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5일 일요일

귤환(탱커)

귤환(탱커)

선 력
발주 코베 제강소 하리마 조선소
기공 1920년11월 24일
진수 1921년4월 5일
준공 1921년 6월 7일
상실 1944년10월 9일
성능 제원
총 톤수 6,539톤
적재 중량톤 9,345톤
수선간장 128.0m
전체 폭 16.5m
형심 10.1m
기관 3회연속성레시프로 기관1기 1축
출력 3,591마력
최대속력 14.4노트
동형선 구슬환, 천주환
출전 마츠이(1995년),10-11페이지.

귤환(타치바인 만)은, 일본에서 건조된 최초의 본격적인 민간 모치시유 탱커이다.스즈키상점에 의해 계획되어 1921년(타이쇼 10년)에 준공했다.

목차

건조의 경위

일본에 있어서의 탱커의 건조는, 1907년(메이지 40년)의 항해 탱커 「보물 쿠니마루」, 다음 해의 기주탱커 「토라마루」를 시작으로 시작되었다.이것들이 연안용의 소형선인 중, 아사노 물산은 대규모 정유 사업을 뜻해 대형 탱커 선대의 정비를 도모해, 1907년에는 국산 최초가 될 것이었던 대형 탱커 「노리히로환」을 기공했다.그러나, 아사노 물산의 사업 계획은, 일본 정부의 국내 유전 보호 정책을 위해서 좌절해, 「노리히로환」도 화객선으로 설계 변경되어 버린[1].

그 후, 해군 함정에의 석유 연료 기관 도입등에 의해, 일본에서의 석유 수요는 점차 성장했다.1916년에는 일본해군의 급유함으로서 「시지키」가 준공, 본격적인 민간 탱커 건조의 기운이 높아져 왔다.「노리히로환」도, 화재 사고를 기회로 당초 계획대로의 탱커에의 개장 공사가 개시되었다.

거기서, 제1차 세계 대전 후, 스즈키상점이 신조 탱커로서 계획한 것이 「귤환」형 3척이었다.스즈키상점은 만주콩기름의 수출용과 북미산 석유의 수입용으로서 외항 탱커의 정비를 기획했다.선주는 스즈키상점 계열의 테이코쿠 석유에서, 건조는 같이 스즈키상점 계열의 코베 제강소 하리마 조선소로 발주되었다.1920년(타이쇼 9년) 11월 24일에 기공된 본선은, 1921년 4월 5일에 진수 해 「귤환」이라고 명명, 6월 7일에 준공했다.본선은 일본의 근대 탱커의 전조라고 주목받아 그 건조는 하리마 조선소의 탱커 건조소로서의 명성의 출발점이 된[2].동형선으로서 「구슬환」과「천주환」의 건조가 계속 되었다.

설계

본선의 선체 배치는, 선미 기관형으로 선체 중앙앞가까이에 후나바시를 두는, 당시의 외항 탱커의 전형이었다.2개의 홀쪽한 마스트가, 후나바시를 끼우고 전 갑판과 후 갑판에 서있다.선체 내부의 구조는 최신의 잇샤웃드식을 채용해, 뱃머리꼬리 방향에 치우치는 세로통격벽등으로 강고하게 구성되어 있어 「노리히로환」보다 근대적인[2].

적하를 넣는 유조는 18구화로 나누어져 그 밖에 10구화의 서머 탱크(하기 탱크)를 가지고 있었다.서머 탱크와는 유조의 현측 상부(선체 횡단면에서 말하면 양어깨의 부분)를 단락지어 취하도록(듯이) 설치된 보조 탱크로, 물결의 난폭한 해역을 항행할 때 공하상태로 해 두는 것으로 액면을 작게 하는 것과 동시에 중심을 내려 배의 안정성을 높이는 기능이 있어, 날씨가 좋은 하기(서머)에는 보통 유조라고 해도 사용할 수 있었다.

운용

준공 후, 귤환은 예정 대로에 테이코쿠 석유의 소유선으로서 취항했다.1921년 6월 21 일출항의 첫 항해는 북미는 아니고 런던행에서, 왕로는 만주산의 콩기름을 수송, 귀로에 이란아바단에 들르고 석유를 쌓아 잡기[3], 11월에 토쿠야마 해군 연료창에 7300톤을 납입한[4].다음 해에는 합병에 의해 아사히 석유에 선주를 바꾸면서, 자매선과 함께 해군을 위한 비축등의 석유 수입에 활약했다.

1941년(쇼와 16년) 12월에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는 것도, 벌써 구식선이었던 본선은 군에 의한 징용은 받지 않고, 귀중한 민수용 탱커로서 사용되었다.일본이 점령한 동남아시아의 유전 지대로부터 석유 본토 수송(당시의 용어로 「송환」)이 개시되면 조속히 투입되어 1942년(쇼와 17년) 3월에 보르네오섬세리아 산유를 일본에 수송, 석유 송환 탱커 제일호가 된[5].동년 4월 24일에 기이반도 스사미 바다에서 미국 잠수함 「트라우트」의 뇌격을 받지만, 침몰은 면한[6].귤환은 수리를 받아 남방 자원 항로로 복귀, 합병에 의해 선주를 쇼와 석유, 한층 더 공동 기업, 일본 유조선과 전전하면서 항해를 계속했다.「귤환」의 최후는 일본의 패세 현저해진 1944년(쇼와 19년), 보르네오섬밀리 산유를 일본에 옮길 수 있도록, 르손섬산페르난드로부터 마타 28 선단에 가입해 고웅에 출항 후, 10월 9일 미명에 르손섬서방 북위 19도 33부동경 116도 38부□/□북위 19.550도 동경 116.633도□/ 19.550; 116.633 부근에서 미국 잠수함 「소 피쉬」의 뇌격을 받아 침몰한[7].

각주

참고 문헌

  • 코마미야 신시치로우 「전시 수송선단사」출판 협동사, 1987년.ISBN 4-87970-047-9
  • 마츠이 쿠니오 「일본・유조선 열전」나루야마당서점, 1995년.ISBN 4-425-31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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