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4일 수요일

시미즈종치

시미즈종치

 
시미즈종치
Shimizu Muneharu.jpg
시대 전국시대
탄생 천문 6년(1537년)
사망 덴쇼(연호) 10년 6월 4일(1582년 6월 23일)
개명 재타로(아명)→종치
별명 쵸우자에몬
계명 타카마츠원전구닉우군청경종심 오이사
묘소 수총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키타구 타카마츠 빗추다카마쓰 성터
오카야마현소우쟈시 빗주 고쿠분지
야마구치현히카리시 청경사

주군 미무라원친모리 데루모토
씨족 전사수난바씨 시미즈씨
부모 부:시미즈 무네노리, 어머니:미상
형제 종지(월청입도), 종 오사무, 난바종충
정실이시카와 히사시지
무네노부, 경 오사무, 난바 무네사다, 여자(나카지마원행실)

시미즈종치(시미즈 가슴 붙이는, 천문 6년(1537년) -덴쇼(연호) 10년 6월 4일(1582년 6월 23일))은, 전국시대무장.빗츄타카마츠성주.통칭은 쵸우자에몬.미무라씨, 모리씨를 시중들었다.시미즈 무네노리의 아이.미무라씨의 유력 부하・이시카와 히사시지의 사위가 되어, 아이에게 무네노부, 경치, 형(오빠)에게 종지(월청입도)가 있다.

목차

생애

천문 6년(1537년), 빗츄국 카요군 시미즈 마을(현재의 오카야마현 소자시 이데)에서 태어난다(탄생 세월은 미상).아명은 재타로라고 했다.

빗츄국의 한호족의 가신의 신분에서 빗츄 시미즈성의 성주를 맡아 후에 빗추다카마쓰성의 성주가 된다.이 경위에 대해서는 제설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덴쇼(연호)의 빗츄 병란때, 미무라씨 대대로 이어옴・이시카와씨의 사위・중신의 입장에면서 모리씨에게 가담해, 타카마츠 성주의 지위를 얻었다고 여겨진다.이 빗츄 병란은 문자 그대로 빗츄 일대를 무대로 한 미무라씨 대 모리씨의 일대전에서, 미무라 우지이에신의 입장이면서 모우리분에게 사사한 사람은 그 밖에도 내려 상황 판단의 문제였다(미무라친성 등 미무라성을 자칭하는 미무라 한 집안조차, 모우리분에게 사사한 사람이 있다).또, 에이로쿠 8년(1565년)에 미무라씨 대대로 이어옴의 이시카와씨를 배반해 타카마츠성을 탈취해, 직접 모리씨에게 신종해 성주가 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당시의 모리씨는 빗츄를 미무라씨에게 맡기는 간접 지배의 체제를 뽑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설은 믿기 어렵다(빗츄분의 자료에 해당해도 증거 제시에 충분한 것은 없다).어쨌든, 모리씨의 가신이 되어 이후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부하로서 모리씨의 츄고쿠 지방의 평정에 종군 해, 충성심 두껍게 정려해, 륭경을 시작으로 하는 모리씨의 수뇌진으로부터 깊게 신뢰 받았다.

덴쇼(연호) 10년(1582년), 통일 정책을 진행시키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우시히데요시중국 공격을 실시하면, 종치는 타카마츠성에 칩거 해 항전 한다(빗추다카마쓰성의 싸움).히데요시는 항복하면 빗츄국을 준다고 하는 조건을 냈지만, 종치는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그 때문에, 쿠로다 타카시고가 회책한 물공격에 있어 성은 낙성 직전에 몰린다.이 물공격의 한중간의 6월 2일에 교토에서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노부나가가 사망해, 그 보를 안 히데요시는 종치의 생명을 조건으로 성병을 조명하는 강화를 호소했다.종치는 노부나가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그 2일 후에 형(오빠)의 월청입도나 남동생 나니와전무관, 원장의 끝최근 소식축하 들과 함께 수상의 배에 대해 할복 자살한[1].향년 46[1].

묘소는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의 청경사에 있다.

죽음의 구

시미즈종치수총
  • 속세오바 이제야말로 건널 수 있는 무사(의 노후)의 이름을 타카마츠의 이끼에 남겨

인물상

모우리가에서는 충신으로서 두꺼운 신임을 받았다.타카마츠성공방전때, 노부나가의 본대가 도달하면 이길 기회 없고 모우리가는 멸망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모우리가 수뇌부는 영토의 대폭 양도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종치의 할복 자살은 따를 수 없다고 거부하고 있었다.그 만큼 모우리가로부터 능력이나 충의가 평가되고 있던 무장이었던 일이 방문하는[2].

할복 자살에 대해

전국시대 이전의 무사도에 대하고, 할복 자살의 작법은 확립하지 않았다.할복 자살의 예는 있었지만, 단순한 자살의 수단의 하나였다.무념의 너무 실시하는 「무념배」와 같이, 내장을 끌어내는 등, 그 처참상을 피로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싸움에 대해 잡힌 높은 신분 무사도, 대체로는 목을 문 자는 것이 보통이며, 할복 자살시킨다고 하는 습관은 없었다.경우에 따라서는 책으로 하는 일도 있었다.

할복 자살의 작법이 변화하는 전환기가 된 것은, 이 종치의 할복 자살로부터에서 만났다.수상에 배를 젓기 시작해, 그리고 할복 자살 전에 사람 가리켜 춤춘 후, 맑게 물러나, 시중인에 목을 문 잘 수 있었던 종치의 작법은 훌륭하다라고 하고, 그것을 실제로 본 무사들의 칭찬을 받았다.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복수를 위해서 일각이라도 빨리 경으로 돌아오고 싶은 곳에서 만났지만, 「명장・종치의 최후를 지켜볼 때까지는」이라고 진으로부터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또, 후에 륭경을 만난 히데요시는 「종치는 무사의 귀감이었다」라고 절찬했다고 한다.

이 이후, 무사에 있어서 할복 자살은 명예 있는 죽음이라고 하는 인식이 퍼져, 또 형벌이라고 해도 할복 자살을 명하는 습관이 퍼졌다.후에 히데요시는, 토요토미히데츠구, 센리큐우등을 처벌하기에 즈음하고, 할복 자살을 명하고 있다.

각주

주석

출전

  1. ^ a b남호요시아키 「전국 무장 명언록」P71
  2. ^남호요시아키 「전국 무장 명언록」P70

참고 문헌

주제로 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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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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