쟁을 회피하기 위한 도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 위기를 교훈으로서 2개의 나라의 정부 수뇌 사이를 묶는 긴급 연락용의 직통 전화 핫 라인이 소련과 미국간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그리고 다음 해 8월에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이 체결되고, 이윽고 위기 관리의 방법의 확립으로부터 불핵 확산등의 공통의 이해를 공유한다라는 인식에 이르러, 데탕트의 흐름을 형성하며 간[83].
제3는 이 위기로부터 동서 양진영의 내부에서 동맹국의 배반을 부른 것으로, 중국은 소련을 명백하게 비판해 이윽고 핵실험을 실시해 핵 보유국이 되어, 프랑스는 미국의 동맹국에 대한 자세에 불신감을 가져, 드골 대통령은 독자적인 외교를 전개한다.미소간이 점차 긴밀히 되어 가지만 반대로 중국과 프랑스는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에 반대해 동서 양진영으로부터 나뉘어 갔다.이러한 움직임은 미소 양극 지배의 구조로부터 다극화의 구조로 변화하며 간[84].
닉슨 정권의 시대에 국가 안전 보장 담당 특별 보좌관 그리고 국무장관을 맡은 헨리-・키신저-는 저서 「외교」 중(안)에서, 「흐루시초프는 스스로 만들어 낸 얽힌 함정에 스스로 빠져 버렸다.그는 소련의 온건파를 보다 대립적인 노선으로 이끌어 가려면 너무 약해서 강경파에 타협하려면 입장에 불안이 있어, 시간 벌기할 수 밖에 방법은 없고, 쿠바에 미사일을 둔다고 하는 절망적인 내기에 출마했던 것이다.」로서 「냉전의 전환점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는[85].
그 외
- 케네디는, 크레맨 소의 말 「장군들에게 맡겨 고향은, 전쟁은 너무 중요하다」를 머리에 두어 외교적 해결을 목표로 해, 잘못이나 오해, 전달 미스가 예상외의 사태를 일으켜, 많은 나라가 결과의 예측도 대하기 전에 전쟁에 돌입한 제1차 세계 대전에의 이치를 그린 「8월의 포성」(바바라・탁 맨)을 읽어, 자신이 「10월의 포성을 연기할 생각은 없다」라고 했다고 하는[86].[주 45]
- 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의 흐루시초프가 쿠바로부터의 미사일 철퇴를 받아 들였는지를 붙어 여러가지 설이 있다.잘 (듣)묻는 설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워싱턴 시간 10월 28일 오전 9시에 케네디가 긴급 TV 연설을 한다고 하는 정보가 흐루시초프의 아래에서 들어간[주 46].그리고 그 연설에 앞서 케네디는 교회에서 예배를 한다고 한다.개전전의 미국 대통령은 개전을 고하기 전에 반드시 라이하이에 간다고 (듣)묻고 있던 흐루시초프는, 케네디가 개전을 결의했다고 착각 해 미사일 철퇴를 결의했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정보 기관의 사이에서는 여러가지 불확실한 정보가 난무하고 있어 소련의 아렉산들・아레크세이에후주쿠바 특명 전권대사 곳에는 「수시간 이내에 미국이 무력 침공한다고 하는 확실한 정보」가 도착되고 이것을 알아 격앙한 카스트로는, 흐루시초프에게 미국을 핵공격하도록(듯이) 강요했다.그러나, 노련한 흐루시초프는, 이 정보는 미국의 정보 기관이 소련의 정보 기관에 의도적으로 흘린 유언비어라고 해 서로 빼앗지 않았다.케네디가 교회에서 예배를 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흐루시초프가 당황해서 미사일 철퇴를 결의했다는 등이라고 하는 것은, 가십잡지의 보도에 지나지 않고, 오히려 경건한 기독교도가, 매주 일요일에 예배를 실시하는 것은 당연한 관습이다.
- 이 2년 후의 1964년 10월에, 흐루시초프는 실각하게 되지만, 흐루시초프가 경질된 중앙위원회 총회의 자리에서는, 쿠바 위기에 있어서의 미국에의 「양보」가 비난 당하게 된다.
주된 관계자
- 미국
- 존・F・케네디 대통령
- 린돈・B・존슨 부통령
- 로버트・S・마크나마라 국방장관
- 로버트・F・케네디 사법 장관
- 딘・러스크 국무장관
- 마크죠지・밴 디 대통령 특별 보좌관
- 세오도어・소렌센 대통령 특별 고문
- 맥스웰・D・테일러 통합 참모본부 의장(육군 대장)
- 존・A・마콘 CIA 장관
- 아드레이・스티븐 손 유엔 대사
- 케네스・오돈넬 대통령 특별 보좌관
- 카치스・르메이 공군참모총장
- 소련
- 쿠바
- 피델・카스트로・르스 수상・공산당 제일 서기
- 라울・카스트로 국방장관
쿠바 위기를 취급한 작품
- 영화 「황옥」
- 영화 「13 데이즈」
- 영화 「마티네/토요일의 오후는 키스로 시작된다」
- 영화 「JFK」
- 영화 「세계대전쟁」
- 영화 「X-MEN:퍼스트・제너레이션」
- 영화 「팬텀/개전 전야」(예외편)
- 애니메이션 「텔레비전 만화 쇼와 이야기」
- 게임 「메탈 기어 솔리드 3」
- 소설 「아득히 되는 별』(사토 다이보)
각주
- ^핵미사일 기지의 건설을 발견한 미국에서 만났지만, 이 시점에서는, 기지 건설이며, 핵미사일은 아직 반입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따라서 요구는 핵미사일의 철거가 아니고, 미사일 기지의 철거였다.
- ^ 10월 16일부터 10월 28일의 13일간을 쿠바 위기로 하는 해석으로 제작된 영화가 「13 Days」이다.
- ^당초의 카스트로 정부군의 인원수의 읽기가 달고, 예상 이상의 반격이었다.이것은 이 계획의 치명적인 잘못이었다.
- ^정확한 사상자수에 대해 통설은 없다.「쿠바 위기」203 P참조
- ^작전의 실패의 원인은 다수 있어, 계획 그 자체가 즈산으로, 정부군의 반격도 당초의 견적이 과소 지나는 평가였다고 말해진다.미국은 1년반 후 이 포로가 된 망명 쿠바인의 신병 교환의 300만 달러와 의료 기구 등 5000만 달러 상당한 물자를 쿠바 정부에 제공했다.개레스・젠킨스저 「존・F・케네디포트바이오그라피」184 P
- ^쿠바제 여송연 「H.업 맨」을 애호 하고 있던 케네디는, 이 발표의 직전에 피에르・Salinger 보도관에 대해서 「H.업 맨」을 시급히 대량으로 수입하도록(듯이) 명해 1,200개를 확보한 것을 확인한 후에 경제 제재의 실시를 발표했다고 전하고 있다.「The Rake」Issue 8 P. 104 2016년 3월
- ^ CIA 소속.1950년대에 필리핀과 남 베트남에서 공산군과 싸워, 특수 작전의 천재로서 알려져 있었다.
- ^흐루시초프와 카스트로는 작전을 쿠바에의 본격적인 군사 개입의 예고라고 보고 있었다.그러나 소련과 쿠바의 정보 기관은 곤혹시키는 것이 주목적으로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한 어중간한 기획이라고 보고 있었다.그리고 미국에서는 케네디 대통령은 이 몽구스 작전을 그다지 좋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실제의 곳정부내의 강경파에 대해서 카스트로 배제의 행동을 진행시키고 있으면 비추어 가는 정도의 결과를 남아 기대하지 않는 정도의 작전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후에 마크죠지・밴 디 보좌관이 몽구스 작전과는 「무위를 위로하는 마음의 약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진심으로 작전 결행을 진행시켜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정권내에 있었다.로버트・케네디도 그 혼자서 있다.「쿠바 위기」돈・만톤데이비드・A・웨르치 공저 51 P《몽구스 작전은 어느 정도 진심이었는지?》
- ^ 10월 20일에 작전은 완료할 예정이었다고 하는 설이 있어, 푸에르토르코에서 카스트로 암살을 꾀했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거기에 향하여 군사 행동을 준비했다고 하는 형적은 없다.
- ^아나디르와는 시베리아에 있는 베이링해에 흐르는 강의 명칭이다.이 작전명으로 한 것은, 만일 서쪽의 정보 기관에 새어도 카리브해는 아니고 북극해에서의 행동 작전이다고 추측시키기 위해서 이름 붙였다.또 파견되는 병사 서에 지휘관은 겨울용의 장비 일식을 휴대 하도록(듯이) 명했다.행선지가 따뜻한 남방은 아니고 추운 북방이도록(듯이) 스파이에 위장 했던 것이다.「쿠바 위기」돈・만톤데이비드・A・웨르치 공저 72 P
- ^후에 이 전혀 공표하지 않는 흐루시초프의 결정을 실수였다, 로 하는 의견은 많다.만약 1962년 8월의 시점에서 양국은 군사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고 공식으로 성명을 내 정정당당과 미사일이 전개되고 있으면, 거기에 반대하는 것은 어려웠던이어도, 몇 년이나 후에 케네디 정권의 고관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그 의미로는 소련과 쿠바가 핵미사일의 배치에 합의하고 있던 것은 국제법상 완전하게 합법이었다.완전히 비밀리에 진행했던 것이 미국에 정당한 방위의 범위내라고 하는 인식을 세계가 가진 것이 된다.단 그러면 당당히 전개하고 있으면 성공했는가는 의문이다.라틴 아메리카 제국의 격렬한 반발과 미국내로의 반 카스트로 세력이나 의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반쿠바파는 케네디를 밀어 올려 카스트로 추방의 움직임에 나왔을지도 모르다.흐루시초프는 케네디에게 이 압력에 대해서 약하다고 보고, 공표하는 것의 이익과 리스크를 생각 리스크가 크다고 계산했을지도 모르다.그러나 그 계산이 올발랐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쿠바 위기」~만약 미사일 배치를 비밀로 하고 있지 않았으면〜 82 P
- ^이 시기의 카리브해는 나쁜 상태로 허리케인의 계절이며, 정찰기를 날려 거친 날씨 중(안)에서 비행하고 진로를 잘못해 추락하거나 국내 깊이 들어가 버려 격추되는 위험성이 높아지는 일이 있어, 그것을 위한 정찰 제한이며, 정찰을 더 빨리 해 두면 발견은 더 빨랐다고, 정치 문제화되는 것을 무서워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쿠바 위기」87 P
- ^공화당 리버럴파의 상원의원.이 2년 후의 1964년 가을에 케네디 암살 사건 후에 사법 장관을 사직한 로버트・케네디가 상원의원 선거에 입후보 하고, 그 대항마가 이 케네스・키팅이었다.패배한 키팅은 정계를 은퇴했다.
- ^공화당 보수파의 중진.이 당시 벌써 1964년 대통령 선거의 케네디의 대항마라고 주목받고 있었다.남부제주가 골드 워터에 놓친다고 예상한 케네디는 다음 해 11월에 최초의 유세로 중점주로서 텍사스주를 방문해 거기서 달라스의 흉탄에 넘어졌다.고르드워타는 결국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가 되었지만, 린돈・존슨에 패퇴한다.
- ^돈・만톤데이비드・A・웨르치저 「쿠바 위기」에 의하면, 전날밤 늦게 마크죠지・밴 디에 도착되고 있었지만, 그는 대통령을 일으키지 않고 이튿날 아침에 보고하기로 했다.
- ^공군참모총장 카치스・르메이.제2차 대전으로는 일본에의 공습을 지휘해, 후에 베트남 전쟁으로 베트남에 가한 폭격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 ^여기서 나온 6개의 선택사항은 실제로는 처음부터 가다듬은 것 가 아니고, 여기까지의 수개월 사이에 보통 회화로 주고 받아지고 있던 내용의 것이었다.공폭과 해상 봉쇄도 벌써 상원의원이 입에 대어, 군당국도 비상의 사태에 대비하도록(듯이) 케네디로부터 벌써 지시받고 있었다.
- ^이 1년 후의 달라스에서의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때에, 대통령 부부가 탄 차의 곧 뒤의 차를 타고, 대통령이 총격당한 순간에 곧바로 후방으로부터 대통령이 타고 있는 차에 뛰어 올라타, 트렁크 위에 나선 잭 린 부인을 뒷좌석에 말린 것이 이 크린트・힐이었다.
- ^잭 린 부인의 이 말을 (들)물었을 때, 크린트・힐은 마음 속에서, 결코 허락해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런데도 그녀를 안아 올리고 피난소에 들어가케라바 안 되는, 그녀를 지킬 책임이 있는 이상, 다른 일은 아무래도 좋다,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크린트・힐저시라스 키요미역 「미세스・케네디」248 P
- ^이 회담의 주된 의제는 베를린 문제였다.전년 빈 회담으로의 격렬한 교환과 베를린 장벽 구축으로 긴장한 미소간의 최대의 문제는 베를린 문제이며, 전년가을에 흐루시초프가 일단은 연기한 동독과의 평화 조약 체결을 또 꺼내 왔다.다음에 쿠바 문제로는 미국의 내정 간섭이나 취항 제한등을 국제법 위반으로서 불만을 말해, 미사일에 대해서는 모스크바로부터의 「타의는 없다」라는 지령을 받고 있는 일도 그롬이코는 분명히 하고 있다.그러나 후에 세오도어・소렌센은 저서 「케네디의 길」에서 「그롬이코 외상은 시라를 잘랐다」라고 쓰고 있다.
- ^이 때에 샤프 해병대 총사령관이 다른 참모총장들을 향해 토해 버리도록(듯이) 말한 말이 백악관의 녹음기에 남아 있다.「쿠바까지 가서 미사일을 철거하는 등 하고 있을 수 있다인가.지대공미사일 기지를 찾는 등 할 수 있어 오지 않는다.어쨌든 저쪽에 가서 방해자를 축 가라앉힌다.」 「쿠바 위기」115 P
- ^츠치다 히로시저 「케네디 신화와 실상」으로는 오후 2시 30분부터이지만, 돈・만톤과 데이비드・A・웨르치 공저 「쿠바 위기」로는 이 날의 오전에 국가 안전 보장 회의를 실시했다고 하고 있다.그러나 소렌센의 「케네디의 길」에서는 대통령의 헬리콥터가 백악관의 남쪽 잔디에 착륙한 것이 오후 1시 반으로 말하고 있으므로, 당일의 오후인 것은 명확하다.
- ^실은 액스 컴 회의의 멤버는 이 때에는 몰랐던 것이지만, 케네디는 일전에 터키의 미사일 철거를 지시하고 있었다.그러나 터키 정부가 절대 반대로 장애에 부딪힌 채로 있었다.게다가 이 쿠바 위기 직전에 의회의 양원 합동 원자력 위원회는 터키와 이탈리아의 미사일 철거를 권고해 이 문제는 다시 부상하고 있었다.케네디는 위기전의 철거 지시를 숨긴 채로, 그리고 전체 밸런스를 보면서 어떻게 흘림 어디로를 붙일까를 가늠하고 있었다.
- ^일본에서는 당시나 현재도 이 쿠바 위기로는 봉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 ^케네디의 봉쇄 성명 후, 인구 600만명의 쿠바에서는 무장한 전투원이 40만명 동원되어 미국은 25만명의 동원으로 2000기의 전투기가 만일이기 때문에 배치에 붙었다.개레스・젠킨스저 「존・F・케네디 포토・바이오그라피」206 P
- ^세오도어・소렌센의 「케네디의 길」에 의하면, 케네디는 3 분의 2의 찬성표의 획득에도 염려하고 있었지만 결국 전회 일치인 것으로, 러스크와 마틴 국무 차관보의 노를 진심으로 위로했다고 한다.
- ^《또 케네디는 쿠바의 미사일 기지의 사진을 유엔용 및 보도・출판용으로 공개했다.》그렇다고 하는 언설이 있지만, 사진의 공개는 25일의 안보리 이후의 일로이다.
- ^우탄트는 전년 1961년 11월 3일에 비행기의 추락으로 사망한 하마쇼르드 사무총장의 대리로서 선출되어 하마쇼르드의 나머지의 임기를 맡은 후, 이 1개월 후의 11월 30일에 정식으로 제3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
- ^해상 봉쇄 후 최초의 수뇌끼리의 교환이 되는 케네디의 답장은 10월 25일에 흐루시초프에게 도착해 있다.
- ^이 때의 안보리에서 어렵고 소련 대사를 추궁하는 스티븐 손 유엔 대사의 모습은 후에 「아드레이・스티븐 손의 순간」이라고 하는 말이 미국 정계의 어록에 새겨져 그가 가장 각광을 받은 순간이기도 했다.개레스・젠킨스저 「존・F・케네디 포토・바이오그라피」215 P
- ^이 2일전의 교환으로 CIA가 증거 사진을 조작했다고 조린 대사는 비판하고 있었다.이것으로의 스티븐 손 대사의 역습이며, 2일전에 열심히 부인했던 것이 화근이 된 결과였다.「쿠바 위기」134 P 이 유엔 안보리로의 모양은 텔레비전 영상으로 세계에 흘러가고, 영상 기록으로서 남아 있다.
- ^재미있는 것에, 굳이 공해상에서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소련선을 우선해 정선 시킨 것은 아니고, 다른 중립국의 소련 차터선을 선택해 정선 시키고 있던 것이 된다.견해를 바꾸면, 문제가 없는 배를 세워 임검해, 문제가 있을 것 같은 배는 자주적으로 돌아오도록(듯이) 시켰다고도 말할 수 있다.소련의 입장으로부터 가면, 내용을 타국으로 보여지는 것은 굴욕이며, 선택사항은 U턴 밖에 없었던 것이 된다.
- ^테드・소렌센저 「케네디의 길」에서는, 여기서 흐루시초프의 서간의 사본을 스카리에 수교 했다고 말하고 있다.돈・만톤데이비드・A・웨르치 공저 「쿠바 위기」로는, 서간은 아니고 말로의 타진을 실시했다고 하고 있다.
- ^러스크 국무장관의 일로, 러스크는 이 이야기를 탔다.만약 진짜이면, 돌파구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정부내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줄기입니다」라고 스카리는 파민(페크리소후)에게 전했다.마이클・드브스저 「핵시계 영시 1분전」294-296 P
- ^지금까지 방위 태세 2까지 경계태세가 상승한 것은 이 때 뿐이다.2001년의 미국 동시 다발 테러 사건 당시라도 방위 태세 2는 발령되지 않았다
- ^월터・리프만은 당시 워싱턴 포스트의 유명한 칼럼니스트로, 그 칼럼은 당시의 일본의 신문에서도 소개되는 만큼에서 만났다.그리고 흐루시초프와는 일전에 연 1961년 4월 11일에 흑해 연안의 소티의 가까이의 별장을 리프만이 방문해 8시간 모두 보내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은 사이에서 만났다.또 케네디에게 가까운 존재로서 흐루시초프는 보고 있었다.단 이 때의 두 명의 화제는 대부분이 베를린 문제였다.이 때의 흐루시초프 회견기일로 후에 퓰리처어워즈를 리프만은 수상하고 있다. 흘레데릭・켄페저 「베를린 위기 1961」상권 226-229 P
- ^이것을 읽은 정권 스탭중에서는, 실은 27일분이 먼저 쓰여져 26일분이 그 후에 쓰여져 있던 것은 아닌지, 라고 추측하는 방향도 있었다.또 26일분은 어디까지나 흐루시초프의 개인적인 서간이며, 27일분은 소련 정부가 작성 한 것이 아닐까라고 말하는 견해도 있었다.
- ^짓궂은 이야기이지만 2년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미소간에 미사일 갭이 있으면 케네디는 공화당 정권을 공격하는 재료에 사용했지만, 실제는 미국이 압도적으로 우위에서 만났다.
- ^드브르이닌이라는 협의는 어디까지나 비밀리였다.대략 당시의 긴박한 상황으로는 공식의 회담은 불가능하고, 게다가 내용이 터키에 설치하고 있는 미사일의 철거에 대한 밀약의 이야기였으므로 비밀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단 장소는 이 때는 사법성이 되고 있다.「쿠바 위기」155 P
- ^그 후의 동서의 데탕트(긴장완화)로, 2국간의 교환은, 대략 대사나 특별 대표가 직접 지도자에게 전하는 것이 보통으로는 되었지만, 이 동서냉전의 시대에는 그러한 채널은 존재하지 않았다.이 흐루시초프의 미사일 철거의 발표가 자국의 라디오 방송으로 미국에 전해지는 것은 오늘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 ^또한 당시의 양국의 핵전력은, 소련의 핵폭탄 보유수 300발에 대해서 미국은 5000발로 소련은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며, 만일 양국의 전면 전쟁이라고 하는 사태가 되면, 소련은 핵병기를 이용해 미국에 있는 정도의 데미지는 주어졌지만, 패배하는 것은 결정적이었다.제2차 세계대전시에 독일을 상대에게 고전한 경험을 가지는 흐루시초프는,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어, 미국의 강한 군사력과 강한 자세에 굴복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국제 정치의 현실이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 ^소렌센의 저서로 ABC의 스칼리 기자가 로버트・케네디와 드브르이닌 대사와의 중개를 했다고 하는 언설은, 정확하지 않고, 또 장소도 시내의 공원이 아니고, 사법성의 집무실로 행해졌다고 하는 자료가 많다.소렌센의 저서에도 후술의 스칼리 기자와 KGB 파민과의 접촉에 관한 기술이 있어, 모두 내용에는 접하지 않았다.
- ^그 앞으로 1973년에 유엔 대사가 되어 1975년까지 맡았다.
- ^이 다음날의 27일의 밤에 파민(페크리소후)과 스카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흐루시초프로부터의 터키의 미사일 철거를 요구한 서간이 도착하고 나서로, 스카리는 이 때 「비열한 배반 행위다」로서 격노하고 있었다.
- ^이 책 중(안)에서 케네디의 좋아하는 일절은, 두 명의 독일의 정치가가 전쟁을 되돌아 봐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라고 하는 물음에 「아, 그것을 알고 있으면」(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다.마이클・드브스저 「핵시계 영시 1분전」396 P
- ^이 일요일아침의 오전 9시에 연설을 하는 것 자체, 통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시각이며, 이 단계에서는 언제 일어날까 예측은 용서되지 않는다고 해도, 만일 공격을 결단해도, 전시는 아니기 때문에 의표를 찌르는 기습은 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출전
- ^「베를린 위기 1961」상권 흘레데릭・견포저 317-318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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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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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만톤, 데이비드・A・웨르치 공저 타도코로 마사유키・하야시성일역 「쿠바 위기 미러・이메징의 함정」중앙공론 신사 2015년 4월 발행
- 마이클・드브스(Michael Dobbs) 저, 후세 유키코역 「핵시계 영시 1분전-쿠바 위기 13일간의 카운트다운」NHK 출판, 2010년 1월 발행
- 「NHK 스페셜 쿠바 위기・전율의 기록 10월의 악몽」NHK DVD(1992년 방송)
- 아키모토 에이이치・관영휘공저 「미국 20 세기사」도쿄대학 출판회 2003년 10월 발행
관련 항목
외부 링크
일본어 사이트
영어 사이트
- Declassified Documents, etc. - Provided by the National Security Archive.
- Transcripts and Audio of ExComm meetings - Provided by the Miller Center's Presidential Recordings Program, University of Virginia.
- Forty Years After 13 Days - Robert S. McNamara.
- Tapes of debates between JFK and his advisors during the crisis
- Cuban Missile Crisis Reunion, October 2002
- Cuban missile crisis
- The World On the Brink: John F. Kennedy and the Cuban Missile Crisis
- 14 Days in October: The Cuban Missile Crisis - a site geared toward high-school students
- Nuclear Files.org Introduction, timeline and articles regarding the Cuban Missile Crisis
- Cuba Havana Documentary Bye Bye Havana is a documentary revealing what Cubans are thinking about today
- Annotated bibliography on the Cuban Missile Crisis from the Alsos Digital Library.
This article is taken from the Japanese Wikipedia 쿠바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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