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0일 토요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Matsudaira Sadanobu 2.jpg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자화상(부분)
진국수쿠니카미사 소장 텐메이 7년(1787년) 6월[1]
시대 에도시대 중기-후기
탄생 호레키 8년 12월 27일(1759년 1월 25일)
사망 분세 12년 5월 13일(1829년 6월 14일)
개명 토쿠가와 켄환(아명)→마쓰다이라 사다노부
별명 락옹, 풍류노인, 풍월노인(호),
시라카와 라쿠오, 황혼의 소장
시호 수국공
신호 수국 신의 이름 밑에 붙이는 칭호
계명 수국원전숭련사천예호토쿠락옹오이사
묘소 도쿄도 고우토우구 시라카와레이간절
관직의 등급 종고이하, 상총개, 월중수, 종4위하,
시종, 사콘위권 소장
쇼우조우위[2]

막부 에도 막부 노중 상석・장군보좌
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
무츠시라카와번
씨족 논안토쿠천가히사마츠 마쓰다이라씨[3]
부모 부:도쿠가와 무네타케, 어머니:향전원
양모:근위 미치코(보련원)
야부:마츠다이라정방

형제 코지로우철지조우국을국
치찰, 정국, 사다노부
정실:마츠다이라정방의 딸(아가씨)
후처:하야부사공주(카토 야스시무의 딸(아가씨))
측실:정순원

정영, 사나다행관,
복희(마츠다이라 정칙 정실),
청창원(스와 충실하고 인정이 많음 정실),
보수원(카토 야스시제정실),
수희(마키노 타다시진정실→나이토신돈후처),
진(마츠우라희정실), 딸(아가씨)(마츠다이라 아키라건정실)
양자:양녀(카토 야스시 문안 드림의 딸(아가씨), 마츠다이라신지정실),
양녀(사나다행관의 딸(아가씨), 쿠츠키강조후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마쓰다이등다 노부)는, 에도시대 중기의 영주, 노중.무츠 시라카와번 제 3대 지방 영주.정밧줄계 히사마츠 마츠다이라가 제 9대 당주.에도 막부 제 8 대장군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손자에 해당된다.1787년부터 1793년까지 관정의 개혁을 실시했다.

목차

생애

출생

호레키 8년 12월 27일(단순한 환산으로 호레키 8년은 1758년이 되지만, 태양력으로는 이미 신년을 맞이하고 있어 1759년이다.), 고산쿄 논안토쿠천가의 초대 당주・도쿠가와 무네타케의 7남으로서 태어난다.실제의 출생은 12월 26일의 돼지의 반각(오후 10시무렵)이었지만[주 1], 논안토쿠천가의 계보로는 27일로 여겨져 또 「전번사실」로는 12월 28일로 되어 있다.호레키 9년(1759년) 1월 9일에 아명・현환(마만)이라고 명명해진[4].생모는 향전원전(야마무라씨・과나)으로, 생모의 친가는 오와리번의 가신으로서 목증을 지배하면서, 막부로부터 목증에 있는 후쿠시마 관문을 맡아 왔다.(와)과나의 할아버지는 야마무라가의 분가로 교토의 문신근위가를 시중드는 야마무라3안으로, 아이 야마무라3연은 우네메와 칭해 본가의 귀찮음이 되었다.(와)과나는 3연의 딸(아가씨)로, 본가의 야마무라 아키라계의 양녀가 된다.무네타케의 정실은 근위가의 출신이기 위해, 라고나도 논안토쿠천가를 시중들어 무네타케의 총애를 받은[5].사다노부는 측실의 아이(서자)였지만, 무네타케의 남자는 장남으로부터 4남까지가 요절해, 정실의 5남인 토쿠가와 오사무찰이 적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 어머니형(오빠)의 6남・마츠다이라정국과 1세 연하의 사다노부는 후에 정실인 마님 근위씨(보련원전)가 양모가 된[6].

호레키 12년(1762년) 2월 12일, 논안야부가 소실했기 때문에, 에도성 성의 중심 건물에 일시 거주하는 일이 용서되었다.호레키 13년(1763년), 6세 때에 병에 걸려 위독 상태가 되었지만, 치료에 의해 목숨을 멈추었다.그러나 사다노부는 유소기는 다병이었던[4].

장군 후보

유소기보다 총명하고 알려져 있어 논아까를 이은 형(오빠) 치찰이 병약하고 범용이었기 때문에, 한시기는 논아까의 후계자, 그리고 머지않아 제10 대장군・도쿠가와 이에하루의 후계라고 주목받고 있었다고 여겨진다.그러나, 다누마오 기쓰구에 의한 정치를 하고 있던 당시부터, 타누마 정치를 「뇌물 정치」로서 비판했기 때문에 존재를 소외당하고 있어 뜻 다음 권세를 무서워한 이치하시 도쿠가와 가문 당주・치제에 의해서, 야스나가3년(1774년)에 히사마츠 마츠다이라가의 서자의 계통으로 무츠 시라카와번 제 2대 지방 영주・마츠다이라정방의 양자로 여겨졌다.시라카와번의 양자가 된 후도 당분간은 논안야부로 거주하고 있어, 동년 9월 8일(실제는 8월 28일)의 치찰의 사망에 의해 논아까의 후계가 부재가 된 기회에 양자의 해소를 신청했지만 용서되지 않고, 논아까는 수십년에 걸쳐 당주 부재가 되었다.

한시기는 장군 세코와까지 말해진 사다노부는, 이것에 의해 의차를 격렬하게 미워해, 후에 암살을 꾀했다고까지 말해지는 한편으로, 스스로도 막각들이를 노리고, 의차에 뇌물을 주고 있던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다만, 사다노부가 시라카와번의 양자가 된 당시는, 가 치의 세코의 가 기가 건재하고, 이 시점에서는 사다노부가 장군 후계가 될 가능성은 절무이며, 한편 고산쿄는 서자 뿐만이 아니라 세코나 당주로조차 타영주가에의 양자에게 배웅해지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사다노부의 장군 세코 후보의 건은 후세의 부탁의 가능성이 있다.

같은 히사마츠 마츠다이라가의 이요 마츠야마 지방 영주・마츠다이라정정이, 논아까로부터 사다노부의 친형・정국을 양자로 맞이해 류힐에 승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방도 류힐이라고 하는 가문의 품격의 상승을 목론 그리고 사다노부를 양자로 맞이했다.호주 승계 후, 사다노부는 막각에 가문의 품격 상승을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다만, 실현된 것은 노중이 해임된 나중에 있었다.

관정의 개혁

텐메이의 대기근에 있어서의 번정의 재건의 수완을 인정받은 사다노부는, 텐메이 6년(1786년)에 가 치가 사망해 가 제의 대가 되어, 다누마오 기쓰구가 실각한 후의 텐메이 7년(1787년), 토쿠가와 세 대가의 추천을 받고, 소년기의 제11 대장군・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래에서 노중 상석・장군보좌가 된다.그리고 텐메이의 치는 것개나를 기에 막각으로부터 구타누마계를 일소 숙청해, 할아버지・요시무네의 향보의 개혁을 표본에 관정의 개혁을 실시해, 막부에 의한 정치 재건을 목표로 했다.

노중직에는 대대로 이어옴 영주가 취임하는 것이 에도 막부의 불문율이다.확실히 시라카와 지방 영주・히사마츠 마츠다이라가는 대대로 이어옴 영주이며, 사다노부는 거기에 양자에게 들어왔으므로 이 원칙에는 반하지 않는다.이에야스의 직계 자손으로 영주가 등용할 수 있었던 사람 이외는 장군가문의 근친인 번에는 열세라레두, 이에야스의 직계 자손 이외의 남자계 친족인 영주는, 원칙으로서 대대로 이어옴 영주로 여겨진다.그러나, 사다노부는 요시무네의 손자였기 때문에, 대대로 이어옴 영주면서 장군가문의 근친인 번(댁문)에 준하는 취급이라고 하는 애매모호한 대우였으므로, 혼란을 부르기 쉽다.

전임자인 다누마오 기쓰구의 중상주의 정책과 공무원과 상가에 의한 연고 중심의 이권 뇌물 정치로부터, 기근 대책이나, 어려운 검약 정책, 공무원의 뇌물 인사의 폐지, 대장을 지키는 무사에게의 학문 음미 정책등에서 일응이 성과를 올렸지만, 노중 취임 당초부터 오오타 난포에 의해 「시라카와의 깨끗한에 생선의 집이군요라고 원래의 탁함의 타누마개히사계」등과 야유되었다.또 막부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방면에서 비판이 속출해, 아래와 같은 천황, 황후, 황태자등의 칭호 한 건 사건도 관련 불과 6년에 노중을 실각하게 되었다.

한편, 「해양국병담」을 저술해 국방의 위기를 말한 하야시 시헤이등을 거사 횡단의 금으로 처벌하거나 다누마시대의 에조지 개척 정책을 방폐하거나 관정이학의 금, 막부의 학문소인 쇼헤이자카 학문소에서 정학 이외를 배제, 난학을 배제하는 등, 결과적으로 막부의 해외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하게 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그러나 실제로는, 너그러운 정치의 3 박사의 1명인 고라세이리의 아이・□암 및 그 자・다계 모두 창평횡에 봉직 하면서 서양학문・국제 정세에도 통해 특히 다계는, 번서조소 설립을 건의 해 실현시킨 인물이며, 그 견해는 일면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유럽으로는, 1792년 4월 20일프랑스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해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면, 프랑스의 근처에 위치하는 오스트리아령 네 델 랜트도 전장이 되었다.이것은, 극동의 치시마네델란드 동인도회사1643년에 영토 선언[7]을 한 이래, 나가사키와의 남북 양극에서 일본 열도를 사이에 두어[8]다른 구미제국을 접근하지 않았던 네델란드의 해군력이 허술하게 된 것을 의미했다.

그러자(면) 러시아가 남하를 개시해, 1792년 9월 3일, 일본인 표류민인 다이코쿠야 고우다유등의 반환과 교환에 일본과의 통상을 요구하는 것 아담・라크스만네무로에 래항했다.

다음 1793년, 네델란드의 전황은 프랑스군에 의한 제압의 양상이 더욱 더 강해져, 프랑스 혁명 전쟁은 유럽 전역에 파급할 기세로 퍼지고 있었다.너그러운 정치 5년(1793년) 6월 20일, 사다노부는, 고우다유와 라크스만 일행을 마츠마에에 불러, 막부로서 교섭에 응하도록 지시했다.게다가 러시아의 무역의 요구를 거부하지 않는 형태로, 나가사키의 네델란드 상관이라고 교섭하도록 하는 회답을 준비해, 또, 고우다유를 인수하도록 지시했다.동년 6월 30일, 라크스만은 나가사키에는 가지 않고 귀로에 들었다.

대외 정책은 긴박한 상황에 있어, 만약 네델란드가 프랑스에 점령되었을 경우, 러시아가 에도에 탑승해 올 가능성이 있어, 혹은 치시마령이나 네델란드 상관의 권리가 프랑스로 옮겨질 가능성, 또 영국이 타 와 삼파의 전장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사다노부는 에도 만등의 해안 방비 강화를 제안해, 또 조선 통신사의 접대의 축소 등에도 노력했다.

7월 23일, 사다노부는, 해안 방비를 위해서 출장중, 사직을 명령받아 노중 상석 및 장군 보좌의 일자리를 물러난[9].

사다노부 사임의 2개월 후의 9월, 쇄국의 금을 찢은 죄인이어야할 다이코쿠야 고우다유는 처형을 면해 에도성에서 막부제에 알현 해, 난학자들은 다음 해 11월 11일(1795년 1월 1일)부터 양력 정월을 개시해, 고우다유도 출석했다.사다노부의 사임은 그리스도 교국으로부터의 귀국을 허락해, 난학자 세력의 융성을 가져왔다.

한편으로 국외에서는, 양력 정월을 축하한 달에, 네델란드 공화국이 멸망 해, 대신해 프랑스의 위성국 「바타비아 공화국」이 건국을 선언했다.그리고 1797년,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는 미국선과 용선계약을 맺어, 멸망 한 네델란드의 국기를 내걸게 해 나가사키에서의 무역을 계속하게 되었다.그러나, 1799년에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도 해산했다.고용주를 잃은 네델란드 상관은, 더욱더 네델란드 국기를 내걸게 한 미국선과 무역을 계속했다.

그러나, 사다노부의 사임은 천황, 황후, 황태자등의 칭호 한 건이 원인이라고 해지는 것이 많다.타이세이 위임론으로는 조정의 권위를 막부에 의한 정치에 이용하지만, 고우카쿠 덴노가 친아버지의 사친왕가의 하나전 히토시 황태자다이죠 천황의 천황, 황후, 황태자등의 칭호를 주려고 하면 주자학을 받들고 있던 사다노부는 반대해, 이 천황, 황후, 황태자등의 칭호 한 건을 계기로, 아버지인 치제에 중진의 천황, 황후, 황태자등의 칭호를 주려고 생각하고 있던 장군・가 제와도 대립하고 있었다.

사다노부 은퇴 후의 막부는, 미카와 요시다 지방 영주・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 에치고 나가오카 지방 영주・마키노 다다키요를 시작으로 하는 사다노부파의 노중은 그대로 유임 해, 그 정책을 계승했으므로, 그들은 너그러운 정치의 유로로 불렸다.사다노부의 관정의 개혁에 있어서의 정치 이념은, 에도막부 말기기까지의 막부에 의한 정치의 기본으로서 견지 되게 되었다.

그 후

노중 실각 후의 사다노부는, 시라카와번의 번정에 전념한다.시라카와번은 산간에 있어서의 영지 때문에, 실수입이 적고 번재정이 괴로웠지만, 사다노부는 마산을 장려하는 등 번재정을 촉촉하게 했다.또, 민정에도 진력해, 시라카와번으로는 명군으로서 존경받았다고 한다.사다노부의 정책의 주목적은 농촌 인구의 유지와 그 생산성의 향상이며, 솎아냄을 금지해 갓난아이의 양육을 장려해, 식산에 힘썼다.그런데 , 관정의 개혁의 때에 사다노부가 제창한 에도 만경비가 문화 7년(1810년)에 실시되게 되어, 최초의 주둔은 주창자로 여겨진 사다노부의 시라카와번에 명할 수 있게 되었다.이것이 시라카와번의 재정을 압박했다.

문화 9년(1812년), 상속자를 장남 정영에 양보해 은거했지만, 더욱더 번정의 실권은 장악 하고 있었다.정영시대에 행해진 히사마츠 마츠다이라가의 옛 영토인 이세 쿠와나번에의 영지 바꾸어는, 사다노부의 요망에 의해 행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쿠와나에는 양항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목적이었다고 말해지고 있다.다만 이설로서 전술의 에도 만경비에 의한 재정 악화에 다 참을 수 없어진 정영이, 에도 만의 해안의 시모우사 사쿠라번에의 다이묘의 소령에 의해서 이것을 경감하려고 도모했기 때문에, 사쿠라 지방 영주・홋타 타다시 사랑이나 그 일족인 에도 막부의 직명의 하나홋타 마사아쓰와의 대립을 일으켜, 징벌적 다이묘의 소령을 받았다고 하는 설도 있다.

최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묘지문(레이간절)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무덤(레이간절)

분세 12년(1829년)의 1월 하순부터 감기에 걸려, 2월 3일에는 고열을 발했다.3월 21일에는 칸다사쿠마쵸 하안으로부터 출화해, 불이 니혼바시에서 잔디까지 퍼져, 다수의 건물이 소실해 2800 다른 사람의 불에 타죽은 사람이 나왔지만, 마츠다이라가의 핫초보리의 무사가 사는 집이나 츠키지의 교외 별장인 욕은원, 한층 더 에도시대 저택도 불길의 번짐했기 때문에, 사다노부는 피난하는 일이 되지만, 피난할 때에 사다노부는 지붕과 대나무발이 붙은 큰 가롱에 실려 잔 채로 반송되었기 때문에, 길이 차 민중이 폐했다고 한다.한층 더 이 때, 마츠다이라가의 가인이 방해인 읍인을 베어 죽였다고 하는 소문이 세상에 유포했다.이 때의 대화재에 관한 시사나 인물을 풍자한 익명의 창이나 낙서가 있어, 「월중(사다노부)이, 발신으로 도루, 기적에, 인가는을 술안주라고, 도루에츠젠(후쿠이번으로, 후쿠이번에도 읍인을 베어 죽인 소문이 유포하고 있었다)」 「들보와인가는 머리가, 대나 모습」이라고 무계의 한 장 인쇄에 의해서 다수 간행된[10].이것은 관정의 개혁 시에 출판 통제를 행한 사다노부에 대한 업계의 복수였다고 여겨지는[11].

저택의 소실에 의해, 사다노부는 동족의 이요 마츠야마번의 무사가 사는 집에 피난했지만, 비좁음이기 때문에 4월 18일에 마츠야마번의 미타의 에도시대 저택으로 옮긴[11].이 임시 오두막집부 중(안)에서 병상에 있던 사다노부는 가신등과 노래모임을 열어, 적자 정영과 번정에 관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한때는 회복의 조짐도 보였지만, 5월 13일의 여덟 개시(오후 2시) 무렵부터 신음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해 일곱 시경(신의 각, 오후 4시)에 의사가 진찰하는 가운데[12], 갑자기 맥박이 바뀌어, 사망한[13].향년72。

죽음은 「이제 와서에 무엇인가 안미무우기일도 락사계일도 봐는이라고 매다는 몸은」묘지는 도쿄도 고우토우구 시라카와의 레이간절에 있다.

인물・일화

  • 시라카와 지방 영주로서는, 에도시대 후기의 명군의 1명으로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다만 노중으로서의 평가는 나뉜다.근년의 다누마오 기쓰구의 재평가에 수반해, 다누마시대의 정책을 전부정한 사다노부에의 평가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것이 되고 있지만, 그 많게는 역사학자가 아니고 주로 작가에 의하는 것이다.[요점 출전]
  • 저서에 「풍류 이야기 책」, 「우하인말(우게의 한 마디)」, 「집고10종」등 100이상을 남긴다.또, 라이 산요를 시작해 많은 학자와의 교류를 가졌다.시라카와번에 일본 최초의 공원(미나미노우미 공원)을 만드는 등의 정책도 실시하는 인물이었다.
  • 시가도 잘 해, 「마음에게 봐 해 박의 화산리테심네조미뚜껑 꺽여의 숙소」(일설에 「마음에게 봐 해 박의 화산리테심네조원인 체하는 황혼의 숙소」라고도)로부터, 황혼의 소장이라고도 불렸다.
  • 「우하인말」은 사다노부의 글자를 분해해 붙인 이름으로서 알려져 있다(정⇒우하, 신⇒평판).이 「우하인말」 중(안)에서 사다노부는, 자신은 유소의 무렵은 성격이 급했지만, 스승으로서 붙일 수 있었던 오오츠카 타카시작쿠로사와치강, 근습이었던 미즈노 때문장의 3명의 지도에 의해서 성격이 바뀌었다고 하고 있다.효작은 논아까는 토쿠가와 막부의 번병으로서 주자학오봉지루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어 사다노부가 고문사학이나 고학에 통하면서도 관정이학의 금을 낸 배경에는, 자기의 학문과 노중으로서의 정치적 입장을 나누고 생각하는 사다노부의 학문관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 유교에 심취한 나머지, 자숙적인 일면이 있었다고 한다.「방사(성행위)라는 것은, 자손을 늘리기 위해서 하는 것으로, 욕망에 참기 어렵다고 느낀 것은 한번도 없다」라고 「우하인말」에 적고 있다.한 번 손을 댄 여성을 저택으로부터 소 해 발하기 전에, 침실을 같이 해 시집가기 위한 마음가짐등을 가르쳐 설득한 적도 있다.이것은 사다노부를 정욕에 견딜 수 있는가 하는 수행의 목적으로 간 것으로, 「조금도 범정(욕망) 일어나지 않고」라고 적고 있다.
  • 아버지 무네타케는 국학을 보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다노부는 반대로 「풍류 이야기 책」에 대해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 것의 개여」를 비판하는 등, 반대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이것은, 무네타케에 보호되고 있던 가다노 아리마로가 문외 불출로 여겨진 천황 즉위후 처음 거행하는 제의 기록을 간행한 「천황 즉위후 처음 거행하는 제편몽」사건에 의해서, 논아까의 책임 문제로 발전한 경위로부터 스승의 오오츠카 타카시작 모두 국학에 대한 반감을 안고 있었다고 한다.후년, 사다노부도 국학자를 요구해 소문에 선장에도 소개를 요구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고전 연구를 위한 인재 모집이며, 선장의 추천 한 인물을 결과적으로는 끊고 있다.덧붙여 선장의 분은 관정의 개혁에 강하게 기대해 저서의 「구슬구 무성해」를 사다노부에 헌상 하는 등, 자기의 생각이 정치에 활용될 것을 바랐지만, 실패에 끝나게 되었다.
  • 관정의 개혁으로는, 비속한 예문을 단속한 사다노부이지만, 개인으로서는 이러한 예문을 즐기는 일면도 있었다.예를 들면, 「영주 기질」(텐메이 4년경)이나 「마음의 이야기 책」(향화 2년 자서) 등, 스스로 집필한 노랑 표지풍의 미간의 오락소설이 존재하는[14].또, 거대해 집필한 방대한 수필류에는, 이치이의 화제를 열심히 채택하는 등, 공사로 모순된 일면이 있었지만, 위정자로서의 입장으로부터 세정을 이해하려고 하는 측면이 보인다.
  • 강호시대의 풍속화에도 친하게 지내, 아래 강호시대의 풍속화사쿠와가타재필 「근세 직공그림진 설명문이 있는 그림 두루마리 」(3권, 도쿄 국립 박물관창고)은 사다노부의 구장품이다.덧붙여 이 그림 두루마기의 캡션은, 상권은 시카타 아카라, 나카권은 호세이도 기산지, 하권은 산토 교덴이라고 한, 관정의 개혁으로 어떠한 피해를 입은 면면이 쓰고 있다.또, 사다노부는 스스로 이름 붙인 명석 「구로카미산」의 유래를 회화화한 「구로카미산 재수 그림 두루마기」도, 재에 그리게 하고 있는( 모두 관영사창고, 비공개) 등, 사다노부는 재에 자주 그림을 그리게 하고 있다.이만큼에 머물지 않고, 「갑자야화」3편권8에는 사다노부가 수집한, 아키카즈・야스나가기부터 너그러운 정치・향화경까지 장기에 걸치는 니시키에 판화를 붙여 모은 굵은 두루마리 5권을, 히슈공에 빌려 준 일화가 기록되고 있다.「퇴한잡기」권일에는, 가노파의 가루 소유주도리의 폐해나 나가사키파의 중국이나 치우침을 비판하는 중에 있고, 강호시대의 풍속화에는 당세의 풍속을 묘사해 후세에게 전한다고 하는 점에 일정한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15].또한, 사다노부 자신도 그림을 그려, 그 솜씨는 일정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화풍은 가노파풍, 혹은 남빈파에서30~40점 정도의 작품이 확인되고 있다.그러나, 만년이 되면, 젊은 무렵 가신 등에게 주고 있던 회화를 회수해 책과 교환했다고 말해지고 있어[16], 남겨진 작품수는 책에 비하면 매우 적은[17].
  • 당시 , 직공에게 만들게 한 시라카와 오뚝이시라카와시의 특산물로 지금도 매년 2월 11일에는 「시라카와 오뚝이시」라고 하는 축제로 팔리고 있다.
  • 시라카와 곁을 특산물로 했던 것도 사다노부이다.일화도 많이 있어, 오늘이라도 시라카와시의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 있다.
  • 1800년(너그러운 정치 12년)에 사다노부는, 문헌으로부터 시라카와 신사가 세우는 위치가 시라가와의 관이다라는 고증을 실시했다.후에 근대의 발굴 조사에 의한 재확인에 의해서 1966년에 「시라카와관적」으로서 나라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영주면서 기도류유술스즈키방교(스즈키 기요시 무관)의 수제자로, 3000명이라고 하는 방교의 제자의 쳐 가장 뛰어난 3명 중 1명이 사다노부였다고 전해진다.스스로도 가신에게 유술을 가르쳐 차남 사나다행관에도 가르쳤다고 한다.은거 후도 유술의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고, 새로운 기술을 짜냈다.덧붙여 사다노부가 유술을 뜻한 배경에는, 자신이 자주 아파서 자기의 단련에 노력했던 것에 있었다고 한다.
  • 영주의 조상・마쓰다이라 사다쓰나가 가신 야마모토조유키노부와 함께 짜냈다고 전해지는 갑을류검술이 쓸모없게 되고 있었지만, 야마모토가에 남아 있던 비방을 쓴 책을 기초로 이것을 복원해, 기도류유술을 맞추고 궁리를 더해 갑을류를 검・유를 융합시킨 내용으로 고쳤다(그 이전의 갑을류와 구별하기 위해(때문에), 사다노부가 개변한 이후의 것은 「 신갑을류」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 번교・릿쿄우칸으로 지도되고 있던 야마모토류거합술에, 사다노부가 짜낸 기술을 더해 유파의 개량을 실시했다.사다노부가 더한 기술은 「궁리의 검」이라고 불렸다.
  • 포술에 대해서도, 미키류, 오기노류, 나카지마류, 와타나베류의 4류 모든 전수받음을 얻고, 4류의 장점을 맞추어 미타 노베류를 너그러운 정치 연간에 열렸지만, 그 후, 한층 더 많은 포술 유파를 연구해, 문화 연간에 댁류포술을 열었다.
    • 궁술에 대해서는, 유소보다 히키류를 수행해, 스승의 츠네미 분자에몬으로부터 책을 하사할 수 있을 정도의 솜씨였지만, 독자적으로 궁리하고 유파를 열었다.그 후, 한층 더 히키류를 더해 댁류궁술을 열었다.
  • 천황, 황후, 황태자등의 칭호 한 건때, 장군・가 제와 대립해, 화낸 가 제는 시동으로부터 칼을 받아 사다노부에 참리카나 깔때기 했다.그러나 옆용무 토리츠기히라오카뢰장이 재치를 특징을 살리고, 「월나카도노(사다노부), 칼을 받는 이유, 빨리 배대 되어서」라고 외쳤기 때문에 가 제도 맥 빠짐 해, 사다노부에 칼을 하사해 내렸다고 하는[18].
  • 사다노부는 학문 음미의 정책의 일환과 인재 등용의 수단으로서 학력 시험을 실시했다.당시 , 학문・교양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막부의 신하들의 태도에 사다노부는 낙담해, 막부의 신하들에게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서 시험을 생각했다고 한다.수험 자격은, 주로 막부의 신하나 지역인 등에 한정해, 쇼헤이자카 학문소에서 시험(학문 음미)을 실시했다.곤도 주조는 이 시험으로 좋은 성적을 올렸기 때문에, 사다노부에 등용되어 후에 너그러운 정치 10년(1798년), 에조지 조사대의 일원에 참가했다.
  • 작가의 이사와 모토히코에 의하면 저서 「역설의 일본사」중에서, 주자학에 심취해 그 이념의 실현을 제일로 한(관정이학의 금은 그 전형) 종교인이며, 다누마오 기쓰구가 거기에 반하는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그를 비정상으로 미워해, 이해를 도외시해 뜻 다음 간 것을 전부정해 버린, 외국을 「미개 민족」이라고 밖에 보지 못하고, 난학을 금지해, 막부가 호우쵸에 뒤지는 원인을 만든, 등이라고 말하고 있다.한번의 영주로서는 어쨌든, 일국을 움직이는 노중 필두로서는 문제가 많은 등, 꽤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또, 일반적으로 사다노부가 높게 평가되기 십상인 것은, 주자학적 가치관에 근거해 쓰여진 「토쿠가와 실기」등의 토쿠가와분의 기록을 통채로 삼켜 버리고 있는 탓이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다만,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그 저 「정어」를 봐도 알도록(듯이), 주자학적 가치관만을 맹신 하고 있는 것은 전혀 없고, 린번・아이즈번의 가로・타나카현재가 실학파의 학자를 채용하는 것을 신청했을 때도 허락하고 있다.
  • 월중수였던 일로부터 「월중 모양」, 니시노마루하에 저택이 있던 것으로부터, 「니시시타(탓인지) 님」이라고도 불렸다.
  • 노중을 근무하기 시작해 2개월반(정도)만큼으로 2332량의 임시의 지출이 있었다.막부 관계를 담당하는 공무원의 부정이 있던 것은 아닐까 의심되어 조사했지만 그러한 사실은 없고, 이것은 노중으로서의 위의를 바로잡은 무사가 근무를 위해 성에 가는 ・장군의 명의로서의 임무・무사가 근무를 위해 성에 가는 전의 저택에의 손님에 대한 응접비등에서 고액의 지출이 필요했던 것이 판명되었다.통상이라면 선물이나 뇌물에 의해서 보전하지만, 사다노부는 뇌물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제경비는 모두 적자가 된[19].

경력

※메이지 시대를 제외해 일자는 음력.

편저작

각주

주석

  1. ^사다노부 전기 「수국공전기

출전

  1. ^노중 상석으로 취임시타비치 같은 달에 그려진 사다노부 30 세시의 자화상.화상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 화면 우상에 「발란이반정상선이벌악」(란을 거두어 정말로 돌려주어, 선을 칭찬해 악을 벌스)이라고 하는 사다노부의 개혁에 대할 결의가 기록되고 있다.사다노부의 초상에는 이 그 밖에, 사다노부 자필의 머리 부분만의 자화상을 바탕으로, 마츠다이라정영이 카노양신에 명해 전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마쓰다이라 라쿠오상[1]」(후쿠시마현립 박물관창고)도 있다(쿠와나시・시라카와시 합동 기획전 실행 위원회 편집・발행 「쿠와나시・시라카와시 합동 특별 기획전 「대사다노부전─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궤적─」」2015년 8월 7일,34,84-85페이지).
  2. ^ a b 고 우에스기 데루토라외4명 증위노건』 아시아 역사 자료 센터 Ref.A10110299500 
  3. ^히사마츠 마쓰다이라씨는 신분이 높은 사람의 정실을 이르가 아니고, 대대로 이어옴의 집안이다.다만, 후에 장군가문의 근친인 번 취급이 된다.
  4. ^ a b고사와 켄지저 「인물 총서‐마쓰다이라 사다노부」요시카와 히로후미관, 2012년, 4페이지
  5. ^고사와 켄지저 「인물 총서‐마쓰다이라 사다노부」요시카와 히로후미관, 2012년, 3페이지
  6. ^고사와 켄지저 「인물 총서‐마쓰다이라 사다노부」요시카와 히로후미관, 2012년, 2페이지
  7. ^ 네무로시‐학예원 일지‐「최초의 치시마 탐험」
  8. ^큐슈 대학 부속 도서관 소장 「아시아도 2」-24
  9. ^천황, 황후, 황태자등의 칭호 한 건은, 성장한 가 제가, 엄격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사다노부를 싫어해, 싫어하고 있었을 때에, 타이밍 좋게 일어난 사건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사다노부를 멀리했던 것이라고 하는 지적도 있다.
  10. ^고사와 켄지저 「인물 총서‐마쓰다이라 사다노부」요시카와 히로후미관, 2012년, 273페이지
  11. ^ a b고사와 켄지저 「인물 총서‐마쓰다이라 사다노부」요시카와 히로후미관, 2012년, 274페이지
  12. ^고사와 켄지저 「인물 총서‐마쓰다이라 사다노부」요시카와 히로후미관, 2012년, 275페이지
  13. ^고사와 켄지저 「인물 총서‐마쓰다이라 사다노부」요시카와 히로후미관, 2012년, 276페이지
  14. ^모리 센조 「락옹공의 오락소설」 「모리 센조 저작집」 제11권, 중앙공론사, 1989년, ISBN 978-4-12-402781-5.
  15. ^나이토 마사토 「영주들이 사랑 나온 일품・절품 강호시대의 풍속화 재발견」쇼우갓칸, 2005년,159-173페이지, ISBN 978-4-09-387589-9.
  16. ^시부사와 에이이치 「락옹공전」이와나미 서점, 1937년, 17 페이지.
  17. ^스기모토 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회화 인장에 대해」(쿠와나시・시라카와시 합동 기획전 실행 위원회 편집・발행 「쿠와나시・시라카와시 합동 특별 기획전 「대사다노부전─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궤적─」」2015년 8월 7일,114-118페이지.
  18. ^속에도막부의 역사서」-문공원전 실기
  19. ^야마모토 히로후미저 「무사의 평판기」신인물 북스,14-17페이지, ISBN 978-4-404-03981-1.동 「에도의 조직인」신쵸 출판사 문고, 151 - 152페이지, ISBN 978-4-10-116444-1.
  20. ^국립국회도서관 근대 디지털 도서관 「집고10종」

참고 문헌

전기
서적
  • 후지노 타모츠키무라 주춧돌무라카미곧 편 「번사 대사전 제 1권홋카이도・도호쿠편」유잔카쿠, 1988년 ISBN 4-63910-033-7
  • 오카다천소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에게의 접근-관정의 개혁과 관련해-」(수록:후지노 타모츠 선생님 환갑 기념회편 「근세 일본의 정치와 외교」유잔카쿠, 1993년 ISBN 4-63901-195-4
  • 동문동2 「다누마오 기쓰구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시사통신사, 2000년 ISBN 978-4-7887-0059-8
  • 미즈타니 삼공 「에도의 공무원 사정」치기미 신서, 2000년 ISBN 978-4-4800-5851-5
  • 후지타깨닫아 「다누마오 기쓰구」미네르바 서점미네르바 일본 평전선〉, 2007년 ISBN 978-4-6230-4941-7
  • 고사와 켄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정권과 너그러운 정치 개혁」키요부미당출판, 2008년 5월 ISBN 978-4-7924-0632-5
  • 야마모토 히로후미 「에도의 조직인」신쵸 출판사 문고, 2008년 10월 ISBN 978-4-10-116444-1
  • 야마모토 히로후미 「타케시의 평판기 「요시노 이야기 책」에 보는 에도 임원의 성적표」신인물 북스, 2011년 2월 ISBN 978-4-404-03981-1
  • 쿠와나시・시라카와시 합동 기획전 실행 위원회 편집・발행 「쿠와나시・시라카와시 합동 특별 기획전 「대사다노부전─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궤적─」」2015년 8월 7일
사료
  • 「수국공전기」

관련 작품

소설

만화

영화

 
미나미노우미 신사앞에 있는 석상

텔레비전 드라마

관련 항목

This article is taken from the Japanese Wikipedia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This article is distributed by cc-by-sa or GFDL license in accordance with the provisions of Wikipedia.

Wikipedia and Tranpedia does not guarantee the accuracy of this document. See our disclaimer for more information.

In addition, Tranpedia is simply not responsible for any show is only by translating the writings of foreign licenses that are compatible with CC-BY-SA license information.

0 개의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