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토모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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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 | 전국시대 |
| 탄생 | 불명 |
| 사망 | 겐키 원년 8월 20일(1570년 9월 19일) |
| 개명 | 키쿠치진성→오오토모친정 |
| 별명 | 하치로, 친수 |
| 계명 | 무암현감거사 |
| 묘소 | 사가현 사가시 타이와쵸 이마야마 아카사카산 |
| 씨족 | 등성수향류오오토모씨→키쿠치씨 |
| 부모 | 부:키쿠치 요시타케 또는 오오토모 요시아키 |
| 형제 | 친정 (일설에는) 고귀감, 노리나오, 진약(여자) (또는 일설에는) 의진(종린), 의장, 시오이치환, 일조방기실, 코노 토루선실 |
생애
오오토모 씨한테서 히고국의 유명한 민족 키쿠치씨에게 양자에게 들어온 키쿠치 요시타케의 아이, 또는 그 형(오빠)의 오오토모 요시아키의 아이와도 말해, 그 정확한 계보는 불명하다.「카바이케 이야기」로는, 종린의 숙부 키쿠치 왼쪽 무관 요시타케의 적자, 키쿠치 하치로진성을 대장으로서 이마야마에 진 스와 기술되고 있지만, 키쿠치씨・오오토모씨 어느 계도에도 이름이 나타나지 않고, 요시타케의 적남은 귀국시에 함께 모살된 고귀감으로 한다는 것이 일반적이고, 상속자 분쟁의 와중이기도 하고, 누구의 아이로, 어떠한 경위로 오오토모씨로 돌아왔을지도 잘 모른다.이 때문에, 의감의 자・의진(종린)의 사촌동생과도 남동생과도 칭해진다.
겐키 원년(1570년) 3월, 종린은 히젠국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류조지 다카노부의 토벌을 목론 봐, 총대장을 명령받은 친정은 6만의 대군을 인솔해 히젠좌가성에의 침공을 개시했다.용조사세는 5천 정도의 병력이기 때문에 칩거 해, 친정은 압도적인 병력을 배경으로 해 좌가성을 포위해 공격을 걸었지만, 지들로서 공략은 진행되지 않았다.치쿠고노쿠니의 코우라산에까지 진출하고 있던 종린은, 승보가 닿지 않는 것에 화가 치밀어, 원군을 보내 친정에 총공격의 명령을 내렸다.
친정은, 8월 20일로서 좌가성에 총공격을 개시하는 것을 결정했지만, 총공격 개시 예정일의 전야, 이마야마의 본진으로 승리의 사전 축하로서 주연을 열어, 군의 통솔이 느슨해지고 있었다.이 상황을 안 용조사씨의 가신・나베시마 노부키( 후의 곧 무)는, 적본진에 대해서 야습을 걸치는 것을 타카노부에 진언.타카노부는 이것에 부정적이었지만, 타카노부의 어머니 경형니가 질타 했기 때문에 이것을 용인했다.용조지케의 기습 부대는 성을 빠져 나가, 이마야마의 적본진의 배후에 가까워져, 8월 20일 이른 아침, 이마야마의 오오토모군본진은 나베시마 곧 무 인솔하는 기습 부대에 습격당해 총대장 오오토모친정은, 이 난전의 한중간에 6명에 걸려 찔러 덮을 수 있고, 타카노부의 무장・나리마츠 노부카츠에 죽여졌다고 여겨지는[1].나베시마 노부키는, 이 승리를 기념하고, 나베시마가의 가문을 검하나비시로부터 오오토모가의 행엽으로 바꾼[2].이 패배에 의해서 오오토모군은 전의를 상실해 좌가성주변으로부터 철퇴했다.이 싸움으로의 오오토모군의 사망자는 2천명 이상에 이르렀다고 한다(이마야마의 싸움).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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