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2일 토요일

아메리칸・애니메이션의 황금 시대

아메리칸・애니메이션의 황금 시대

아메리칸・애니메이션의 황금 시대(아메리칸・애니메이션의 왕간시대)는, 1928년의 음성 카트 영화의 등장에 시작해, 극장용 단편 애니메이션이 텔레비전용 애니메이션에 완만하게 패퇴를 시작한 1960년대까지 계속 된, 미국애니메이션사에 있어서의 한평생간이다.미키마우스드나르드닥크굿 요금밧그스・바니다피・닥크포 키・핏그드르피・독곰의 바니뽀빠이베티・브프웃디・딱따구리톰과 제리근시의 마그등의 유명 캐릭터가 이 기간에 만들어졌다.

목차

여명기

1927년발성영화 도입은 영화 산업을 뒤흔들어 애니메이션 산업도 또 2년 후에 같은 개혁기를 맞이했다.월트・디즈니는 사운을 건 도박에 출마하고, 완전하게 본편이라고 동조한 음성을 갖춘 단편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원제:Steamboat Willie)을 공개했다.이 작품은 미키마우스가 등장한 3번째의 작품이다.이 카트 영화는 기록적인 매상을 달성해, 대중을 매혹해, 디즈니가 그의 경력 중(안)에서 완수한 몇의 위업의 도화선을 자르게 되었다.

1930년대 전반을 통하고, 애니메이션 업계는 두 개의 파벌에 분할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월트・디즈니와 「그 이외」이다.미키마우스는 그 경이적인 인기에 의해, 찰리・채플린과 대등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은막의 스타들의 한 명으로서 맞아들일 수 있었다.디즈니가 접하는 것은 모두 황금으로 바뀌는 것 같이 보였다.디즈니 작품에 근거하는 관련 상품은, 많은 기업을 대공황에 의한 재정적인 궁지로부터 구조해 냈다.또 디즈니는 이 인기를 타 애니메이션에 한층 더 개혁을 더했다.영화에 있어서의 3 스트립・테크니컬러 방식의 발달로 디즈니가 완수한 역할은 크고(테크니컬러사는 이 방식을 완성시키기에 즈음해, 디즈니와 제휴하고 있던), 총천연색으로 상영된 최초의 애니메이션 작품은, 디즈니의 단편 영화 「꽃과 나무」(1932년, 원제:Flowers and Trees)에서 만났다.또, 디즈니는 라이프 라이크・애니메이션의 분야에서도 다른 추종을 허락하지 않았다.애니메이션 기술의 개혁자 아브・아이워크스를 포함한 디즈니의 제작 스태프들은, 이차원 화상으로 묘사되는 애니메이션에 원근감을 주는 멀티 프레인・카메라를 개발해, 「풍차 오두막의 교향곡」(원제:The old mill)로 그것을 처음으로 도입.그 결과, 아카데미상 이부문을 수상한다고 하는 성공을 얻었다.그 한편, 적중한 디즈니의 별작품 「3마리의 아이 돼지」(1933년, 원제:Three Little Pigs)로는, 각본 기술의 발전과 특징적인 캐릭터 묘사가 강조되었다.이 작품은 복수의 캐릭터의 성격을 그려 나눈 최초의 애니메이션 작품이다고 보여지고 있다.

「페릭스와 돈의 아조」(1936년)

1940년대까지 디즈니의 앞에는 무수한 경쟁 상대가 가로막았지만, 모두 디즈니・프로덕션을 그 왕좌로부터 쫓아 버리는에는 이르지 않았다.사일런트기의 디즈니의 최대의 경쟁 상대 퍼트・설리번・스튜디오는, 피릭스・더・캣을 발성영화화하려고 하는 실패에 끝난 시도의 뒤에, 그 최대의 몰락에 직면하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의 품질에 대해 디즈니에게 가장 육 박 한 경쟁 상대는, 파라마운트 영화에 의해 카트 영화를 배급하고 있던 프레이셔・스튜디오의 대표자 막스・프레이셔였다.사일런트기를 통해서 애니메이션의 개혁과 창작을 계속 실시해 온 프레이셔 형제는, 섹시한 「베티・브프」물과 슈르인 「뽀빠이」물에 의해서 적중을 날렸다.1930년대의 뽀빠이의 인기는 당시의 미키마우스의 거기에 필적해, 미키의 팬클럽을 본뜬 뽀빠이・팬클럽이 미국안으로 발생했다.그렇지만, 1930년대 초기에 최고조에 이른 영화내의 부도덕 묘사에 대한 항의 활동에 의해, 영화 산업은 1934년에 영화내의 폭력・외설 묘사를 일소 하는 헤이즈 규제(Production Code)를 채용했다.이 자주 검열 제도는 미키마우스와 같은 카트 작품에까지 적용되어 그 행동을 고치게 하는 것을 강제했다.이 변화 중(안)에서 베티・브프로부터 섹시함을 빼앗긴 프레이셔 형제는 특히 심한 타격을 받아 이 시기의 프레이셔의 작품에서는 열의와 창조성의 대부분이 없어져 버렸는지와 같이 보였다.1930년대 후반에 디즈니를 본뜨려고 하는 경박한 시도를 실시하고 있던 프레이셔는, 다수의 기억에 남지 않는 작품 밖에 남길 수 없었지만, 「뽀빠이」시리즈는 여전히 뿌리 깊은 인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원디즈니의 아니메이타휴・하맨루돌프・아이징은, 워너・브라더스의 배급하는 카트 작품을 제작하는 계약을 맺은, 신설된지 얼마 안된 레옹・슈레진가・스튜디오에 이적했다.하맨과 아이징은 여기서 그들 자신의 작품을 제작했다.이러한 작품은 단체로 보면 성공하고 있었지만, 하맨과 아이징은 디즈니와 같은 혁신적인 재능이 부족하고 있어 그들의 작품의 상당수는 「사랑스러움」이라고 하는 결점이기 때문에, 관객에게 외형의 임펙트를 주는데 실패하고 있었다.1930년대 전반의 하맨과 아이징에 의한 워너・브라더스 작품의 상당수는, 오늘로는 잊어 떠나지고 있다.이것들은 카트의 개혁을 뜻한 정통파 작품이었지만, 디즈니의 성공을 본뜨는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1935년에 슈레진가가 새롭게 고용한 애니메이션 감독에 의해, 이 스튜디오는 갑자기 활기를 늘리게 되었다.옷감・에이브리이다.에이브리는 몹시 거칠고 이색적인 작풍의 애니메이션을 이 스튜디오에 반입해, 워너는 일약 애니메이션 업계의 선두에 올라 채웠다.에이브리의 영향에 의해 워너가 새롭게 낳은 포 키・핏그, 다피・닥크, 밧그스・바니 그 외의 무수한 인기 캐릭터들의 이름은, 전세계에 퍼졌다.

하맨과 아이징은 워너・브라더스를 떨어져 메트로・골드 윈・메이야카트・스튜디오에 이적해, 보다 호대우아래에서 고예산의 카트를 제작하기 시작했다.그들이 MGM로 제작한 무수한 호화로운 애니메이션 작품은, 매혹적일 정도로 뛰어난 애니메이션 장면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그러나, 하맨과 아이징의 이야기 묘사의 스타일은 MGM 작품의 결점이기도 했다.눈에도 선명한 시각 미술의 전에, 이야기 그 자체는 자주 잊어 떠나졌다.1930년대를 통해서 MGM 스튜디오는 이 상황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그 작품은 자주 아카데미상의 후보가 되었다.

이러한 제작 회사에 가세하고, 1930년대에는 그 외의 다수의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가 번영하고 있었다.월터・란츠와 그 동료 빌딩・노 런은 뉴욕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자로서의 경력을 쌓고 있어 있었기 때문에, 월터・란츠・스튜디오의 초기 작품이 프레이셔 작품과 같이 난폭하고 슈르인 작풍을 취하고 있었던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당시의 란츠의 주요한 소지의 캐릭터는, 월트・디즈니찰스・민트로부터 손에 넣은 오즈워드・더・럭키・래빗이었다.1933년의 작품 「Confidence」로는, 토끼의 오즈워드는 합중국 대통령 프랭클린・루즈벨트를 방문한다.작중으로 루즈벨트는 그 자리로부터 걸어 나오고, 세계 대공황을 끝내기 위한 신뢰(Confidence)를 넓히면 오즈워드에 약속한다.

그 한편, 오즈워드의 이전의 소유자인 찰스・민트는, 조지・헤리 맨의 만화 「크레이지・컷」(원제:Krazy Kat)의 애니메이션화와 딕・휴마에 의해 1931년에 만들어진 소년 스크랍피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리즈의 제작에 종사하고 있었다.폴・텔리는 「이솝스・동화」(원제:Aesop's Film Fables)을 밴・뷰렌・스튜디오에 양도한 후에, 테리트라고 이름 붙인 새로운 제작 회사를 일으켰다.그렇지만 초기 텔리 작품의 오락으로서의 품질의 높이에도 불구하고, 테리트는 디즈니를 필두로 하는 주요한 경쟁 상대와 같은 성공은 거둘 수 없었다.밴・뷰렌・스튜디오의 작품도 같은 단점을 나타내고 있었다.

디즈니의 오랜 세월의 친구이며 협력자인 아브・아이워크스는, 마침내 디즈니・스튜디오를 떠난다고 하는 결단을 내려, 그 자신의 제작 회사를 1930년에 일으켰다.단기간으로 끝난 아이워크스・스튜디오에서의 활동동안에, 아이워크스는 3개의 주요한 시리즈를 낳았다.「개구리의 플립」(원제:Flip the Frog), 「윌리・호퍼」(원제:Willie Whopper), 「코미카라・카트」(원제:ComiColor Cartoon)이다.아이워크・스튜디오는 단명에 끝났지만, 아이워크스의 작품은 그 파격적인 작풍에 의해, 관객이나 비평가에게 인기가 있었다.

디즈니 첫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1937년)

1937년, 월트・디즈니가 사상최초의 총천연색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백설공주」(원제: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을 공개했다.이 장편은 2년간에 이르는 디즈니・스튜디오의 노력의 결정이었다.단편 애니메이션에 의한 수입으로는 스튜디오의 수익을 길게 유지할 수 없다고 확신한 디즈니는, 다시 사운을 건 도박에 출마했던 것이다.「백설공주」는 디즈니를 파산으로 이끌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예상했지만, 이 평가는 잘못되어 있었다고 증명되었다.「백설공주」는 전세계에서 막대한 흥행 수입을 올려 더욱은 예술 형식으로서의 애니메이션의 발전을 나타내는 도표가 되었다.

그렇지만, 디즈니는 한 물보다 긴 애니메이션 작품의 최초의 제작자는 아니었다.1936년에는, 프레이셔・스튜디오가 2 두루마리의 「뽀빠이」의 테크니컬러 단편, 「뽀빠이와 선원 신드밧드」(1936년, 원제:Popeye the Sailor Meets Sindbad the Sailor, 상영 시간 16분 ) 「뽀빠이의 알리바바 퇴치」(1937년, 원제:Popeye the Sailor Meets Ali Baba's Forty Thieves, 상영 시간 17분 ) 「뽀빠이와 아레딘의 마법의 램프」(1939년, 원제:Aladdin and His Wonderful Lamp, 상영 시간 22분 )을 공개하고 있었다.「백설공주」의 성공의 뒤에, 파라마운트는 프레이셔 형제에게 파라마운트용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하도록(듯이) 의뢰했다.프레이셔 형제에게 고품질인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었지만, 어쨌든 프레이셔 형제는 그 의뢰를 맡았다.1938년에 프레이셔・스튜디오는 뉴욕으로부터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그 본거지를 옮겨, 1939년에 애니메이션판 「걸리버 여행기」를 공개했다.이 영화는 적당히가 성공을 거두어서 계속 되어 1941년에 「밧타군 마을에 간다」(원제:Mister Bug Goes to Town)이 제작되었지만, 이 작품은 흥행적으로 대실패했다.프레이셔 형제는 그들 자신의 스튜디오로부터 해고되어 지금 그 소유권을 완전하게 잡은 파라마운트는 회사명을 페이마스・스튜디오에 개명해, 다시 본사를 뉴욕에 복귀시켰다.1950년대 후반까지의 미국에서 디즈니 이외에 유일 장편 애니메이션을 다룬 제작자라고 하는 점으로, 프레이셔 형제는 특필에 가치가 있다.

디즈니는 장편 애니메이션의 제작에 집중하게 되어, 그개인이 이전과 같은 형태로 단편을 감독하는 것은 없어졌다.디즈니의 단편 작품은 변함 없이 궁리로 가득 차 재미있고, 정묘한 애니메이션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지만, 그 각본은 시대착오로 앞을 읽을 수 있는 쓸모 있게 되기 시작했다.이 결과, 워너・브라더스타마이트・테라스에 모인 유망한 애니메이터들에게 길이 열려 신세대의 애니메이터들에 의한 사이드스프릿팅리・퍼니・카트(폭소 애니메이션)가 노도와 같이 애니메이션 업계에 밀려 들었다.이 시기에 워너의 카트 제작자등은 그 본령을 발휘해, 1940년대후릿트・후레링, 지퍼・존스, 보브・크란 펫의 작품군은 전설이 되고 있다.

애니메이션에 있어서의 음성

황금기 애니메이션의 매력의 대부분이 작품의 시각면에 거는 있던 한편, 화상에 더해진 성우의 연기와 정성스럽게 선택된 관현악곡도 그 일부에 공헌하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에 있어서의 음성의 사용은, 영화관이 라디오의 전부터 관객을 끌어 들인 것과 같게, 뛰어난 배우나 성대 모사 연예인도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끌어 들이게 되었다.멜・블랭크는, 밧그스・바니나 다피・닥크를 포함한 워너・브라더스가 많은 인기 캐릭터의 소리를 연기했다.그 외의 무대 연예나 라디오 시대의 연예인이나 성우들도, 황금기의 애니메이션 영화의 인기에 공헌했다.

또 이 시기의 애니메이션 작품에는, 스튜디오 오케스트라에 의해서 연주되는 호화로운 관현악곡이 반주로서 더해지고 있었다.워너로 「르니・테즈」의 음악을 담당한 컬・스털링이나, MGM로 「톰과 제리」나 옷감・에이브리 작품의 음악을 담당한 스콧・블래드 리는, 친밀한 클래식 음악이나 유명한 곡을 편곡해 이용했던 것 뿐만 아니라, 많은 오리지날의 애니메이션 음악을 작곡 했다.

디즈니의 「시리・교향곡」시리즈를 필두로 하는 조기의 애니메이션은, 클래식 음악의 단편으로부터 구성되어 있었다.이러한 애니메이션은 인기 캐릭터의 등장하는 작품으로부터, 자연을 테마로 한 작품까지 다양했다.

관련 항목:르니・테즈Looney Tunes)、메리・메로디즈Merrie Melodies)、시리・신포니즈Silly Symphonies)、판타지아Fantasia)、영화 음악

전시하

「백설공주」의 성공의 뒤에, 디즈니는 계속해 3작의 장편 영화에 다대한 투자를 실시해, 그러한 작품 「피노키오」(원제:Pinocchio), 「Bambi」(원제:Bambi), 「판타지아」(원제:Fantasia)은, 모두 애니메이션사를 통한 걸작으로서 칭찬되고 있다.그렇지만, 이것들 3작은 모두 「백설공주」와 대등할 정도의 흥행 성적은 남길 수 없었다.특히 「판타지아」는, 애니메이션의 주류에 추상 예술이나 클래식 음악, 엘리트적인 주제를 반입하자고 하는, 월트 자신의 역량을 넘은 시도를 감지한 문예 비평가나 관객으로부터 혹평되었다.그러나, 후세의 관객은 같은 이유에 의해, 디즈니의 예술적 야심을 평가하고 있다.이러한 계획에 의한 상대적인 실패를 보충하기 위해(때문에), 디즈니가 제작한 저예산 장편 영화 「단보」(원제:Dumbo)은, 스튜디오를 유지하는데 충분한만의 수익을 가져왔다.

1940년대에 들어오면, 2의 큰 사건이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놓여진 상황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1번째는 아메리카 합중국제2차 세계대전에의 참전이며,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포함한 모든 영화 제작 회사는, 전쟁을 향한 민의 형성과 사기 고양을 위한 영화 제작에 동원되었다.2번째는 디즈니와 그 스탭의 정을 끊은 디즈니의 애니메이터등에 의한 1941년의 스트라이크(자세한 것은 기사 디즈니 애니메이터의 스트라이크를 참조)이며, 많은 디즈니 스튜디오의 구성원이 신천지를 요구하고 스튜디오를 뒤로 했다.이 때 스튜디오를 떠난 애니메이터가 있는 사람등은, 1950년대에 애니메이션 업계에 다대한 충격을 가져온 제작 회사 UPA를 설립했다.

합중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의 인적자원의 대부분은 전쟁에 관련하는 소재나 선전을 취급한 단편 제작에 쏟아지는 일이 되었다.다수의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 회사가 사기 고양을 위해서 큰 공헌을 실시해,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도 또 그 일원이었다.프레이셔・스튜디오에서는, 수병 뽀빠이가 해군에 참가해 나치스나 일본군과 싸우기 시작했다.한편 워너・브라더스는, 종군 병사의 위안과 학습을 위해서 「프라이베트・모래 후」(모래 후 일등병, 원제:Private Snafu) 시리즈를 제작했다.

전쟁은 월트・디즈니의 제국을 뒤흔든 2개의 타격 중 2번째의 물건이었다.그러나 디즈니는 정체야말로 했지만, 그 왕좌로부터 전락할 것은 없었다.1940년대의 디즈니의 장편 영화는 「메이크・마인・뮤직(원제:Make Mine Music) 「아이구마이야기」(원제:Fun and Fancy Free) 「멜로디・타임」(원제:Melody Time) 「세 명의 기사」(원제:The Three Caballeros)등의 단편 애니메이션의 컬렉션에 의한 저예산 작품이었지만, 디즈니는 「공군력의 승리」(원제:Victory Through Air Power)과 제목 된 선전 영화로 사기 고양에 크게 공헌했다.

그 한편으로 워너・브라더스는 활기를 되찾아, 다음 15 년간에서 20년간에 높은 인기를 획득했다.이러한 기간에 후릿트・후레랑보브・크란 펫은, 그 최고의 일을 완수했다고 보여지고 있다.특히 크란 펫이 감독한 「포 키・인・워키란드」(원제:Porky in Wackyland) 「거북이가 토끼를 넘은 날」(원제:Tortoise Wins By A Hare) 「빅・스누즈」(원제:The Big Snooze) 「석탄공주토히치에 의 소인」(원제:Coal Black and de Sebben Dwarfs) 「미래의 바니」(원제:The Old Grey Hare)등의 걸작 단편에 의해서, 6분간물의 애니메이션 영화는 초현실주의에 필적하는 수준에까지 밀어 올릴 수 있었다.1946년에, 크란 펫은 스튜디오와의 언쟁이 원인으로 워너・브라더스를 퇴사해, 자신의 스튜디오 경영에 나섰다.크란 펫은 새롭게 탄생한 텔레비전 분야에 있어서의 아이 프로그램의 개척자로서 활동해, 인기 프로그램 「Time for Beany」를 제작했다.

한층 더 한편으로는, 디즈니를 그 옥좌로부터 쫓아버리려고 한 시도의 10년 후가 되고, MGM 스튜디오에 갑작스런 행운이 연달아서 춤추었다.MGM에 재적하는 애니메이터 윌리엄・한나죠셉・바 베라가, 오스카상 후보가 된 단편 「위에는 위가 있다」(원제:Puss Gets The Boot)에 의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어 한나와 바 베라는 장수 작품이 된 연속 애니메이션 「톰과 제리」의 제작에 착수했다.이 작품에 의해, 디즈니를 제외하고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와는 무연이었던 아카데미상에 열 다투어진다고 하는 영예를, MGM는 손에 넣었다.동시에, 레옹・슈레진가와의 분쟁의 끝에 워너・브라더스를 퇴사한 옷감・에이브리가 MGM에 입사해, 일찌기 워너의 애니메이터들에게 활기를 준 것과 같게, MGM의 스튜디오를 소생하게 했다.「톰과 제리」시리즈와 옷감・에이브리에 의한 몹시 거칠게 슈르인 걸작군(이러한 안에는 애니메이션에 어른용의 장르를 반입한 섹시하고 소멋부린 「이상한 붉은 두건」(원제:Red Hot Riding Hood) 시리즈가 포함된다) 사이에, 마침내 MGM는 애니메이션의 분야에 있고, 디즈니와 그리고 지금의 워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업이 되었던 것이다.

1940년대에 성공한 그 외의 제작 회사로서는, 월터・란츠・스튜디오가 있다.토끼의 오즈워드의 인기를 다 써 버린 란츠와 그의 스탭들은, 3마리의 원숭이 미니・미니-・모나 베이비페이스・마우스등이 새로운 캐릭터의 고안에 시행 착오 하고 있었다.최종적으로 이러한 캐릭터 중의 한마리가 성공했다.앤디・팬더이다.그렇지만 앤디의 성공도, 「딱다구리와 곰일가」(원제:Knock, Knock)에 등장한 5마리째의 캐릭터인 웃디・딱따구리의 획기적인 성공에는 미치지 않았다.

변화의 바람은 프레이셔・스튜디오의 항로도 바꾸었다.그러나, 그 변화는 MGM로 일어난 것과 같이, 유익하고 영감으로 가득 찬 것은 아니었다.뽀빠이를 해군으로 보내 전의 고양에 공헌한 한편, 프레이셔는 전설이 된 호화 작품 「슈퍼맨」(Superman) 시리즈의 제작에 착수해, 이 시리즈의 제일작은 오스카상 후보가 되었다.그런데 , 1940년대 초에 파라마운트 영화는 갑자기 프레이셔 형제를 대표자의 지위로부터 해임했다.현재에도 논의를 남기고 있는 움직임중에(이 때의 상황은 영화사 연구가에게도 아직도 자세하게 되어 있지 않다), 파라마운트는 프레이셔・스튜디오를 계열회사에 가세해 페이마스・스튜디오와 개명해, 프레이셔 형제가 시작한 작품을 계속했다.프레이셔 형제 경질의 효과는, 즉시 스튜디오에 나타났다.전시하의 파라마운트의 애니메이션 영화는 재미있고 인기 작품으로 계속 되었지만, 1940년대가 끝난다고 이야기의 질은 분명히 저하를 시작해 어디까지나 침체해 갔다.


스톱 모션과 특수 효과 촬영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사에 있어서의 위대한 시기에 있고, 애니메이션 영화의 제작자들은 애니메이션에게만 전념해, 타분야에는 진출하지 않았다.많은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는, 애니메이션 영화와 영화 작품을 위한 타이틀 애니메이션의 제작에 전념하고 있었다.한정되었을 경우에게만, 애니메이션이 영화 산업의 다른 측면으로 사용되는 일이 있었다.1940년대의 저예산 연속 드라마 「슈퍼맨」으로는, 슈퍼맨이 하늘을 나는 장면과 괴력을 터는 장면에서, 실사 장면중의 특수 효과로서 애니메이션이 사용되었다.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습관은 아니었다.

애니메이션의 고립은, 영화에 있어서의 특수 효과에 오로지 사용된 자매 산업인 스톱 모션・애니메이션의 탄생에 기인한다.양자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스톱 모션・애니메이션과 손으로 그리는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는 두 개의 장르는 할리우드의 황금 시대를 통해서, 분별없게 그 최성기를 동시에 맞이했던 적이 없었다.스톱 모션・애니메이션의 이름은 1933년의 히트 영화 「킹・콩」으로 일약 알려지게 되었다.이 작품에 대해 스톱 모션・애니메이터의 위리스・오브라이언은, 그 후의 50년간에 사용되게 된 스톱 모션의 기술을 확립했다.「킹・콩」의 성공에 의해 많은 초기의 특수 촬영 영화가 제작되어 그 안의 일작으로 오브라이언이 애니메이션을 다룬 「원인 죠・영」은, 레이・하리하우젠을 포함한 많은 스톱 모션・애니메이터의 출발점이 되었다.1950년대에 하리하우젠은 그 자신의 작품을 제작했다.

조지・팔은 파라마운트 영화용으로 제작한 파페트시리즈등의, 극장용 스톱 모션・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하고 있던 스톱 모션 전문의 애니메이터이며, 그 작품의 몇개인가는 레이・하리하우젠에 의해 아니메이트 되고 있다.펄은 몇개의 특수 촬영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하고 있다.

스톱 모션・애니메이션의 인기는 1950년대에 최고조에 이르렀다.SF영화의 폭발적인 인기에 의해 특수 촬영의 분야는 급성장해, 조지・팔은 몇의 인기를 얻은 특수 촬영 영화로 감독을 맡았다.한편 레이・하리하우젠은, 「비확인 비행물체의 총칭 지구를 습격스」 「신밧드 7회째의 항해」 「원자 괴수현 깬다」등의 작품에 대해 대중을 야 나무 붙여 영화에 있어서의 「리얼」인 특수 촬영의 발전을 활기 붙였다.이러한 특수 촬영 영화는 셀 애니메이션과 같은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 두 개의 미디어가 동시에 나타나는 예는 적었다.스톱 모션・애니메이션은, 「2001년 우주의 여행」으로의 더글라스・트란불에 의한 실사라고 봐 혼동할 뿐의 특수 촬영으로, 그 정점을 다했다.

할리우드의 특수 촬영은 대체로 셀 애니메이션 계속 (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발전해 왔지만, 몇개의 특기 해야 할 애니메이션 장면이 이 시기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에 포함되어 있었다.이러한 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영화 「닻을 올려」에 두고, 배우 진・케리가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진 「톰과 제리」의 제리와 댄스를 추는 장면이다.그러나, 이러한 특수한 용도 이외에도, 셀 애니메이션은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해 자막이나 타이틀 화면에서 사용되었다.「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잡혀」 「사이코」등의 알프레드・히치콕의 영화에 있어서의 서울・버스에 의한 전설적인 타이틀・애니메이션은, 많은 모방자를 낳았다.이와 같이 영화 「핑크・판사」시리즈의 오프닝・애니메이션은, 동명의 캐릭터에 근거한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낳을 정도의 인기를 얻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및 황금 시대의 마지막

그렇지만 주요한 스튜디오의 활동은, 모두 타분야에서의 발전에는 맹목인 채에서 만났다.스트라이크의 시기에 옛 터전을 떠난 전 디즈니 애니메이터 존・허브 리는, 보다 새롭고, 보다 추상적으로, 보다 실험적인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는 그 자신의 비전을 추구하기 위한 작은 제작 회사를 설립했다.허브 리와 그 동료들은, 유나이티드・프로덕션・오브・미국, 혹은 UPA로 불리는 새로운 제작 회사의 기업에 착수했다.UPA는 리미티드・애니메이션으로서 알려지게 된 스타일을, 표현 수법의 일환으로서 사용했다.새롭게 일으켜진 스튜디오에서의 최초의 단편이, 프랭클린・D・루즈 벨트 재선 캠페인을 위해서 만들어진 「헬・겨이삭띠・포・erection」(원제:Hell-Bent for Election)이다.이 작품은 워너의 베테랑 감독인 지퍼・존스가 감독했다.이 신작은 성공했지만, 허브 리와 동료들이 기대한 것 같은 획기적인 작품은 아니었다.그들의 의도는 2 작목의 단편인 바비・캐논의 「브라자훗드・오브・맨」(원제:Brotherhood of Man)까지는 완수할 수 없었다.이 작품으로부터, UPA 작품은 다른 제작 회사의 작품에 비해 야심적인 작풍을 취하기 시작했다.캐논의 작품은, 당시는 경시되고 있던 인종적 관용이라고 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UPA는 콜롬비아 영화의 산하에 침착해, 최초의 2년간에 2개의 아카데미상에의 노미네이트를 획득했다.이것을 시작으로, UPA의 애니메이터등은 비슷비슷함의 작품이 서로 북적거리는 애니메이션 업계안에 있고, 한 단계 뛰어나는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UPA의 「근시의 마그」(원제:Mr. Magoo) 시리즈의 성공은 모든 제작 회사의 주목을 끌어당겨 UPA의 단편 「제랄드・마크보인・보인」(원제:Gerald McBoing-Boing)이 오스카상을 수상하면, 할리우드는 갑자기 들끓었다.UPA의 스타일은 지금까지의 영화관의 스크린상에서 볼 수 있던 애니메이션과 모두 달라 구태 의연한 고양이와 쥐의 술래잡기에 이의를 나타낸 UPA에 관객은 반응했다.

1953년까지, UPA는 다대한 영향을 애니메이션 산업에게 주고 있었다.할리우드의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등은, 호화현난으로 사실적인 1940년대의 애니메이션으로부터, 보다 단순 소박하고 추상적인 애니메이션으로 서서히 이행 하고 갔다.이 시기에 있어서는, 디즈니로조차 UPA의 모방을 시도하고 있었다.특히 1953년의 「프카돈 교향악」(원제:Toot, Whistle, Plunk and Boom)은, 이 새롭게 일으켜진 기업의 발자국을 더듬으려고 하는 디즈니의 실험작이었다.

UPA에 의한 애니메이션의 혁명 이전에, 1950년대의 초기에 워너・브라더스메트로・골드 윈・메이야카트스타지오의 양 회사는 그 창조성의 정점으로 도달하고 있었다.특히 워너의 지퍼・존스의 작품이 도달한 높은 곳은, 애니메이션사를 통해서 전대미문의 것이었다.다수의 범작(이것들은 때에는 잔혹하고 폭력적이었다)을 남긴 한편, 1950년대의 연작 「로드 러너」(원제:Road Runner)이나 밧그스・바니다피・닥크물, 「카모로 된 카모」(원제:Duck Amuck) 「오페라좌의 사냥꾼」(원제:What's Opera, Doc?) 「세비야의 래빗 이발사」(1950년, 원제:Rabbit of Seville) 「원 장 고양이를 기른다」(원제:Feed the Kitty)등의 존스 작품의 몇인가는, 애니메이션사에 남는 작품이 되었다.「카모로 된 카모」와 「오페라좌의 사냥꾼」은 아메리카 합중국 정부보다 「문화적으로 중요한 작품」이라고 인정되고 있어 미국 국립 필름 등록부에 등록되어 있다.

1950년대의 메트로・골드 윈・메이어의 애니메이션도 또, 1940년대에 이어 아카데미상을 계속 수상했다.「톰과 제리」는 MGM에 더욱 2살의 오스카상을 가져와, 옷감・에이브리의 전설적인 일은 스튜디오가 애니메이션 부문을 폐쇄하는 4년전의 1953년까지 계속 되었다.1957년에 MGM가 애니메이션 부문을 폐쇄한 것은, 그 높은 제작비이기 때문에에서 만났다.지금 그 제작을 계속하려면 , 애니메이션은 고가로 너무 되어서.

그렇지만, 파라마운트 영화는 타사만큼 능숙하지는 가지 않았다.제2차 세계대전 종료후의 1940년대 후반에 있고, 페이마스・스튜디오의 작품의 품질은 눈에 보여서 저하해서 가 그 작품은 상투적인 재료와 폭력 표현에 의지하기 시작했다.1950년대에는 「귀신의 카스 파」(원제:Casper the Friendly Ghost)이나 「헬만과 캣 nucleus initialization program(영문판)」등의 신작이 만들어졌지만, 그 한편으로 「뽀빠이」와 같은 작품으로조차, 그 독창성이나 독자성의 대부분을 잃고 있었다.파라마운트 작품은 여백을 메우는기사 영화의 레벨에까지 침체해, 1960년대가 시작되는 무렵에는 거의 잊어 떠나지고 있었다.

디즈니에 의한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는 1950년대를 통해서 대중의 계속 인기를 끌었다.1940년대 후반의 본래는 단편인 시리즈를 써 대면시킨 장편 시리즈 제작의 뒤에, 디즈니・스튜디오는 가신이나 아동문학의 애니메이션화라고 하는 성공한 방식에 회귀했다.1950년대의 디즈니는 「멍멍 이야기」(원제:Lady and the Tramp) 「피터・빵」(원제:Peter Pan) 「101마리 왕」(원제:One Hundred and One Dalmatians) 「신데렐라」(원제:Cinderella) 「잠자는 숲속의 미녀」(원제:Sleeping Beauty)등의 다수의 고전이 된 영화를 제작했지만, 「판타지아」나 「피노키오」와 같이 매혹적인 리얼리즘으로 가득 찬 작품을 다시 제작하는 것은, 이미 디즈니로조차도 불가능했다.

1960년대까지 애니메이션 산업을 이행을 시작하고 있었다.텔레비전이라고 하는 미디어는 더욱 더 그 기세를 더하고 있었다.이 변화의 선구가 된 것은, 「톰과 제리」를 제작한 윌리엄・한나죠셉・바 베라의 두 명조였다.새롭게 태어난 한나・바 베라・스튜디오는, UPA가 표현 수법으로서 개척한 리미티드・애니메이션의 수법을 이용했다.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수법은 오로지 예산 삭감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텔레비전이 대중적인 인기를 획득으로 하는 것에 따라, 영화관의 관객수는 줄어 들기 시작했다.황금 시대는 마지막을 고해 아메리칸・애니메이션의 상황은 영구히 바뀌어 버렸다.

황금기의 주요한 단편 작품

일부미(뜻)이유

월트・디즈니・프로다크션즈 작품

워너・브라더스 작품

  • 「대중탕」(1930년, 원제 : Sinkin' in the bustub) 감독:휴・하맨루돌프・아이징(Hugh Harman and Rudolf Ising)
  • 「금광 발견」(1935년, 원제:Gold Diggers of '49) 감독:옷감・에이브리(Tex Avery)
  • "Porky in Wackyland"(1938년) 감독:보브・크란 펫(Bob Clampett)
  • "You Ought to Be in Pictures"(1940년) 감독:후릿트・후레렝(Friz Freleng)
  • 「야생의 바니」(1940년, 원제:A Wild Hare) 감독:옷감・에이브리
  • 「도버 보이즈」(1942년, 원제 : The Dover Boys) 감독:지퍼・존스(Chuck Jones)
  • "The Ducktators"(1942년) 감독:놈・막케이브(Norm McCabe)
  • 「책방은 대소동」(1946년, 원제:Book Revue) 감독:보브・크란 펫
  • 「방안에서 대배틀」(1947년, 원제 :Twwetie Pie) 감독:후릿트・후레렝
  • 「세비야의 래빗 이발사」(1950년, 원제:Rabbit of Seville) 감독:지퍼・존스
  • 표적은 누구다」(1951년, 원제:Rabbit Fire) 감독:지퍼・존스
  • 다피・워즈」(1953년, 원제:Duck Dodgers in the 24□th Century) 감독:지퍼・존스
  • 「카모로 된 카모」(1953년, 원제:Duck Amuck) 감독:지퍼・존스
  • 「매혹의 개구리」(1955년, 원제:One Froggy Evening) 감독:지퍼・존스
  • 「오페라좌의 사냥꾼」(1957년, 원제:What's Opera Doc?) 감독:지퍼・존스

프레이셔・스튜디오 및 페이마스・스튜디오 작품

  • "The Sidewalks of New York"(1929년) 감독:데이브・프레이셔(Dave Fleischer)
  • "Swing You Sinners!"(1930년) 감독:데이브・프레이셔
  • 「베티의 가출」(1932년, 원제:Minnie the Moocher) 감독:데이브・프레이셔
  • 「선원 뽀빠이」(1933년, 원제:Popeye the Sailor with Betty Boop) 감독:데이브・프레이셔
  • 「베티의 백설공주」(1933년, 원제:Snow White) 감독:데이브・프레이셔
  • 「선원 신드밧드」(1936년, 원제:Popeye the Sailor Meets Sinbad the Sailor) 감독:데이브・프레이셔
  • 슈퍼맨」(1941년, 원제:Superman) 감독:데이브・프레이셔
  • "The Raven"(1942년) 감독:데이브・프레이셔
  • "Cartoons Ain't Human"(1943년) 감독:시모아・니텔(Seymour Kneitel)(페이마스・스튜디오작품)

MGM 작품

월터・란츠・스튜디오 작품

  • Race Riot, (1929), 월터・란츠
  • Confidence, (1933), 빌딩・노 런
  • 「딱다구리와 곰일가」(Knock Knock) (1940), 월터・란츠
  • Barber of Seville (1944),James Culhane
  • Apple Andy (1946), 딕・런 데(Dick Lundy)
  • Crazy Mixed-Up Pup (1955), 옷감・에이브리
  • The Legend of Rockabye Point (1955), 옷감・에이브리

찰스・민트・스튜디오 및 스크린・제무즈 작품

  • Lambs Will Gambol (1930), 벤・해리슨(Ben Harrison)과 Manny Gould
  • Yelp Wanted (1931), Dick Huemer
  • The Little Match Girl (1937), Sid Marcus와 Art Davis
  • The Fox and the Grapes (1941), 프랭크・타슈린(Frank Tashlin)
  • Song of Victory (1942), Bob Wickersham
  • Professor Small and Mister Tall (1943), 존・허브 리(John Hubley)와 Paul Sommers
  • Flora (1948), Alex Lovy

UPA 작품

  • Hell-Bent for Election (1944), 지퍼・존스
  • Brotherhood of Man (1946), 보브・캐논(Bob Cannon)
  • Ragtime Bear (1949), 존・허브 리
  • Gerald McBoing Boing (1951), 보브・캐논
  • Rooty Toot Toot (1952), 존・허브 리
  • The Tell-Tale Heart (1953), Art Babbitt와 Ted Parmelee
  • When Magoo Flew (1955), Pete Burness

그 외

참고서적

  • 모리 타쿠야 「정본 애니메이션의 개그 세계」어스펙트, 2009년, ISBN 4757215371
  • Barrier, Michael (1999): Hollywood Cartoons. Oxford University Press.
  • Maltin, Leonard (1987): Of Mice and Magic: A History of American Animated Cartoons. Penguin Books.
    • 레나드・말틴저, 곤도오 슌사 외 (뜻)이유 「마우스・앤드・매직--미국 애니메이션 전사〈상〉」락공사, 2010년, ISBN 4903063429
  • Solomon, Charles (1994): The History of Animation: Enchanted Drawings. Outlet Books Company.

외부 링크

  • 미국:애니메이션서쪽에-쟌 널 벨트・벤잣트저 「카트:애니메이션 100년사」의 제8장.1930년대의 아메리칸・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상세하게 말하고 있다.한층 더 링크를 더듬어40-60연대의 역사를 읽어 이을 수도 있다.
  • 레나드・마르틴저, 요시나가 미츠오, 스기우라방일역 「MGM」-황금기 아메리칸・애니메이션의 일익을 담당한 MGM 동영상 부문의 역사를 말한 문장.「톰과 제리」 및 옷감・에이브리 감독의 작품군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이 페이지를 포함한 사이트 「SCM 작품의 방」은, MGM 만화 영화에 관한 귀중한 정보원이다.
  • SCM 작품의 방:참고 문헌-연구서 「톰과 제리의 본(안)중 자주(잘) 싸움 하는거야」[증보 개정판](1995년)의 참고 문헌.그대로 황금기 아메리칸・애니메이션 연구의 참고 문헌 리스트로서 사용할 수 있다.
  • Cartoon Music! - 황금기 아메리칸・애니메이션의 음악이 가지는 매력을 소개하는 사이트.
  • GoldenAgeCartoons.com(영어)
  • Cartoon Research(영어)
  • Big Cartoon DataBase -황금기 아메리칸・애니메이션의 데이터 베이스(영어)
  • How Animated Cartoons Are Made in the Studios - ASIFA-Hollywood(국제 애니메이션 필름 협회 할리우드 지부) 공식 브로그의 기사(영어).Nat Falk, How To Make Animated Cartoons (1941)보다, 애니메이션의 제작 과정을 풍부한 도판과 함께 해설한 장을 통째로 읽을 수 있다.그 밖에도 이 사이트에는, 황금기 아메리칸・애니메이션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다수 업 로드되고 있다.

This article is taken from the Japanese Wikipedia 아메리칸・애니메이션의 황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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