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19일 금요일

진산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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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파동(치응씨는 어때)은, 제3 공화국 시대의 한국의 최대 야당민정당신민당 내부에 있어서의 당내 파벌 항쟁에 관한 사건이다.1964년 8월의 언론 윤리 위원회법을 둘러싼 제1차진산파동과 1971년 5월의 총선거에 있어서의 제2차진산파동의 두 개가 있어, 어느 사건도 동시대에 있어서의 유력 야당 정치가인 유진산(유・진산)의 처우를 둘러싸 발생했다.

목차

제1차진산파동

제1차진산파동은, 1964년 8월 23일, 여당인 민주 공화당(이하, 공화당)이 7월에 강행채결한 언론 윤리 위원회법을 둘러싸, 당시 , 민정당의 당무 위원인 유진산이 당이 제명된 사건이다.

경위

1964년 6월 3일,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에 반대하는 학생 데모의 고조를 받아 정부는 서울시 1엔에 비상 계엄령을 포고했다(6・3 사태).계엄령 포고 후, 공화당과 야당(민정당・민주당)은 「시국 수습 협의회」(이하, 협의회)을 조직 해 계엄령 해제를 향한 협의를 실시해 7월 28일에 여야당 공동의 성명을 발표, 같은 날 행해진 국회에 대해 여야당 공동 제안에 의한 비상 계엄령 해제 요구 결의가 가결된 일에 의해, 다음 29일, 계엄령은 정식으로 해제되었다.그러나, 협의회로는 학생에 의한 가두 행동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로서 여당측이 요구하고 있던 「언론 자립 규제 강화 대책」에 대해 명문으로의 합의가 되어 있지 않았다.

계엄령 해제의 다음 30일, 공화당은 언론 윤리 위원회 법안과 학원 보호법안을 국회에 단독 제안했다.이것에 대해 야당은, 윤□선 인솔하는 민정당은 철저 항전의 자세를 뽑았지만, 또 하나의 야당인 3 민회(민주당・자유민주당・「국민의 당」에 의한 공동 원내 교섭 단체)는 수정안을 제출한 일로, 분열 상태가 되었다.또 협의회에 참가하고 있던 야당 의원은, 계엄령 해제 후에 있어서의 공화당의 행동을 미리 안 다음 묵인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라고 하는 의혹을 향할 수 있는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강경파는 언론 윤리 위원회법의 표적이 된 신문 각지에 의한 의혹 보도에 힘을 얻어 당내 온건파에의 공세를 강하게 하는 일이 되었다.최대 야당인 민정당내에 있어서의 강경파의 비판은 윤□선과 대립관계에 있던 유진산으로 향해졌다.

언론 윤리 위원회법을 둘러싸, 단상 점거 등 철저 항전을 주장하는 윤□선에 대해, 유진산은 또 하나의 야당인 3 민회를 여당 측에 쫓아 버린다고 하여 반대해, 격렬하게 대립했다.그리고, 3 민회가 제출한 언론 윤리 위원회법수정안이 가결되었을 때, 민정당은 단상 점거는 아니고 회의장으로부터의 퇴장을 선택한 일로 윤□선과 유진산의 정치적 대립은 결정적이 되어, 8월 3일에 개최된 의원 총회는 분규 해, 윤□선등은 유진산이 여당의 강행채결을 묵인했다고 해서 공식으로 규탄했다.이틀 후에 행해진 중앙 상무 위원회로는 「묵계 진상 조사위원단」이 설치되어 민정당이 결과적으로 언론 윤리 위원회법의 성립을 허락해 버린 배경으로 유진산의 암약이 있었다고 했다.

8월 23일, 민정당 감찰 위원회는 서면 결의에서 유진산을 제명하는 결정을 실시했다.후에 「제1차진산파동」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에 대해유진산은, 법정 투쟁으로 대항, 11월 26일에 재판소에서 스스로의 복당을 차지할 수가 있었다.한편, 윤□선은 군소 정당인 자유민주당과의 통합을 추진, 유진산이 복당을 차지한 것과 같은 날의 11월 25일에 통합을 선언했다.그리고 12월 16일, 유진산집합의 간부 13명을 제명, 7명을 2년간의 정권 처분으로 했다.그러나, 야당 통합을 바라는 여론에 헤아려지는 형태로, 유진산계 간부에 대한 처분은 같은 달 31일에 삭제되었다.

제2차진산파동

제2차진산파동은, 1971년 4월대통령 선거 직후에 행해진 총선거의 후보 등록 마지막 날인 5월 5일, 당시의 최대 야당인 신민당의 총재였던 유진산이 당내의 승낙이 없는 채로 자신의 선거구에서 만난 서울 특별시 영등포갑구로부터 전국구에 전업한 사건이다.

경위

당초, 유진산이 입후보 할 예정인 영등포갑구로부터, 공화당 후보로서 박정희(파크・톨히) 대통령 부인인 륙영수(유크・욘스)의 자형인 장덕진(쟌・드크진)이 입후보 해 갑자기 주목을 끌고 있던 것에 야나기모토인이 돌연, 전국구에 전출, 후계 후보에 완전히 무명의 청년 후보, 박정훈(파크・존 분)을 옹립 한 것으로, 장후보는 단연 유리하게 되었다.그 때문에, 야나기모토인과 공화당의 사이에 뒷거래가 있던 것은 아닌지, 라는 의념이 치솟아 당내는 수습이 되지 않는 혼란 상태에 빠졌다.

총선거 지난 달의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해, 비주류파(김대중 전대통령 후보가 중심)와 주류파(량일동당운영 위원이 중심)의 대립이 표면화하고 있던 곳에, 진산파동이 발생한 것으로 신민당은 당자체가 붕괴할 수도 있는 상황에까지 몰렸다.유진산은 5월 12일에 당총재를 사임, 원로로 전당 대회 의장이기도 한 김 히로시일(김・폰 일)이 당규 약에 따라 당수 대행으로 취임해 신민당은 선거에 임했다.선거전 당초는 개헌 저지선의 65 의석의 확보도 의심되어졌지만, 억지로 개헌해 3선을 완수한 박정희정권에 대한 비판이 신민당 후보에 집중한 것으로, 개헌 저지선의 65 의석을 큰폭으로 웃도는 89 의석(지방구 65 의석+전국구 24 의석)을 획득해 승리할 수 있었다.덧붙여 영등포갑구로는 장덕진이 서울시에서 유일한 여당 세력으로서 당선했다.

선거 후의 7월 20일에 개최된 당대회의 총재선거로 총재 대행의 김 히로시일(주류파)이, 김대중(비주류파)과 량일동(얀・일 톤, 주류파로부터 이탈)을 찢어 당선해, 김 히로시일체제가 발족했지만, 비주류파의 지지자에 대해, 한국 중앙 정보부(KCIA)에 의한 협박이나 매수・출석 방해도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참고 문헌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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