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톨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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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르톨대성당, 서쪽 외관 「왕의 비구」 | |||
영명 | Chartres Cathedral | ||
불명 | Cathedrale de Chartres | ||
등록 구분 | 문화유산 | ||
등록 기준 | (1),(2),(4) | ||
등록년 | 1979년 | ||
비고 | 위치:북위 48도 26부 51초 동경 01도 29부 14초 | ||
공식 사이트 | 세계 유산 센터(영어) |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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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 방법・표시 |
샤르톨대성당(-매우 성당, 프랑스어명:Cathedrale Notre-Dame de Chartres)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로부터 대략 남서 87 km 정도 멀어진 도시 샤르톨에 위치해, 프랑스 국내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고딕 건축의 하나로 생각되고 있는 대성당.1979년에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있다.대성당은 카톨릭교회의 교회주, 샤르톨 교구를 둔다.
목차
대성당의 역사
로마네스크 양식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대성당의 건축이 시작된 것은 1145년이었지만, 1194년의 큰 화재로 마을 전체와 성당의 서쪽 전방 부분 이외가 구워 다하여졌기 때문에, 이 남은 부분만 초기 고딕 양식이 되었다.대성당 본체의 재건은 1194년부터 1220년간에 행해져 중세의 대성당으로서는 현저하게 단기간으로 완성으로 도달했다.당초, 토지 면적은 10,875 m□였다.
대성당의 건축은 최상급의 것으로, 그 높게 우뚝 서는 통로나 치밀한 조각을 보고 열정에 흘러넘치지 않는 건축 역사가는 대부분 없는 만큼이다.프랑스에 있어서의 모든 고딕 건축의 대성당에서 가장 훌륭한 가운데의 하나이니까, 상기의 찬사는 충분한 것이다.멀리서는 꾸불꾸불하는 밀밭 위를 배회하는 것처럼도 보여 서서히 가까워지면 거리가 대성당이 서는 언덕의 주위로 모이고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대조적인 두 개의 첨탑은, 한쪽이 1140년 이래 계속 서는 105 m의 검소한 각뿔과 113 m의 높이로 낡은 각뿔의 탑을 넘는 16 세기 초두의 후기 고딕・후란보와이안 양식(화염식)의 탑으로부터 완성되어, 밖을 비량의 복합동으로 둘러싸이는 중, 희미한 녹색의 지붕을 관통해 높게 우뚝 서 있다.
876년 이래대성당은, 전승으로는 성모 마리아의 것으로 여겨지는 「산크타・카미시아(Sancta Camisia, 성의)」라고 하는 튜닉을 소장하고 있다.이것은 십자군 이스라엘 원정의 사이, 컬 대제에 의해 대성당에의 선물로서 얻을 수 있던 성유물이라고 생각되고 있다.실제로는, 성유물이 샤를르 2세로부터의 선물이며, 그 천이 시리아에서 온 것으로 기원 1 세기대에 짜진 것이다고 주장되고 있다.몇백년의 사이, 샤르톨대성당은 성모 마리아 순례자들의 지극히 중요한 거점으로 여겨져 충실한 신자들은 오늘이 되어도 성의물을 칭송하기 위해 세계로부터 방문한다.
12 세기경, 교회는 본래 순례자를 위한 교회에서 만났다.성당의 주위로 행해진 젯날에는 많은 순례자가 참례하고 있어, 그것은 성모 마리아의 경축일과 동시에 열리기 위해였다.순례자가 이러한 행사에게 모이는 것은, 성모 마리아의 몸에 대고 있던 성의를 한번 보려고 하려는 의도도 물론 있었다.젯날을 하는 것은 성당의 정확히 외측에서, 성당에 곧 가까운 시일내에 교회의 관할하에 있던 가도나 광장에 늘어서 설치되었다.젯날안에는 「맑은 축일」, 「수태고지의 축제」, 「성모피승천제」, 「성모 마리아 탄생제」의 4개의 큰 성모 마리아의 축제가 있었다.이러한 젯날의 주된 평판이 좋은것은 역시 성모 마리아의 산크타・카미시아이며, 거리의 활기는 성의에 의지하고 있었다.
샤르톨대성당은 샤르톨의 거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조물이었다.일찌기 성당은 경제의 중심이며 가장 저명한 경계표지이며, 오늘도 시영의 건물에서 제공되는 모든 활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이루어 있다.중세에 있고, 대성당은 때에 북단측에서 직물, 연료・야채・육류를 남단측과 다른 바시리카의 입구에서 다른 품목을 파는 시장의 장소로서 기능하고 있었다.시간에는 성직자가 성당안에서 매매를 멈추게 하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쓸데 없게 끝나 있다.와인 매도는 지하 성당에서의 와인의 판매를 금지되었지만, 밖에서 팔면 부과되는 세금을 피해 교회의 신랑으로 거래를 하는 것이 허락되고 있었다.그러나 여러가지 직업의 노동자가 목수나 석공등의 일을 찾고 성당에 모여 오게 되어, 더욱은 음식조차 성당에서 파는 것이 용서되었다.또, 한 번 온 마을에 맥각 중독이 만연해 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적이 있어, 그 때 북측의 지하 성당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병원이 되었다.
현존 하는 샤르톨대성당에는 프랑스 고딕조의 걸작품이 쌓아 올려지고 있지만, 이것은 불로 이전부터 있던 조각품군이 소실했기 때문이다.( 「왕의 문」이라고 불리는 서정면의 외관의 조각군은 예외이다.)1020년에 대성당의 중요한 재산이 소실한 후(이것에 앞서, 다른 교회 부분도 연기로 소멸하고 있다), 거대한 지하 성당을 포함한 훌륭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바시리카가 퓨르베이르 주교(Bishop Fulbert), 그 다음에 죠후로와・드・레이브(Geoffroy de Leves)의 지휘하에서 건설되었다.그러나, 마을 전체를 다 구운 1134년의 큰 화재로 잔존한 후도, 1194년 6월 10일부터 11일 미명에 조명이 일으킨 불길이 또다시 성당을 덮쳐, 서쪽의 탑과 그것과 지하 성당의 사이에 있는 외관을 남길 뿐이 되어 버렸다.
이 불로 사람들은 성유물인 산크타・카미시아가 완전하게 소실한 것이라고 생각해, 절망했다.그런데 3일 후, 사제들이 불이 일어났을 때에 성의를 철제의 흘림문에 열쇠를 닫아 격납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어, 보물고로 무상인 채 발견되었다.그 후 로마 교황 특사인 피사의 메리오르추추기경은, 산크타・카미시아가 불을 넘은 것은 성모 마리아 자신으로부터의 하나의 사인이며, 더욱 말한다면 대성당은 샤르톨에 지어질만 하니까 지어졌던 것이라고 하는 신탁이기도 하면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 후의 재건에는 프랑스안으로부터 기부가 모여, 대성당의 조화를 취할 수 있던 외관을 보존하기 위해(때문에), 이름 미상의 건축가에 의해서 제안된 설계도를 이용해 거의 곧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이 건설 계획으로 꽤 흥미로운 것은, 8 km 멀어진 현지의 채석장으로부터, 거리의 사람들이 스스로 진행되어 필요한 돌을 옮기기 위해 모였다고 하는 사실이다.
작업은 교회의 신랑부분으로부터 착수해져 1220년경에는 주요했던 건물의 조립은 완료하고, 낡은 지하 성당과 같이 불을 살아남은 12 세기 중순의 위엄 있는 정문이, 신설된 건물에 집어 넣을 수 있었다.설계도는 위에서 봐 십자형의 건물에서, 128 m에 건너는 신랑과 남북으로 짧은 익랑이 있었다.동단에는 5개의 반원형의 채플이 방사상에 성장하는 회랑에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당초의 계획에 의해, 대성당의 비싼 부분에 대규모 대기벽을 다루도록 설계되어 이것들이 극도로 높게 우뚝 서, 프랑스에서 당시 가장 높았던 천정의 무게를 지지하고 있었다.성당에 더해진 새로운 교회 부분은 런에 있는 초기 고딕조의 대성당과 같이, 장방형의 스페이스에 4개의 크로스 빔의 보르트를 사용한 것이었다.이러한 복합의 창간벽으로부터 게다가 부를 넘고 대각선을 횡단하는 둥근천정의 리브까지의 지주의 골격 구조가, 상부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을 차단하지 않고 성당을 비싸게 유지하고 있었다.또 1260년 10월 24일, 대성당은 마침내 루이 9세왕가의 손에 건넜다.
내관은 외모의 기품으로부터마저도 예기 할 수 없는 만큼 경이적인 것이다.휑하니 넓은 신랑은 36 m의 높이를 자랑해, 니시하타에게서는 동쪽에 있는 아프스의 장엄한 돔이 완전하게 조망된다.극적으로 우뚝 솟는 원주군은 평탄한 토대에서 천정의 아치의 방향까지 향해, 사람들의 눈을 아프스의 장대한 클리어 파업 리에 이끈다.
화미를 다한 스테인드 글라스의 창에서는, 선명한 색채가 플로어로 비산한다.13 세기 초두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은 대부분이 16 세기의 종교전쟁으로의 손실을 면하고 있다.1753년의 「근대화」로 길을 잘못된 성직자에 의해서 작품의 일부는 가지고 사라져져 버렸지만, 대성당에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군은 세계의 중세 스테인드 글라스의 완전한 컬렉션의 일부를 차지한다고도 말해진다.이렇게 해 원래 있던 186 작품의 스테인드 글라스창중 152 작품이 남았다.이것들 스테인드 글라스창은 특히 그 선명한 푸른 색이 유명하고, 특히 성모 마리아와 그 아이를 묘사한 것이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그린 실락원, 노아의 상주가 유명하다.또 이것들 작품에는 유럽에서 최초의 손수레를 그린 것도 있다.제2차 세계대전중, 대부분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성당으로부터 옮겨져 독일군의 폭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주변의 지방 일대에 보관되었다.그 후 전쟁의 종결과 함께 창은 숨겨져 있던 장소로부터 꺼내져 다시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졌다.
프랑스의 왕녀 브란슈・드・카스티유에 기여된 북측의 익랑에 있는 장미를 그린 창과 같이, 몇의 스테인드 글라스창은 왕가가 바칠 수 있었다.또 창은 왕가에만 머물지 않고, 국왕이나 지방 영주, 그리고 상인등 모든 타입의 사람들의 손에 건넜다.긴 장방형의 런 세트창(첨두창)안에는, 푸른 배경으로 프랑스 왕가의 문장인 노란 백합의 문장(훌라・다・리 fleur de lys)이 그려진 것이나, 붉은 배경으로 황색 성이 나타난 것 등 왕실의 영향이 분명한 것도 있다.
도어나 베란다에는 검을 잡는 상이나 십자가, 책이나 장사 도구등을 나타낸 중세의 조각을 늘어놓을 수 있어 조각의 표현은 오늘이라도 700년전에 처음으로 조각해졌을 때와 어떤 변함없지는 송곳과 나타나고 있다.서쪽의 외관에 있는 조각은 그리스도의 천국에의 승천, 그의 생애・성인・사도로부터의 에피소드, 더욱 성모 마리아의 무릎 바탕으로 안을 수 있는 그리스도 등 종교 마토바면을 그린 것이다.그것들 종교적 조각아래에는, 이 서쪽의 입구가 「왕의 비구」로서 알려져 있는 것부터, 국왕이나 왕비의 조각군이 세우고 있다.이러한 조각은 구약 성서의 인물에 근거한 것인 한편, 만들어진 시점에서 실재하고 있던 왕이나 왕비를 그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왕족을 나타낸 상이 종교적 조상 보다 약간 아래의 위치에 설치되고 있지만, 이것은 아직도 왕과 신과의 사이에 있는 관계를 밀접하게 어떤 말에 특별한 뜻을 가지게 하는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또 조각은 왕족의 권위나 왕족들이 그리스도에 관련하는 인물과 가까운 것을도 나타내 보이고 있어 조상이 신에 의해서 명할 수 있어 그 자리소에 놓여진 것 같은 인상을 준다.더해 이 왕의 비구의 우측의 아키보르트에 모습을 나타내는 7명의 문예인의 조각은, 샤르톨에 있는 학교를 나타내고 있다.
샤르톨대성당은 프랑스 혁명기에 파괴 또는 약탈을 당했던 적이 없고, 많이 행해져 온 수복도 그 화려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바꾸어 버릴 것은 없었다.대성당은 어느시대도 불변인 채여, 고딕 예술의 승리라고도 말할 수 있자.
1979년, 대성당은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에 등록되었다.
또 중세로는 대성당이 중요한 성당 학교라고 해도 기능하고 있었다.컬 대제가 9 세기에 프랑스 시민을 위해서 교육의 시스템 도입을 요구했지만, 학교를 신설하는 것이 곤란하고 경비도 든 때문, 이미 존재하고 있던 설비를 이용하는 것이 간단했기 때문에 있다.그 때문에 대제는 대성당과 수도원 쌍방으로 학교의 정비를 명했다.이 성당 학교는 교육의 중심이 되는 장소로서 결과적으로 수도원 학교로 계승해졌다.11 세기에는 교육 시스템이 샤르톨 주교와 같은 대성당의 성직자들에 의해서 통제되어 성당 자체가 학교를 상징하게 되었다.많은 프랑스의 성당 학교는 전공을 두어, 샤르톨대성당은 논리학(정확하게는 자유 학예 septem artes liberales의 유교의 4학과목 quadrivium, 즉 산술 arithmetica, 기하학 geometrica, 음악 musica, 천문학 astronomia)의 연구로 유명하게 되었다.(이 통칭, 「샤르톨 학파」라고 불리는, 헨리-・아담스가 주창한 설에는 현재의 연구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이 샤르톨대성당이 교수 한 새로운 논리학은, 파리보다 꽤 진행되고 있으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평가되었다.샤르톨대성당에서 교육을 받은 인물의 한 명에게는 영국의 철학자 및 작가인 소르즈베리의 존(John of Salisbury)이 내려 후에 샤르톨대성당의 주교가 되었다.
개요
세계 유산
등록 기준
이 세계 유산은 세계 유산 등록 기준에 있어서의 이하의 기준을 만족 시켰다고 보여지고 등록이 이루어졌다(이하의 기준은 세계 유산 센터 공표의 등록 기준으로부터의 번역, 인용이다).
- (1) 인류의 창조적 재능을 표현하는 걸작.
- (2) 어느 기간을 통해서 또는 있는 문화권에 있고, 건축, 기술, 기념비적 예술, 도시계획, 경관 디자인의 발전에 관해, 인류의 가치의 중요한 교류를 나타내는 것.
- (4) 인류의 역사상 중요한 시대를 예증 하는 건축 양식, 건축물군, 기술의 집적 또는 경관이 뛰어난 예.
참고 문헌
- 헨리-・아담스 「Mont-Saint-Michel and Chartres」1913년(국역 있어)
- 이브・드라포르트 「Les vitraux de la cathedrale de Chartres: histoire et description par l'abbeY. Delaporte ... reproductions parE. Houvet」1926년(3권)
- 에티엔・우베 「Cathedrale de Chartres」1919년(5권)
- 에티엔・우베 「An Illustrated Monograph of Chartres Cathedral: (Being an Extract of a Work Crowned by Academie des Beaux-Arts)」1930년
- 소니야・우르리케・크루크 「Kathedrale des Kosmos. Die heilige Geometrie von Chartres」2001년
- 에밀・마르 「Notre-Dame de Chartres」1983년(초판은 1948년)
- 데이비드・마코리 「Cathedral: The Story of Its Construction」
일본어 문헌
- 마 삼종부 「샤르톨대성당-고딕 미술에의 권해」야사카 서점 2000년
- 키마타원일 「샤르톨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중앙공론 미술 출판 2003년」
관련 항목
외부 링크
- 샤르톨대성당-사진・비디오 등(프랑스어)
- 피트・포토・컬렉션-웹 사진집(영어)
- 샤르톨 교구-대성당의 역사 등(프랑스어)
- 존 제임스. com -샤르톨대성당의 역사(영어)
- 마이 미로. de -기술상의 데이터(영어)
- 마스다 건축 연구소 홈 페이지-사진 등(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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