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11일 토요일

쿠네르스드르후의 싸움

쿠네르스드르후의 싸움

쿠네르스드르후의 싸움
Kunersdorff.jpg
전쟁7년전쟁
연월일1759년 8월 12일
장소크네르스드르후, 브랑 덴 부루크 선제후령
결과: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의 결정적 승리
교전 세력
Flag of Russia.svg러시아
오스트리아 제국의 기오스트리아 대공국
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750-1801).svgPruisen
지도자・지휘관
Flag of Russia.svg피여틀・사르티코후
Flag of the Habsburg Monarchy.svg에른스트・기데온・폰・라우돈
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750-1801).svg프리드리히 대왕
전력
71,500 49,000
손해
사상 16,512 사상 18,969, 집전사 6,000[1]

쿠네르스드르후의 싸움(독일어:Schlacht bei Kunersdorf)은, 7년전쟁중의 싸움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있어서 가장 괴멸적인 패배이다.1759년의 8월 12일, 프랑크푸르트・안・데아・오더의 동쪽에 위치하는 크네르스드르후에 대하고, 4만 9000의 Pruisen군이 7만 1000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연합군을 앞에 두고 패배했다.

목차

배경

컬・하인리히・폰・베델(de:Carl Heinrich von Wedel) 소장 지휘하의 군단이 조개의 싸움(Battle of Kay)으로 패배한 후, 1759년 8월에 오스트리아의 1군이 Pruisen 왕국의 핵심 지대, 베를린=브랑 덴 부루크를 위협할 수 있도록 프랑크푸르트・안・데아・오더로 러시아군과 합류를 완수했다. 이 연합군은 에른스트・기데온・폰・라우돈 소장피여틀・세묘노비치・사르티코후(Pyotr Saltykov) 원수에 이끌려 7만 1000명(집러시아군(Imperial Russian Army)은 4만 1000명)을 세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베델의 부대를 합류시키면, 지휘하의 약 4만 9000명을 가지고, 오 델강의 우안에 있는 연합군의, 방비를 굳힌 진지로 향해 결전을 기도 한다.

전투

전투는 Pruisen군에 의한 러시아 군영지에의 공격으로부터 시작되었다.이 공격은 성공해, 만약 프리드리히 대왕이 남동생 하인리히공의 조언을 (듣)묻고 전진을 멈추어 두면, 크네르스드르후의 싸움을 억제한 것은 Pruisen군의 괄이었다. 그러나 사행 전술(Oblique order)을 적용하기 위한 우회 행동은 실패해, Pruisen군의 공격은 연합군의 전열에 저지되었다.하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당초의 성공을 살릴 수 있다고 믿어 전투의 속행을 결의했다.Pruisen군의 공격이 약해지고 있는 동안에, 아득히 먼 곳에 있던 오스트리아군기병도 전장에 도착했다.그러나 Pruisen군은 재편해, 연합군에 대해서 압력을 계속 더했다. 정오 지나는 전투도 최고조에 이르러, 러시아군중앙의 포병 진지에 대해서 자이트릿트 인솔하는 Pruisen 기병의 대규모 돌격을 했다.이 돌격은 실패해, Pruisen 기병은 현저하게 소모한 후에 혼란한 퇴각을 강요당했다.자이트릿트 자신도 심한 중상을 입었다.연합군의 기병 부대(오스트리아 기병을 주체로 해, 러시아의 중기병, 카룸이크 기병, 크로아티아 기병도 포함된다)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Pruisen군좌익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그것은 결정적인 효과를 들어 피폐 한 Pruisen군 각 연대의 무질서한 퇴각에 연결된다.프리드리히 대왕이 전장으로부터 물러나 왔을 때에는, 주위에 3,000명이 남을 뿐에서 만났다.

 
쿠네르스드르후의 싸워에 있어서의 프리드리히 2세, 리햐르트・쿠네이텔(de:Richard Knotel) 작의 석판화.후대의 작품.
 
쿠네르스드르후의 전장에서 말을 타는 라우돈. (빈 군사사 박물관 소장의, 후대의 작품.)

여파

이 패배에 직면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실의에 빠져, 핀크(Friedrich August von Finck) 중장에게 군의 지휘권을 맡겨 하인리히공을 총사령관에게 임명했다. 전투에 진 밤, 프리드리히 대왕은 베를린으로 향해서 이와 같은 편지를 보내고 있다:

오늘 아침의 11시, 나는 적군에게 공격을 걸었다.…(중략)…나의 병사들은 놀랄 만한 기능을 해 보였지만, 그 대상은 너무 컸다.우리 군사는 혼란해 버리고 있었다.나는 3도나 그들을 재편했다.마지막에는 나는 포박의 위험에 노출되어 도주 할 수 밖에 없었다.총탄이 나의 윗도리를 빼앗아 나의 2마리의 말은 사살되어 버렸다.내가 살아 남은 것은 불운하고 밖에 없다…(중략)…우리의 패배는 심대이다.48,000명의 쳐 머문 것은 단 3000명에 지나지 않는다.이렇게 해 내가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모두는 잇달아 도망쳐 간다.나는 이미 이 육군의 사령관은 아니다.베를린의 모두의 안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좋은 활동이다…(중략)…내가 죽어 가는 것은 비참한 실태다.싸움의 결과는 전투 그 자체보다 한층 더 나빠질 것이다.나에게 더 이상의 수단은 없고, 그리고 정직하게 말하고, 모두는 없어졌던 것이라고 생각한다.나는 살아 조국의 멸망을 보고 싶지는 않다.안녕히 가세요, 영원히!

4일 후, 연합군이 무위에 때를 보내고 있는 것이 밝혀져, 1만 9000의 패잔병이 라이트바인(Reitwein)에 있는 자신의 사령부에 복귀해 오면, 프리드리히 대왕은 지금까지 어떤 결과도 낳지 않았던 상기의 시책을 철회한다.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은 1만 5000의 손해를 받았지만 승리한 후, 베를린에의 길은 열리고 있었다.그러나 쌍방의 불화는, 승리의 전략적인 이용을 허락하지 않았다.남동생 하인리히공에 충당한 1759년 9월 1일의 편지로, 프리드리히 대왕은 연합군의 자크센 방면을 목표로 한, 놀랄 만한 철퇴에 대해 쓰고 있다.

나는 너에게, 브랑 덴 부루크가의 기적을 보고합니다.

그 사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3만 3000의 병력을 모으면 퓨르스텐바르데로 방위선을 깔았다.이것에 의해서 7년전쟁에 있어서의 Pruisen군최대의 패배도, 전쟁의 경과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었다.

여담

프리드리히 대왕은 싸움의 사이에 2회, 승마가 사살되었다.그 때, 적탄이 담배 넣어에 해당되어 튀어올라, 후대의 이야깃거리가 되는[2]. 그는 단신으로 작은 언덕 위에 서, 자신의 검을 지면에 찌르고, 자신을 포위하는 적병에 대해서 철저 항전 하는지, 혹은 죽는 일을 각오하고 있었다.이 때, 기병 대위(de:Rittmeister),아힘・베른할트・폰・프릿트비트(de:Joachim Bernhard von Prittwitz)의 대담한 행동이 없으면, 왕은 포박의 위기를 면할 수 없는 곳에서 만났다. 전몰자중에는 게오르크・르트비히・폰・풋 카마-(de:Georg Ludwig von Puttkamer) 기병 대장이나 시인의 에이바르트・크리스티앙・폰・크라이 파업 소좌(Ewald Christian von Kleist)가 포함되어 있다.

개별의 전거

  1. ^ Christopher Clark: Preussen - Aufstieg und Niedergang 1600 - 1947, Phanteon Verlag, 1. Auflage, 2008, S. 244
  2. ^ Friedrich Benninghofen, Helmut Borsch-Supan, Iselin Gundermann: Friedrich der Grosse. Ausstellung des Geheimen Staatsarchivs Preussischer Kulturbesitz anlasslich des 200. Todestages Konig Friedrichs II. von Preussen, Berlin 1986, Kat. Nr. IV, 52f, Abbildung S. 206


영문판의 출전

  • Kungliga artilleriet: Det ridande artilleriet (1987) editor: Jonas Hedberg (영어의 요약) ISBN 91-85266-39-6
  • Die Deutschen Folgen 6- Friedrich II und die Kaiserin, ZDF 2009

http://www.diedeutschen.zdf.de/

독일어판의 출전

  • Johannes Burkhardt: Vom Debakel zum Mirakel. Zur friedensgeschichtlichen Einordnung des Siebenjahrigen Krieges, in: Menschen und Strukturen in der Geschichte Alteuropas. Festschrift fur Johannes Kunisch zur Vollendung seines 65. Lebensjahres, dargebracht von Schulern, Freunden und Kollegen, hg.v. Helmut Neuhaus / Barbara Stollberg-Rilinger (Historische Forschungen, Bd. 73), Duncker & Humblot, Berlin 2002, S. 299-318
  • Grosser Generalstab, Kriegsgeschichtliche Abteilung II. (Hrsg.): Die Kriege Friedrichs des Grossen. Dritter Teil: Der Siebenjahrige Krieg 1756-1763. Band 10: Kunersdorf. Mittler, Berlin 1912.
  • Johann Ludwig Kriele: Ausfuhrliche und zuverlassige historisch-militaerische Beschreibung der Schlacht von Kunersdorf und Frankfurt am 12. Aug. 1759. Mit beigefuegtem genauen Situations-Plane nebst verschiedenen Nachrichten der Schicksale Frankfurts und der umliegenden Gegend in damaliger Zeit. Maurer, Berlin 1801, (Auch Nachdruck: Rieger, Karwe bei Neuruppin 2003).
  • Johannes Kunisch: Das Mirakel des Hauses Brandenburg. Studien zum Verhaltnis von Kabinettspolitik und Kriegfuhrung im Zeitalter des Siebenjahrigen Krieges, R. Oldenbourg Verlag, Munchen / Wien 1978 (154 Seiten)
  • Jurgen Sternberger: Das Mirakel von Brandenburg. Pro BUSINESS Verlag, Berlin 2009, ISBN 978-3-86805-413-2.

(모두 본항목의 가필에 대하고, 편집자가 열람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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