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7일 금요일

후 발해

후 발해

만주의 역사
미자 조선 중국 춘추시대 동부몽골에 있었 □맥
옥저
미시하세
료니시고리 랴오둥군
료니시고리 랴오둥군
전한 료니시고리 랴오둥군 위씨 조선 흉노
한사군 부여
후한 료니시고리 오환 선비 □루
랴오둥군 고구려
현토군
창려군 공손도
랴오둥군
현토군
서진 평주
모용부 우분부
전연 평주
전진 평주
후연 평주
북연
북위 영주 계단 고막해 시츠이
동위 영주 물길
북제 영주
북주 영주
류죠군 말갈
연군
료니시고리
영주 송막도독부 뇨락도독부 시츠이 도독부 안동 도호부 발해국 쿠로미즈 도독부
5대 10국 영주 계단 발해국
상경도   동단 여진
나카교도 정안
도쿄도
도쿄로
상경로
동료 대마쿠니
랴오양행성
랴오둥도사 노아 말라 도지휘사사
건주 여진 해 서여진 야인 여진
만주
 

중국 동쪽에 있는 료령,길림,흑
로마노후아침
중화 민국
중국 동쪽에 있는 료령,길림,흑
소련
극동
만주국
중화 인민 공화국
중국 동북부
러시아 연방
(극동 연방 관할구역/극동 러시아)
중국 조선 관계사
Portal:중국

후 발해(보야)는, 역사 연구의 성과로서 928년부터 976년경에 걸쳐 존재했다고 상정된 왕조.건국을 명확하게 증명하는 문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실증되고 있어, 또 1990년대 이후에 발견된 야률우지묘지등의 석각 사료 등 고증의 결과, 후 발해의 실재는 부정되는 경향에 있다.

역사

종래 생각할 수 있어 온 후 발해상은, 대체로 다음 대로이다.

  • 926년, 계단()이 발해국을 멸해, 발해왕 □□는 포로가 되었다.계단은 구발해령에 「동단국」을 설치해, 황제의 장자의 야률돌 욕구(야률배)를 그 국왕으로 임명했다.그러나 각지의 발해 세력에 의해 반란을 평정 다 하지 못하고, 부득이 대□□이하의 포수를 인솔해 개선 했지만, 그 귀로에서 태조・야리츠아보키가 붕어, 야률배는 태조의 유해와 함께 본국에 끌어올렸다.야리츠아보키의 붕어에 의해 발해인의 자립 운동은 활성화, 그 중심이 된 것은 대□□의 남동생(이름 미상)이며, 구수도를 포함한 북방의 땅을 세력권으로 했다.타이코우현(대□□의 세코)도 또한계단에 귀순하지 않고, 계단의 영향력이 적었던 구발해국 서남부에서의 활동을 계속했다.
  • 928년, 계단(료)은, 동단국을 랴오양으로 옮겨, 발해 유민의 이주를 실시했다.많은 발해인은 여기를 중심으로 머물어, 독자적인 풍문화를 유지하게 되지만, 일부의 발해인(금신 및 60호・대유학자범・은계종등)은 이 해, 고려에 이주하고 있다.동단국의 후퇴와 엇갈림에 곧 바로 왕제대모(재위 928-?)(이)가 홀한죠(=류우센부)에 들어와, 발해국의 부흥을 선언( 후 발해(부흥)), 타이코우현도 압록부를 중심으로 독립해, 세력을 남해부(함경도)까지 회복했다.
  • 929년, 발해국은 일본에 배□를, 후당에 타카나리사・성문각을 견사입공, 지원을 요구했다.
  • 930년, 본국에 귀국중의 야률배가 정쟁의 결과, 후당에 망명, 계단(료)은 동단국을 폐지해 구발해령을 일시 방폐한(발해(부흥)에 의한 동단국 병합).동년, 타이코우현은, 왕제대모보다 독립하고 있다.
  • 931년, 발해국에 의한 후당에의 입공이 기록된다.
  • 934년, 왕제대모는, 남해부의 츠요시씨( 구발해의 대신 일족)와 협력해, 타이코우현세력을 구축했다.타이코우현정권은 정세 불리인 채 멸망, 부민 수만을 인솔해 고려에 투항, 진 하야시등 및 160 다른 사람이나 뒤를 쫓는다.
  • 935년, 발해국(= 후 발해)이 후당에 견사입공 한다.
  • 936년, 일찌기 타이코우현을 구축한 열만화가 남해부에서 압록부로 옮긴다.
  • 937년, 장백산의 분화, 후 발해국에 타격을 준다.
  • 938년, 열만화(재위 936년경-976년~979년경), 후 발해로부터 독립, 「정안국」을 건국한다.
  • 946-947해, 장백산의 분화(2번째), 후 발해국에 타격을 준다
  • 954년경?, 발해의 추호・최오사등 30명이 후주에 귀순.이 후, 발해의 명칭은 사료로부터 소멸해, 정안국에 의한 정권 계승을 했다.

후 발해에 관한 연구는, 동단국에 관한 발해인 사료나, 각지에 이주 당한 발해인에 관한 사료, 각지의 반란에 관한 사료, 「송사」에 보이는 정안국에 관한 발해인 사료 등, 다양한 사료를 종합 한 추정이며, 사료의 재구성의 방법에 의해 연구자의 견해가 달라, 상기는 그 개요를 집계한 것이다.

발해인의 반란의 기사만을 봐도, 다른 시기・다른 지역・다른 사정에 의하는 것을 모은 것이어, 각각을 별개의 것이라고 보는 편이 좋고, 후 발해의 사료로서 하나로 정리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구설로는, 발해 멸망 후에 발해의 사절이 중원 왕조에 파견되고 있기 때문에, 후 발해와 같은 계승 국가가 건국된 것이라고 추정되어 왔지만, 929년의 일본에의 사절 파견은 발해사가 아닌 것이 일본측 사료에 명기되어 또 새롭게 발견된 야률우지의 묘지에 의해, 사절은 동단국의 사자이며, 후 발해의 것으로 간주하는 추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가설이 주류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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