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덴코・벨데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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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
본명 | Zdenko Verdenik | |||||
라틴 문자 | Zdenko Verdenik | |||||
슬로베니아어 | Zdenko Verdenik | |||||
기본 정보 | ||||||
국적 | 슬로베니아 | |||||
생년월일 | 1949년5월 2일(67세)[1] | |||||
출신지 | 유고슬라비아 슬로베니아 슈타이에르스카 지방 프트이 | |||||
선수 정보 | ||||||
포지션 | FW( 오른쪽 윙[2]) | |||||
감독력 | ||||||
당항목 참조 | ||||||
■템플릿(■노트 ■해설)■축구 선수 pj |
즈덴코・벨데닉(슬로베니아어: Zdenko Verdenik, 1949년 5월 2일- )은, 슬로베니아 출신의 축구 지도자.
목차
와 력
부모님 모두 교사라고 하는 가정에서 태어나는[3].류브랴나 대학에서는 체육학을 전공[2][4].3부의 소보다라고 하는 클럽에서 플레이하면서 대학생활을 보내[2], 1972년에 류브랴나 대학의 지도자 육성 코스를 졸업[5].1972년부터는 유고슬라비아 2부 리그에 소속해 있던 NK제레즈니체르・마리볼로 플레이한[6].
근시 때문에 선수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었을 무렵, 대학시절의 교수였던 블랑코・엘 모래-에 이끌려 그아래에서 어시스턴트를 맡게 되는[4][2].또, 대학에서의 연구와 병행하고, 3부 리그의 ND스로바로는 선수켄 감독을 의무[2], 28세에 선수를 은퇴한[2].1970년대 후반에는 독일 체육 대학 쾰른에서 후스바르레아라(최상위의 지도자 라이센스) 코스를 수료[7].류브랴나 대학에서 강사를 하면서, 유고슬라비아 2부 리그의 클럽에서 지휘를 맡은[8].1981년에 자그레브 대학 석사과정 수료[5], 1985년에 류브랴나 대학 박사 과정 수료[5].
독일 시대에 알게 된 우바가이 히데타카가 감독을 맡는 호쿠세쓰 축국단(오사카 체육 대학 축구부의 2군팀)의 합숙에 특별 코치로서 초대되어 후에 「존 프레스」의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는 전술을 지도한[9].팀은 벨데닉이 남긴 비디오 테잎을 참고로 하고 좋은 성적을 남겨[9], 오사카부 사회인 리그로부터 칸사이 축구 리그에 승격[9], 1991년의 전국 지역 축구 리그 결승 대회에서 2위가 된[9].
우바가이의 소개에 의해서, 전 일본 항공(1992년에 요코하마 후류겔스로 개칭)의 감독 취임을 앞에 두고 있던 가모슈와 만나, 1991년부터 그아래에서 코치를 맡는[2][9].요코하마 F로는 벨데닉과 카모에 의한 대화 중(안)에서, 앗리고・삭키가 감독을 맡는 AC밀란의 프레싱 전술(존 프레스)을 참고로 하는 것이 정해진[3][8].
1993년의 1 st스테이지 종료후, 벨데닉은 요코하마 F를 탈퇴하고, 슬로베니아 대표 감독으로 취임한[3].UEFA EURO '96 예선으로는, 초전에서 이탈리아에1-1로 갈라 놓은[10]것의, 최종적으로는 3승 2무 5패로 예선 패퇴[10].1998 FIFA 월드컵・유럽 예선에서도 패퇴해, 대표 감독으로부터 물러난[10].
1998년 5월에 오스트리아・분데스리가의 FK아우스트리아・빈의 감독으로 취임했다.유고슬라비아외에서는 완전히 무명인 벨데닉이, 오스트리아・분데스리가의 명문 클럽의 감독으로 취임한 것은 많은 관계자를 놀래켰지만, 이 감독 취임의 뒤에는, 당시 FK아우스트리아・빈의 스포츠 디렉터를 맡고 있던 원감바 오사카의 흘리드릿히・콘시리아의 강한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요점 출전]그러나, 다대한 강화 예산이 주어져 많은 대표 선수를 획득했지만, 팀의 성적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11개월 후에는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었다.
2000년 8월, 잔류 분쟁의 한창에 있던 J리그 디비전 1의 제프유나이티드 이치하라 감독으로 취임[11].2 nd시즌 도중부터의 취임이었지만, 격하권으로부터 1개상의 연간 종합 14위로 팀을 잔류시킨[11].2001년은 개막전에는 「8~10정도」를 목표로 해 내걸고 있던[11]것의, 실제로는 1 st스테이지 2위, 2 nd스테이지 5위라고 하는 좋은 성적을 남겼다.
이 실적으로부터 2002년은 이치하라와의 계약이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치하라의 배액 이상으로 보여지는 연봉과 복수년 계약을 제시한 나고야 그란퍼스에이트에 뽑아 내지는[12][13].나고야에서는 2002년 1 st스테이지에서 3위가 되었지만, 2 nd스테이지에서는 13위로 침체했다.다음 2003년의 1 st스테이지에서는 제13절까지 무패 기록을 갱신해[12], 그 시기에는 컵전에서도 패배 없음이었던[12].그러나 무승부의 시합이 많아, 최종적으로 1 st스테이지에서 7위에 끝나, 최종절 종료후에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해임이 발표된[12].나고야의 팀 운영 본부장 오가와 코지는 해임 이유에 대해 「이기지 못한다」일이라고 대답한[12].한편 벨데닉은, 「팀의 베스트 플레이어로, 필요한 선수」[12]로 생각하고 있던 FW이비트・바스티치와의 계약 연장을 클럽에 요구했지만 들어줄 수 없었다고 말하는[12].그는 「내가 필요계속 이라고 말한 선수를, 클럽은 잘랐다.클럽은 나를 신용하고 있지 않는, 그 분위기가 선수에게도 전파 해, 선수들의 나에게의 신뢰감도 요동해 갔다」[12]「바스티치를 세우고 있으면, 우승할 수 있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8]으로 되돌아 본다.
2003년 9월부터 2005년까지의 2년 계약으로 베가르타 센다이의 감독을 맡았지만, 성적 부진을 이유로 2004년도 시즌 종료를 가지고 해임되었다.해임 후는 슬로베니아의 류브류나 대학에서 교수를 맡면서, 신문이나 잡지등에서 해설자로서 활동해, 축구 클리닉등의 활동으로 자주 일본을 방문했다.또, 2009년부터 1년간 슬로베니아 대표 팀 디렉터를 맡았다.
2010년 7월부터 슬로베니아 2부 리그에 소속하는 NK인텔 블록・류브랴나의 감독으로 취임해, 2위가 되었지만 팀이 승격을 거부한 것등에서 탈퇴.그 다음은 슬로베니아 축구 협회에서 스포츠 디렉터를 맡았다.
2012년 6월, 오오미야 알디쟈의 감독으로 취임[1].8년만의 일본 복귀가 되었다.취임 후는 제24절로부터 최종절까지 11 시합 연속 무패를 기록하는 등, 취임 시점에서 15위에 침체하고 있던 오미야의 J1잔류를 완수했다.2013년은 개막전으로부터 제10절까지 무패, 전년부터 세어 21 시합 연속 무패의 J1신기록을 수립한[14].그 후, 제16절로부터 제20절까지 5 연패를 당하면, 제20절의 다음날의 8월 11일에 감독이 해임된[15].
지도력
- 1979년- 1980년, 1980년-1981년 NK르드르・트르두리에
- 1985년- 1987년 NK올림피아・류브랴나[1]
- 1991년- 1993년 요코하마 후류겔스 코치[1]
- 1993년- 1994년 올림픽 슬로베니아 대표 감독[1]
- 1994년- 1997년 슬로베니아 대표 감독[1]
- 1998년- 1999년 FK아우스트리아・빈 감독[1]
- 2000년 8월- 2001년 제프유나이티드 이치하라 감독[1]
- 2002년- 2003년 8월 나고야 그란퍼스에이트 감독[1]
- 2003년 9월- 2004년 11월 베가르타 센다이 감독[1]
- 2009년- 2010년 6월 슬로베니아 대표 팀 디렉터[1]
- 2010년 7월- 2011년 6월 NK인텔 블록・류브랴나 감독[1]
- 2011년 6월- 2012년 6월 슬로베니아 축구 협회 스포츠 디렉터[1]
- 2012년 6월- 2013년 8월 오오미야 알디쟈 감독[1]
감독 성적
이 마디는 그 주제가 일본에 놓여진 기술이 되어 있어, 세계적 관점으로부터의 설명이 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노트로의 논의와 기사의 발전에의 협력을 부탁합니다.(2012년 7월) |
연도 | 소속 리그 | 대회명 | 시합수 | 승 | 분 | 패 | 승점 | 순위 | 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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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J1 | 2nd | 15 | 3 | 1 | 11 | 9 | 16위 | 제프유나이티드 이치하라 |
2001 | 1st | 15 | 10 | 0 | 5 | 27 | 2위 | ||
2nd | 15 | 7 | 2 | 6 | 23 | 5위 | |||
2002 | 1st | 15 | 10 | 0 | 5 | 27 | 3위 | 나고야 그란퍼스에이트 | |
2nd | 15 | 5 | 1 | 9 | 16 | 13위 | |||
2003 | 1st | 15 | 5 | 8 | 2 | 23 | 7위 | ||
2nd | 15 | 2 | 6 | 7 | 12 | 15위 | 베가르타 센다이 | ||
2004 | J2 | - | 44 | 15 | 14 | 15 | 59 | 6위 | |
2012 | J1 | - | 21 | 7 | 8 | 6 | 29 | 13위 | 오오미야 알디쟈 |
2013 | - | 20 | 11 | 3 | 6 | 36 | 4위 |
- 2012년은 제14절로부터 지휘.
- 2013년은 제20절 종료후에 도중 퇴임.
평가
- 일본에 「존 프레스」라고 하는 개념을 반입한 것은 그라고 말해지고 있어 본인도 그것을 거의 인정하고 있다(벨데닉에 의하면, 당시 요코하마 후류겔스에 재적하고 있던 에두・마란곤이 토리노・카르쵸로 플레이한 경험이 있어, 그도 존 프레스의 개념을 잘 알고 있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존 프레스」는 J리그 개막 전후의 요코하마 후류겔스의 기본 전술이었다.당시의 요코하마 후류겔스 감독은 가모슈였지만, 그를 야유할 때에 이 고사가 인용되는 일이 있다(예:「중요한 감독이 존 프레스를 이해하지 않았다」).[요점 출전]
- 슬로베니아 대표 팀은 벨데닉 퇴임 후의 UEFA EURO 2000에 출장, 2002 FIFA 월드컵에도 출장을 완수했다.구유고슬라비아 제국 중(안)에서도 축구가 번성하지 않은 슬로베니아의 약진은 주위의 놀라움을 샀지만, 그 전술의 기초를 벨데닉 시대에 요구하는 논의는 많다.[요점 출전]
- DF의 기본은 3 백이다.일본에서는, 오미야이외 인솔한 모든 팀에서 3 백의 포진을 당겼다.그 중에서도 아센・벤겔 이래의 4 백을 계속 지켜 온 나고야에 있어서는, 이 변경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나고야의 감독 시대에, 텔레비전의 취재로 왜 자신이 3 백으로 싸우는지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던 적도 있다.
- 일본에서 인솔한 이치하라, 나고야, 센다이, 그리고 오미야에서도 최종적으로는 「해임」이라고 하는 형태로 팀을 떠나 있다.나고야, 센다이에서는 성적 부진이 그 이유이지만, 이치하라로는 나고야에의 전격적인 이적(후술)이, 팀의 방향성을 현저하게 유린했다고 해서 해임되었다.그 때문에 나고야나 센다이에서는 벨데닉 해임에 대해서 적지 않은 프런트에의 비판이 있었지만, 이치하라로는 프런트에의 비판은 전혀 없었다.
- 이치하라로부터 나고야에 옮길 때, 선수의 계약으로는 타팀의 접촉이 금지되고 있는 1월 이전에 나고야로부터의 접촉이 있었다.이 시점에서는 감독의 이적에 대해 J리그내에서의 결정이 없었기 때문에, 도의적 책임 이외에 벨데닉의 행동은 비난 할 수 없지만, 그 후 감독의 이적에 대해서도, 선수의 이적에 준하는 결정이 이루어져 이치하라와 나고야의 사이에 많이 유한이 남았다.[요점 출전]
- 후에 이치하라의 감독으로 취임한 이비체・오심과는 구면의 사이에서, 일본에 오고 나서도 항상 연락을 하고 있었다.오심의 회상에 의하면 이치하라와의 첫 접촉은, 벨데닉으로부터 오심의 전화 번호를 배운 우바가이 히데타카GM로부터의 전화였다고 한다.또, 우바가이가 오사카 체육 대학의 코치였던 시대에, 벨데닉을 물었을 때에 오심을 소개되어 연습을 견학하고 있었다.
에피소드
- 센다이 감독이 해임되었을 때, 위약금으로서 연봉의85%에 해당하는 9700만엔을 받았다.이것은 공표되고 있던 연봉을 크게 웃도는 금액이며, 센다이의 2005년도의 흑자액을 큰폭으로 줄이게 되었다.이것 이전에 나고야가 해임되었을 때에도 이것과 거의 동액의 연봉과 위약금을 받았다고 여겨지고 있다.센다이 감독 해임 후, 벨데닉이 오퍼가 있기에도 관계없이 오랫동안 현장 복귀하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수입이 있었기 때문에라고 하고 있다.[요점 출전]
- 수창삼 정말로 밤과 동일본 대지진때에 벨데닉은 재빨리 개인으로 의연금을 보내고 있었다고 하는[16].
각주
- ^ a b c d e f g h i j k l m n"감독 취임의 소식"(프레스 릴리스), 오오미야 알디쟈, (2012년 6월 14일), 2014년 1월 18일 열람.
- ^ a b c d e f g "20전 무패 「오미야 레버러토리 」전술론 벨데닉 감독에게 (듣)묻는다". 중일 스포츠(2013년 5월 6일). 2013년 5월 6 일시점의 오리지날[링크 조각]보다 어카이브.2014년 12월 4일 열람.
- ^ a b c 카베 2001, p. 97.
- ^ a b 카베 2001, p. 98.
- ^ a b c 「주간 축구 매거진」No. 852 2002년 2월 13일,18-19페이지
- ^"즈덴코・벨데닉씨의 감독 취임 내정(2000.08. 11)". 제프유나이티드 이치하라(2013년 5월 6일). 2004년 8월 3 일시점의 오리지날[링크 조각]보다 어카이브.2014년 12월 4일 열람.
- ^카베 2001, p. 95.
- ^ a b c 「주간 축구 매거진」No. 985 2004년 8월 10일호, 46 페이지.
- ^ a b c d e 카베 2001, p. 96.
- ^ a b c 카베 2001, p. 100.
- ^ a b c 카베 2001, p. 101.
- ^ a b c d e f g h 「주간 축구 매거진」No. 935 2003년 8월 19일호,40-41페이지.
- ^「주간 축구 매거진」No. 846 2001년 12월 26일호, 29 페이지.
- ^오미야의 무패 기록이 21 시합으로 스톱…마지막에 진 센다이에 다시 패배-축구 킹
- ^"감독 교대의 소식"(프레스 릴리스), 오오미야 알디쟈, (2013년 8월 11일), 2013년 8월 11일 열람.
- ^【J1:제23절 오미야vs센다이】수창 모리 마코토 감독(센다이) 기자 회견 코멘트(12.08. 25)
참고 문헌
- 카베, 구 「Far East Connection해를 넘어 온 풋 볼러 제 7회 즈덴코・벨데닉 「축구 감독과 인간성과의 관계에 대해」」 「축구 비평」issue 12, 후타바사, 2001년,95-103페이지.
- 카모, 슈 「모던 축구에의 도전」코단샤, 1997년.ISBN 978-4062635134。
- "즈덴코・벨데닉씨의 감독 취임 내정(2000.08. 11)". 제프유나이티드 이치하라(2013년 5월 6일). 2004년 8월 3 일시점의 오리지날[링크 조각]보다 어카이브.2014년 12월 4일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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