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26일 화요일

후쿠시마 제일 원자력 발전소 2호기의 건설

후쿠시마 제일 원자력 발전소 2호기의 건설

후쿠시마 제일 원자력 발전소 2호기의 건설(닦고 마 매우 한원자력은 개로 실마리에 호탕의 건설)로는, 도쿄 전력 후쿠시마 제일 원자력 발전소에서 건설된 원자력 발전 플랜트중, 2호기의 건설사에 대해 말한다.2호기의 형식은 제너럴・일렉트릭(GE) 사의 개발한 비등수형 원자로로 분류되는 BWR-4, 원자로 격납 용기는 MarkI이다.

선정

1966년

「전력」1966년 11월 임시 증간호로의 타나카 나오지로우의 발언에 의하면, 1965년부터 1966년에 통산성에 대해서 제출한 시설 계획으로는, 2호기는 출력 60만 kW[1]으로, 공통 시설인 항만, 취수 설비비를 안분해 발전 원가저감에 이바지하는 것을 고려해, 4호기까지 본발전소에 설치를 검토하고 있던[2].다만 타나카는 50 Hz의 기종으로서는 60만 kW정도의 것이 당시 메이커 각사의 라인 업에 없었던 일, 2호기 이후의 로형을 PWR, BWR의 어느 쪽으로 할까는 백지인 일, 영국 연방・에디슨(en) 사가 발주한 BWR가 80만 kW인 것을 근거로 해 「60만 kW로는 작은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향후의 국산화를 생각해 갈 뿐만 아니라는 다음 단계의 2호기의 용량을 신중하게 결정해 가지 않으면 되지 않는이라고 생각합니다. 1호기는 어느 정도 연습의 의미도 상당히 있는 것입니다만, 2호기가 되어 지면 향후 몇대나 50 사이클의 영역에서 사용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즉 기종을 너무 바꾸면, 국산화가 어렵다」라고 말하고 있는[3].

1967년 1월

1967년 1월, GE가 수주량의 급증으로부터 500, 750, 1000 MW의 3 타입의 표준 용량의 노를 발표했던 것이 보도되었다.이른바 1967년형으로 불리는 타입이며, 후에 BWR-4로 개칭된 타입인[4][5].

한편, 통산성은 국산화 추진의 외, 당시부터 회사간련계에 의한 전력융통을 활용한 광역 운영도 추진하고 있어 전력 각사에 압력을 더하고 있었다.「전기 산업 신문」에 의하면, 통산성은 전력 9사에서 조직 하는 중앙 전력 협의회(덧붙여 이 해의 회장은 도쿄 전력이었다)가 1967년 1월 25일 발표한 1975년도까지의 10년 계획에 광역 운영의 철저가 불충분으로서 강한 불만을 나타내, 다음과 같은 재검토의 요망을 내고 있었다.[6]

  1.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은, 용지가 국한 되는 점이 강한 곳으로부터도 각사의 공급 지역을 넘은 적지 집중 개발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2. 원자력 발전에 있어서는 대형화에 의한 이익이 큰 점을 감안해 공동 개발이나 윤번 방식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1967년의 츄우덴협의 계획으로는 도쿄 전력은 원자력 발전 개발분을 합계 220만 kW로 하고 있어, 이것은 당시의 후쿠시마 원자력 지점에서의 계획 규모(1호기 40만 kW,2-4호기 각 60만 kW)에 상당하고 있던[7].후술 하도록(듯이), 통산성은 1967년 5월에 독자적인 개발 계획안을 제시하게 된다.

1967년 4월

1967년 4월 17일, 토시바, 미츠비시, 히타치 메이커 수뇌는 일본 전기 공업회를 통해 통산성 중공업국의 타카이 전기 통신 과장과 회담해, 통산 측에서의 질문에 「출력 70만 kW까지는 국산화가 가능하다」라고 대답하고 있다.이 때 국산화에의 무드가 높아지고 있던 배경으로서 「일간 공업 신문」(1967년 4월 18일)은 아래와 같이를 들고 있다.

  1. GE, WH가 대량 수주에 의해서 전대미문의 번망기에 돌입하고 있는 것을 역수로 취해, 국산화를 진행시킬 기회라고 포착하고 있었다
  2. 츄우고쿠 전력이 히타치 제작소에 대해서, 1971년에 건설하는 시마네 1호기의 제작을 특명 발주한 것

그 때에는 화력 시대부터의 원칙인 「1호기 수입, 2호기 국산화」의 패턴도 버려 국내 메이커만으로 고출력의 로형에 임한다고 하는 야심적인 안이었다.거기서 과제로서 들어지고 있던 것은, 유저인 전력측의 협력을 어떻게 달까여, 당시 도쿄 전력 부사장을 근무하고 있던 시라사와 토미이치로우는 「미경험의 대출력의 것은 국산으로는 위험하다」라고 말하고 있던[8].

1967년 5월~로형결정에

1967년 5월에는 도쿄 전력의 방침으로서 아래와 같이가 보도되고 있는[9].

  • 수입하는 경우에는 출력을 70만 kW까지 스케일 올라간다
  • 국산의 경우는 출력은 1호기와 같은 40만 kW에 억제해 토시바에 발주한다

국산화안이 40만 kW에 둘 수 있고 있는 것은, 도쿄 전력으로서는, 상기의 메이커 회답과 달리, 국내 메이커의 실력은 실제로 하청으로서 수주한 노와 동레벨이라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이다.타나카 나오지로우는 2호기 선정에 대해 「문제는 수입카국산인가의 논의보다, 원자로의 안전 운전을 확보하기 위한 기술면의 신뢰도로, 이 점을 고려해서 결정한다」라고 국산화 추진의 움직임을 견제할 자세를 보이고 있던[9].

요즘, 통산성은 상술의 츄우덴협 10년 계획에 대응한 수정안을 1967년 5월에 나타내고 있었다.이 수정안으로는 기본적으로 미국형 경수로의 채용이 계속 되는 것을 상정해, GE노를 51만 5000 kW, 76만 2000 kW의 2종, WH노를48-53만 kW,70-85만 kW의 각각 2 단계로 한 것으로, 각사의 계획 출력도 일제히 확대되었다.이 수정안으로 도쿄 전력의 2기눈의 출력도 76만 2000 kW에의 증가가 강하게 요청된[10].

또, 「원자력 통신」(1967년 6월 5일)에 의하면, 도쿄 전력은 2호기를 1호기와 동형으로서 국내 메이커에 발주하는 분 안에 대해서, 당시는 원자로 기술의 진보(대용량화에 의한 발전 단가의 코스트 다운)가 급속하고, 경제적 메리트를 해쳐, 한편 3호기에 대해 재차 해외로부터 신형노를 도입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하여 방폐했다고 하는[11].이러한 정세가운데, GE는 1967년형을 라인 업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기와 같은 정세로부터, 당시의 사장, 기카와다 가즈타카도 신중하게 마지막 결론을 내릴 생각과 보도되고 있던[9].도쿄 전력은 5월말, GE로부터의 수입으로 하는 결정 방침을 통산성에 전달, 동성은 5월 29일에 재차 메이커 3사 수뇌를 소집해 도쿄 전력의 의향을 전함과 동시에, 각사의 기술력에 대해 사정을 청취했다.그러나, 4월에 「70만 kW까지는 국산화 할 수 있다」취지의 회답을 실시한 각사는, 이 때는 뚜렷한 회답을 내는 것이 없고, 일간 공업 신문은 「책임 있는 회답을 얻을 수 없었다」라고 알리고 있는[12].1967년 5월 31일, 2호기의 Letter of Comittment가 나온[13].

또 도쿄 전력은, 히타치, 토시바, 미츠비시의 각사에 대해, 2호기를 BWR-4(당시는 1967년형과 호칭)와 같은 78만 kW타입으로 했을 경우 국산이 가능한가를 타진했지만, 메이커측은 미경험의 대용량 플랜트 때문에, 성능 보증, 납기에 자신을 가질 수 있지 못하고 「GE로 결정해도 그치는 쫓을 수 없다」라는 태도를 나타냈다고 여겨지고 있는[11].

덧붙여 2호기로서 선정된 것은, 발전단 출력 78만 4000 kW(784 MW)의 타입이다.전기 출력에 대해서는 운전 개시시점에 있어서의 계통 용량도 고려해서 결정할 수 있던[14].「전기 계산」1967년 8월호에 의하면, GE로부터 표준 타입 이외를 계약하면, 발주로부터 편입까지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고 하는[15].

로형결정 후

로형, 주계약자 결정 후, 통산성은 본건을 「조건부로 인가한다」라고 해, 이것을 마지막으로 3호기로 수입은 인정하지 않는 것, 타사의 출력도 50만 kW이상으로 표준화를 진행시키고 국산화를 진행시켜 나갈 방침을 동성 중공업국과 공익 사업국의 제휴로 밝히는 것으로 한[16].

1967년 8월 18일의 상무회로는 카미노카도전낭(당시 자재부장)에 의해, GE에의 Letter of Intent[주 1]발신의 건이 제의 된[13]. 그 후도 2호기의 계약에 대하고 검토를 계속해 1968년 3월 14일, 카미노카도가 키카와다에 진언한 것을 기회에 돌발적으로 임시 상무회를 개최, 잉크도 마르지 않은 배포 자료를 돌려, 상무회에서의 심의는 1시간에 결정했다고 하는[13].

제47회 전원개발 조정 심의회

한편, 1967년도에 들어가면, 때에의 고도 경제성장에 의한 전력 수요의 성장을 예측해, 이 해의 일본 정부의 전원개발 계획은 큰폭으로 확대했다.당시 상업 발전소의 건설에 있어서는 수력, 화력, 원자력등 모든 전원은 「전원개발 조정 심의회」의 심의를 받게 되어 있었다.이 해의 최초의 심의는 1967년 5월 30일에 개최된 제45회 심의회에서, 신규 개발 지점으로서 합계 198만 kW의 착공이 결정되었다.그런데 , 8월 3일에는 제46회 심의회를 개최해 112만 kW를 추가하게 되어, 더욱 12월 22일에는 제47회 심의회를 개최해 280만 kW를 결정했다.이 제47회 심의회에서 결정된 개발 지점의 하나가, 본발전소의 2호기인[17].

2호기의 전기 출력은 78만 4000 kW였지만, 이것은 당시의 중유전소화력의 최대 유닛 용량 60만 kW를 넘어 전원개발 조정심의회 결정시에는 일본 최대의 발전 유닛으로 여겨진[18].

제47회 심의회를 해설한 「전기」1968년 2월호의 경제기획청 종합 계획국 투고 기사에 의하면, 2호기의 착공 예정은 심의회에서 논의하기 전은 1968년 12월에 계획해, 그 공사기간은 46개월로 전망하고 있었지만, 아래와 같은 이유에 의해 공사기간은 62개월로 연장되었다.

  • 해외에서의 원자력 기기의 급격한 발주증[주 2]
  • 국산화 추진을 위한 제준비, 기술 흡수
  • GE의 제작 공정상 1968년 3월에 계약이 필요한[주 3]

이 때문에, 착공 예정은 6개월 앞당김 되어 1968년 3월로 여겨진[18].운개는 당초 1973년 5월을 목표로 하고 있던[4].

계약

「일간 공업 신문」(1968년 3월 8일)에 의하면 2호기의 주요 관련 설비로는 츠루가 1호 및 본발전소 1호기로 볼 수 있던 만큼 담부분의 교환 등은 이루어지지 않고, 토시바, 히타치가 수주에 격전을 벌였지만, 히타치를 억제하는 형태로 토시바가 수주한[19].

「오쿠마쵸사」가 도쿄 전력 원자력 개발 연구소의 기록에서 인용한 것에 따르면, 결국 1968년 3월에 GE, 1968년 12월에 카시마, 1969년 3월에 토시바에 각각 발주된[20].마츠나가 장남에 의하면, 2호기의 계약 교섭으로는 교섭 멤버는 쌍방 모두 1호기때와 같았지만, GE측으로부터 turnkey 계약을 거부했기 때문에, 통상 기기의 구입 계약이 되었다고 하는[21][주 4].

「일간 공업 신문」(1968년 3월 31일)에 의하면, GE와의 계약으로는 지불은 약 300억엔으로 그 안달러 지불은 약 220억엔으로 여겨져 더욱 그 70~80%는 미 수출입 은행으로부터의 차관으로 조달해진다고 여겨진[22].결국, 동은행과는 6878만 달러(248억엔)를 차관 해, 내역은 플랜트 부분 6085만 1000 달러( 약 219억엔), 연료 부분이 793만 달러(29억엔)인[23][주 5].기기 대금은 5년 거치 후 15년 상환, 연료 대금은 5년 거치 후 5년 상환, 금리는 모두 연율6%, 보증은 일본 개발은행이 실시한다.미 수출입 은행과의 조인은 1969년 3월 7일에 되는 운반인[24].

덧붙여 GE와의 계약 조인은 마지막에도 1 파란이 있었다.원래는 1968년 3월 29일에 조인할 예정이었지만, 당일이 되고 조인을 위해 방문한 GE의 부사장으로부터 이의가 있었기 때문에, 연기가 되었다.GE측의 지적은 계약서에 부수 하는 기술 시방서에 대한 기재로, 중요 기기의 안전 확보에 지장이 있거나 고장났을 경우 「책임 분담은 그때마다 양 회사에서 협의한다」취지의 기재가 있어, 책임의 범위를 명확화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도쿄 전력측은 「사무 절충의 단계에서 충분히 채운 시방서에 이제 와서 트집을 잡는다고는」이라고 이 요구를 거부해, 이 날은 조인하지 않았다.GE측의 자세는 1호기때와 격변 한 어려운 것이었다고 하는[25].계약은 다음 30일에 조인되어 트러블로 완공이 지연 했을 경우에 GE가 부담하는 보상액을 정하는 것도 합의한[26].

수주 기업의 양상

토시바, 히타치의 공동 연구

BWR로는 히타치, 토시바의 2사가 각각 따로따로 GE와 기술 제휴 했기 때문에, WH사제 PWR를 국내 유일 기술 제휴 한 미츠비시에 대해서 경합 환경이 어렵고, 불리하다라고 보여졌다.그 때문에, 도쿄 전력은 발주 후, 토시바에 대해서 국산화 부분을 히타치와 공동 연구하도록(듯이) 요청해, 토시바도 그것을 수입 한[27][주 6].

카시마 건설

「일간 공업 신문」(1968년 3월 28일)에 의하면, 도쿄 전력은 2호기의 토목공사(CivilWork)에 대해서, 원자로 및 관련 기기가 2 책꽂이의 발주에 바뀌었던 것에 따라, 국내의 건설업자에 직접 발주할 방침을 굳혀 동년 9월에 경쟁 지명입찰을 실시한다고 했다.이 결정에 의해 1호기로 볼 수 있던 적자 수주는 회피될 전망이 강해진다고 관측되어 카시마는 「지금부터는 채산을 잡히지 않는 마이너스의 공사는 취하고 싶지 않다」라는 자세를 나타낸[28].다만, 그 후 정식 결정은 5월 무렵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건설 관계도 토시바에 일괄 발주할 가능성도 있으면 보도된[29].「일간 공업 신문」(1968년 7월 14일)은, GE, 토시바, 히타치와의 관계가 강하고, 1호기로의 공사 실적이 있는 카시마 건설이 수주하는 공산이 크다고 알리고 있었다.또, 공사 규모는 1호기 보다 약간 밑돌아, 10억엔 정도로 여겨진[30].1969년 3월 4일, 카시마 건설은 정식으로 수주한 취지를 공표해, 이번은 채산 라인에 싣는 일도 가능과의 전망을 표명한[31][주 7].덧붙여 「원자력 통신」은 최종적인 계약액을 약 32억엔으로 하고 있는[32].

그 외

오카노 밸브는 원자력을 위한 밸브의 국산화 때문에, 1961년 이래 연구 개발을 계속해 1970년 7월, GE의 기기 검사기관으로서 기능하고 있던 GETSCO보다 파견된 검사원이 품질관리, 가공 기술에 대해 심사를 실시, 동사에서 제조 허가를 얻었다.이 때 허가를 얻은 것은 재순환 펌프용 밸브이며, 당시 난이도별로 A, B, C에 클래스 나누어 되고 있던 BWR용 밸브 중(안)에서 가장 난도의 높은 클래스 A에 상당하는 밸브였다.특히 변봉에 대해서는 공작기계적으로도 제조에 고심했다고 한다.동사의 밸브는 1971년 1월에 2호기 전용으로 쇼노우입이 예정되어 재순환 펌프용 밸브로서는 첫 국산품인[33].

본발전소는 일본에서는 초기에 건설된 원자력 발전소이기 위해 납입 기기가 첫채용이라고 하는 케이스는 그 밖에도 있다.올가노도 그 1사이며, 1956년에는 사장 마루야마 타케시를 위원장에 사내에 원자력 위원회를 핫타리, 미국 진흙 바사로 기술 제휴 해, 여과와 이온 교환을 동시에 실시하는 파우젝스 여과 장치를 카이하츠, 츠루가 1호로 물처리 시설 일식을 수주했을 때에 GE, EBASCO와의 절충도 경험해, 파우젝스 여과 장치는 복수탈염장치의 전단에 사용하기 위해(때문에) 본발전소의 2호기로 쇼노우입 된[34].

수입품 일람

2호기의 주된 수입 기기는 다음 같게 되어 있는[35][36].2호기의 계약을 1개월 후에 앞두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던 1968년 2월, 통산성은 도쿄 전력에 대해서 국산 연료의100% 사용을 신청했다.이 때는 1호기의 계약시와 달리, 1967년 5월에 일본 뉴크레아퓨엘이 설립되고 있던 것도 추진 재료의 하나가 되고 있어 첫장하연료는 미국에서 농축해, 국내에서 가공된 것을 사용할 예정인[37].

  • 재순환계:재순환 펌프, 제어용 가변 주파수 전원 장치(M-G세트)
  • 제어봉 관계:제어봉, 제어봉 구동장치(SRD)
  • 원자로계:급수 펌프, 주증기 격리변, 놓쳐 변, 고압주수계, 노심 격리 냉각 장치
  • 터빈 관계:터빈 본체, 제어장치, 터빈 우회도로 장치, 터빈 감시 계기
  • 발전기 관계:발전기 본체, 여자기, 계자개폐기, 자동 전압 조정(AVR) 장치
  • 계측・제어:핵계 장, 뉴클리어・파네르즈, 프로세스・라지에이션・모니터(중앙 제어반), 프로세스 계산기(GE/PAC-4020), GE-MAC 시스템

설계

BWR-4는 후쿠시마로의 채용전에, TVA의 브라운즈페리 원자력 발전소(en)에 채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설계 특색, 공학적 안전 시설을 베이스로 해, 서브콘트랙터로서 GE의 하청을 하고 있던 토시바는 당시 「수주 실적이 있는, 실증도의 높은, 신뢰성의 뛰어난의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던[38].

1호기의 출력 밀도가 36 kW/L에 대해서 2호기의 출력 밀도는 51 kW/L에 큰폭으로 상승하고 있어, 소요 연료 요소는 보다 적은 수로, 압력 용기도 그만큼 대형화한 것은 아니다.덧붙여 요즘 압력 용기의 규격으로서 ASME SecIII Rules for Nuclear Vessels(1965년 3월)가 발행되었다.이 코드는 응력 해석의 실시를 조건으로 안전률을 낮게 취하고 있다.2호기는 이 코드를 적용해 응력 해석을 실시해 설계되었다.이 때문에, 2호기가 압력 용기는 두께가 얇다.이 설계 지침으로서 안전성에의 중시와 함께 「경제적으로 건설하는 것도 중대한 요구이며, 이 때문에 무의미한 안전성에만 중점을 둔 설계가 용서되지 않는 것은 떡론이다」라고 기술 잡지 「화력발전」에서의 보고에는 기술되어 있는[4].

2호기의 압력 용기 제작의 최성기는 1970년이었지만, 나카무라 아키라시에 의하면, GE의 설계에 의해 비교적 순조롭게 완성된 1호기의 압력 용기와 비교하고, 2호기로는 GE의 승인을 얻어 낸 다음 VESSEL BOTTOM의 STUBE TUBE라고 하는 부분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채용했지만, 여러 가지의 문제가 발생해 결국 1호기의 설계 방법과 같게 되돌렸다.신설계에 의한 STUBE TUBE는 반완성하고 있어, 그 복귀 로스가 있었다고 하는[39].

당시 도쿄 전력 원자력 공사 과장이었던 나카무라 아키라시에 의하면, 2호기는 시운전에서도 트러블이 속출해, 「관청 시험의 히트 런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상당히 기분을 비볐다」 「PCIMOR(연료 집합체에 트러블이 생겼기 때문에, 부하를 걸치지 않게 시간을 들여 기동・정지하는 잠정 운전법)가 완만하기 때문에 살아난 면도 있습니다만, 나중에 고생하는 요인으로도 되었습니다」라고 회고 하고 있는[40].

프로세스 계산기는 1호기에 계속해서 GE제의 GE/PAC-4020을 채용했다.

한마디로 기술 도입이라고 말해도, 「원자력 통신」에 의하면 그 내용은 설계 사이즈에 의해서 꽤 변화가 있어, 또, 1970년경에는 GE의 기술공여에 대한 자세도 어려운 것이 되고 있었다.요즘, 3호기의 주계약자가 된 토시바는, EBASCO사부터 2호기의 설계 자료를 구입해, 기기의 설치, 배관에 관한 시비르엔지니아링에 유용하게 써 한편, 계약기간 5년에 3호기의 설계에 대해 동사의 체크・리뷰를 받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하는[41].

격납 용기의 설치

건설소의 기계과 과장으로서 1호기의 격납 용기 설치에 관련된 이노우에 카즈오에 의하면, 38㎜이하의 강판에 의한 현지 조립이라고는, 우선 지상에서 강판 2~3장을 용접 접합해, 크레인으로 매달아 구조물로서 조립이라고 용접해 나가는 방법이 취해져 완성까지 약 10개월을 필요로 했다.완성시에는 용접・구조의 건전성을 확인하기 위해(때문에) 관청 검사를 실시해, 내압, 누설 시험도 그 실시 항목에 포함되어 있었다.용접선이 많기 때문에 검사관은 10명 가깝게 의뢰해, 약 3 kg/㎝2압축 공기를 7500 m3[주 8]의 격납 용기에 봉입해 실시하지만, 공기의 보유 에너지가 계산상 TNT 화약 11~12 t에 상당하기 위해 시험 실시에도 충분한 안전 확보가 요구되었다.누설 시험에는 용접선에 비누수를 발라 거품의 발생이 없는가를 확인해 실시했으므로, 격납 용기 하부의 검사관은 상부의 비누수를 입게 되어, 우의가 필요했다.그 후, 1호기, 2호기로의 설치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성 개선, 효율화에 대하고 검토가 더해져 강판은 가능한 한 지상에서 대조로 해, 크레인을 증강해 매달아 올리는 것으로 해, 공중에서의 용접 작업을 삭감한[42].

시운전전의 불편

본기는 건설공사 완료 후, 1973년 1월말에 전연료의 장하를 완료시켜, 3월부터 시운전을 개시, 5월부터 영업 운전을 시작할 계획인[43].

그 직후, 원자로 격납 용기로부터 증기 터빈에 증기를 통하는 계통에 설치한 증기 놓쳐 변이 규격에 맞지 않는 불편이 발견되어 교환을 필요로 한 것, 핵연료 지지 쇠장식의 재조정이 필요한 것으로, 영업 운전 개시는 여름을 넘어, 9월까지 늦어진다고도 보도된[44].이 불편에 의한 운전 개시 지연의 영향은 매월12-13억엔, 4개월에 약 50억엔 정도가 된다고 전망되었기 때문에, 릴리프 밸브를 담당한 GE의 페널티 문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평판 된[45].이 문제는 가을이 되어도 해소하지 않고, 그 한편, 1974년의 하기는 전력 수요의 증가의 외, 광화학 스모그 규제의 강화로 만내 화력의 운전이 억제된다고 전망되었기 때문에, 본기도 신예기로서 공급력에 계상하고 있는 사정이 있어, 1974년 여름의 운전 개시를 예정한[46].

그 후, 1,2호기 공동의 방사성 폐수 누설 트러블도 있어, 공정은 늦었지만 1973년 11월 14일 17시 반 넘어보다 핵가열 시험에 착수해, 출력 상승 시험을 개시했다.첫병렬은 12 월상순이 목표인[47][주 9].

오일 쇼크에 의한 공정 앞당김의 검토

1973년 가을의 제1차 오일 쇼크 시에, 도쿄전력은 이미 운전 개시하고 있던 1호기의 출력을 재차 46만 kW로 인상[주 10], 당시 1974년 3월말부터 운전 개시 예정이었던 2호기의 개시시기를 앞당겨 1973년 12월말부터25% 출력으로 시운전을 개시해, 다음 해 서서히 풀 출력으로 운전해 실질적인 공급 전력으로 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던[48].구체적인 구원책(중유 화력 절감책)으로서는 시운전(시험 공정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단계적으로 출력을 증가해 나가는 파워업 테스트)으로는, 계통에 병 참석하고 있는 것을 이용해, 송전 전력을 당초의10%에서25%에 증가하는 조치등이 검토된[49].

2호기가 모든 시험을 완료해 상업 운전을 개시한 것은 1974년 7월 18일이었다.

비고

건물 사양, 및 운전 개시 후부터 후쿠시마 제일 원자력 발전소 사고까지의 상황에 대해서는 타호기와 합쳐 후쿠시마 제일 원자력 발전소를 참조.상기 이외의 본기 사양에 대해서는 후쿠시마 제일 원자력 발전소 설비의 사양을 참조.

또한 2호기는 2011년 3월, 후쿠시마 제일 원자력 발전소 사고노심 융해수소 폭발을 일으켜, 폐지 조치가 결정되었다.

각주

주석

  1. ^아브레비는 LOI.발주 내시서.기본 합의서내지 관심 표명서라고도.특정의 프로젝트에 대해, 검토를 실시하는 것을 약표명하는 계약서를 가리킨다.
  2. ^당시 , 미원자력 메이커의 수주잔은 4,400만 kW에 이르러 「제조능력의 한도에 가깝다」라고 해졌다고 한다.(経済企画庁総合計画局 1968, p. 32)
  3. ^당시 일본에서 제작 곤란한 원자로 본체는 GE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교섭했지만, GE의 공정에는 여유가 없고, 조기 계약을 실시하는 필요를 느꼈다고 한다.(経済企画庁総合計画局 1968, p. 32)
  4. ^ GE가 도쿄 전력 전용의 수주 활동에서 turnkey를 회피하는 것으로 한 직접적인 이유는 「모든 분야에서 지도가 손이 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라고 여겨지고 있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2호노의 토목공사 우리 나라 업자에게 직접 발주」 「일간 공업 신문」1968년 3월 28일 11면
  5. ^또한 「요미우리 신문」에 의하면, GE로부터 수입하는 총경비는 1억 9280만 달러로, 이 안차관의 대상이 되는 것이 6878만 달러라고 알리고 있다.
    「미 수출입 은행, 도쿄전력에 6천만 달러 차관 원자력 발전기의 수입으로」 「요미우리 신문」1968년 12월 31일 조간 5면
  6. ^덧붙여 본기 착수와 전후 하는 시기 국산화율의 상승이 예상되는 동형의 3호기의 수주에 대비해 히타치, 토시바의 양 회사는 1967년 가을에 GE와 묶은 원자로 일차계의 기술 제휴에 가세해 동사와 2차계 기기(터빈, 발전기, 건물등 )의 기술 제휴 교섭을 개시했다
    「원자력 발전기기 완전 국산화 체제에 GE와 기술 제휴 교섭 히타치, 토시바2차계 기기로」 「일간 공업 신문」1968년 10월 23일 4면
  7. ^덧붙여 카시마는 1호기의 건설에 대해 GE, EBASCO보다 현지 지도를 받은 외, 미국 EBASCO사에 기술자를 8명 정도 파견해 원자력 발전소의 설계・시공에 대한 기술 습득을 실시해, 1969년에 들어가는 무렵에는 자신을 가져 오고 있었다.또, 그 성과를 동형의 타발전소에서도 활용하고 있다.
    「토목 설계・시공을 자사 기술로 츄우고쿠 전력의 원자력1호노카시마 건설 연내에 착공 태세」 「일간 공업 신문」1969년 1월 29일 10면
  8. ^이노우에는 이 수치를 78.4만 kW급의 것으로 해 인용
  9. ^또한 일본측 문헌으로는 항상 「GE」라고 조직・법인명만으로 언급되는 것이 많은 GE사이지만, 2호기가 운개를 목전에 앞둔 1973년말, GE의 극동 본부장은 모리스・D・루트, 이사 영업 부장은 코스・스피카스였다.
    「에너지 위기의"구세주"원자력 발전 전력계 발전의 일익 담당하는 GE 순조롭게 미래에의 포석」 「전기 신문」1973년 12월 13일 10면
  10. ^당시 연료 pellet의 구이 맺힌 데(조밀화)가 문제가 되고 있어 미국 원자력 위원회는 1973년 8월 24일, GE제 BWR에5-25%의 출력 삭감을 명하고 있었다.이 처치로 모방해, 1호기도 40만 kW에 출력을 인하해 운전하고 있었지만 일본의 당국자(과학기술청등)는 9월에 출력 제한의 필요성은 없다는 견해를 내고 있다.
    「원전・츠루가, 도쿄전력・후쿠시마1 출력 억제하는 근거는 없는 과기청 「BWR 연료 pellet 조밀화」로 결론 조사단 보고로부터 판단」 「전기 신문」1973년 9월 18일 2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 출력 업 도쿄전력 긴급 전력화로 검토」 「일간 공업 신문」1973년 12월 12일 1면

출전

  1. ^ 2-4호기의 1965, 1966년 시점의 시설 계획으로의 계획 출력은 이노우에 츠토무[외] 1966, p. 9
  2. ^ 이노우에 츠토무[외] 1966, p. 7.
  3. ^ 이노우에 츠토무[외] 1966, p. 9-10.
  4. ^ a b c 이노우에 카즈오 1968, p. 46
  5. ^「미 GE, WH사 발전로 수주 체제 굳히기루출력 규모를 표준화 50, 70, 백만 KW의 삼종에」 「원자력 산업 신문」1967년 1월 15일 3면
  6. ^「원자력 개발도 광역 운영으로"정신"활용되지 않고 츄우덴협의 계획에 구두쇠 통산성」 「전기 산업 신문」1967년 2월 13일 1면
  7. ^코바야시 겐조 츠카사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계획에 관한 한 고찰」, 「토목 시공」 제12 각권 7호, 산해당, 1971년 7월,118-128페이지.
  8. ^메이커와 통산성이 1967년 4월 17일의 회담에서 국산화 추진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던 건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원자력 발전기기 70만 kW까지 국산화 근처 관계자로 연구회 도쿄전력, 세키 덴지호기로부터」 「일간 공업 신문」1967년 4월 18일 1면
  9. ^ a b c 「도쿄전력의 원자력 발전 2호노순회 국산인가 수입이나 논의 끓는 신뢰도로부터 그리고 미묘 40만 kW라면 토시바에 발주」 「일간 공업 신문」1967년 5월 19일 4면
  10. ^「9사의 원자력 개발 계획을 수정 615만 kW에 규모 확대 발전로의 국산화도 추진 통산성의 50년 상정」 「전기 산업 신문」1967년 5월 22일 1면
  11. ^ a b 「도쿄전력 2호노, GE에 결정되는 압력 용기・관련 기기는 국내 메이커에」 「원자력 통신」 제1546호 1967년 6월 5 니치하라자력 통신사 P1-2
  12. ^「도쿄전력, 2호노도 GE로부터 수입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최대 출력은 78만 kW내년 12월부터 착공」 「일간 공업 신문」1967년 5월 30일 1면
  13. ^ a b c 카미노카도전낭 1997, p. 27.
  14. ^ 2호기의 전기 출력 결정 이유에 대해서는 오쿠마쵸사 편찬 위원회편. 1985, p. 841
  15. ^「후쿠시마 원자력 780 MW발전기 설치 계획」 「전기 계산」1967년 8월 P57
  16. ^「발전용 원자로의 국산화 추진 통산성의 방침 수입은 인정하지 않는 도쿄전력의 2호노를 마지막으로」 「일간 공업 신문」1967년 7월 24일 4면
  17. ^경제기획청 종합 계획국 1968, p. 22.
  18. ^ a b 경제기획청 종합 계획국 1968, p. 29.
  19. ^「주계약자에게 토시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2호노도쿄전력 월말까지 발주 계약」 「일간 공업 신문」1968년 3월 8일 4면
  20. ^ 2호기의 발주 방식에 대해서는 오쿠마쵸사 편찬 위원회편. 1985, p. 841
  21. ^ 마츠나가 장남 1995 b, pp. 10.
  22. ^「도쿄전력, GE와 조인 2호노의 주요 기기 수입」 「일간 공업 신문」1968년 3월 31일 2면
  23. ^「미 수출입 은행으로부터 차관 원자로 건설비 도쿄전력이 6878만 달러」 「일간 공업 신문」1968년 12월 6일 5면
  24. ^「7일에 미 수출입 은행과 조인 도쿄전력 원자로 구입 자금 차입해」 「일간 공업 신문」1969년 3월 3일 5면
  25. ^「GE가 이의, 계약 연기 도쿄전력의 원자력 발전기기 수입」 「아사히 신문」1968년 3월 30일 조간 7면
  26. ^「도쿄전력과 GE, 계약에 조인」 「아사히 신문」1968년 3월 31일 조간 7면
  27. ^「토시바, 히타치와 공동 연구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원자력 2호노압력 용기 등 국산화 부분」 「일간 공업 신문」1968년 7월 29일 4면
  28.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2호노의 토목공사 우리 나라 업자에게 직접 발주」 「일간 공업 신문」1968년 3월 28일 11면
  29. ^「도쿄전력 오늘 GE와 조인 후쿠시마 2호노의 플랜트 발주 토시바와는 5월경」 「일간 공업 신문」1968년 3월 29일 4면
  30. ^「2호노도 카시마 건설이나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근처 토목 시공 업자 결정」 「일간 공업 신문」1968년 7월 14일 3면
    동기사에서는 경합 타사로서 시미즈 건설, 타이세이 건설, 오오바야시구미, 다케나카코무텐의 이름이 들어지고 있다.
  31. ^「도쿄전력으로부터 정식 수주 후쿠시마 원자력 2호노의 토목 시공 카시마 건설」 「일간 공업 신문」1969년 3월 5일 10면
  32. ^「도쿄전력, 후쿠시마3호기의 국산화에 토시바와 히타치와 절충중」 「원자력 통신」1969년 4월 30일 1729호 P2
    상기 기사 자체는 3호기에 대해 논의하고 있지만 2호기의 사례가 인용되고 있다.
  33. ^「원자로 밸브미 규격으로 제조 허가 오카노 밸브 도쿄전력 후쿠시마에 1호기」 「일간 공업 신문」1970년 8월 27일 3면
  34. ^ 기업 분석 1987 a, pp. 49-50.
  35. ^「도쿄전력, 후쿠시마3호기의 국산화에 토시바와 히타치가 절충중」 「원자력 통신」 제1729호 1969년 4월 30 니치하라자력 통신사 P1-2
  36. ^「도쿄전력, 미 수출입 은행으로부터 차관 후쿠시마2호기 수입 기기로」 「원자력 통신」 제1698호 1968년 12월 11 니치하라자력 통신사 P2
  37. ^「근처 국산 원자 연료의 전면 사용을 요망 통산성, 도쿄전력, 중부전에 대해」 「원자력 통신」 제1612호 1968년 2월 7 니치하라자력 통신사 P2-3
  38. ^이나바 에이지 1969, p. 23.
  39. ^ 2호기 압력 용기의 STUBE TUBE 설계의 전말에 대해서는 나카무라 아키라시 1995 a, pp. 45-46
  40. ^ 나카무라 아키라시 1995 a, pp. 61.
  41. ^「토시바, 미국 에바스코사로부터 기술 도입-후쿠시마2호기의 시비르엔지니아링으로-」 「원자력 통신」1970년 12월 9일 1876호 P1
  42. ^ PCV 설치의 실제로 붙고는 이노우에 카즈오 1995, pp. 99-100
  43. ^「3월의 시운전에 대비해 핵연료를 장하도쿄전력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의 2호기」 「일간 공업 신문」1973년 1월 26일 14면
  44. ^「도쿄전력 후쿠시마2호기 영업 운전 9월에 증기 놓쳐 변의 교환으로」 「일간 공업 신문」1973년 2월 7일 14면
  45. ^「계약 위반에 발전이나 도쿄전력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 플랜트 GE의 납입 지연 문제」 「일간 공업 신문」1973년 2월 13일 14면
  46. ^「도쿄전력이 내년 여름 피크 대책약백이십만 킬로와트 억제 긴급 조정 등 고장이나 실패에 대비한 삼 단계로」 「일간 공업 신문」1973년 10월 31일 7면
  47. ^「2호기가 시운전 개시」 「전기 신문」1973년 11월 16일 2면
  48. ^「전력 공급, 원자력 발전에서 증강 도쿄전력 검토 후쿠시마1・2호 풀 활용」 「아사히 신문」1973년 12월 12일 조간 7면
  49.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 출력 업 도쿄전력 긴급 전력화로 검토」 「일간 공업 신문」1973년 12월 12일 1면

참고 문헌

논문

  • 이노우에 츠토무[외]「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동향(좌담회)」, 「전력」 제50 각권 12호, 전력사, 1966년 11월,4-15페이지, NAID 40018111993.
  • 이노우에 카즈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근황과 장래의 계획」, 「화력발전」 제19 각권 12호, 화력발전 기술 협회, 1968년 12월, NAID 40017590326.
  • 경제기획청 종합 계획국 「신규 전원의 대량 착공 결정에 수반하는 쇼와 42년도의 전원개발 계획의 개정- 제47회 전원개발 조정 심의회의 심의-」, 「전기」 제236권, 일본 전기 공업회, 1968년 2월,22-32페이지.
  • 기업 분석 「기업 분석 전력계에서 압도적인 쉐어를 자랑하는 올가노의 비밀」, 「에너지 포럼」, 전력 신보사, 1987년 5월,48-50페이지.

기업기술보

  • 이나바 에이지 「도쿄 전력 주식회사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2호기 계획 개요(원자력 발전(특집))」, 「토시바 리뷰」 제24 각권 1호, 토시바 기술 기획실, 1969년 1월,22-25페이지, NAID 40018135085.

정사

서적

  • 이노우에 카즈오 「7.화력・원자력・전원 부문 한결같게」, 「도쿄전력 자신사 제 2집」, 도쿄 전력 사료 조사실, 1995년 1월,94-106페이지.
  • 마츠나가 장남 「1.[특별 기고]나의 전력 법제사・원자력 발전사(2)」, 「도쿄전력 자신사 제 4집」, 도쿄 전력 사료 조사실, 1995년 8월,9-44페이지.
  • 나카무라 아키라시 「4.원자력 개발의 도정(2)」, 「도쿄전력 자신사 제 5집」, 도쿄 전력 사료 조사실, 1995년 11월,39-86페이지.
  • 카미노카도전낭 「1.나의 전기사업 37년・다카다케 22년의 걸음」, 「도쿄전력 자신사 제 9집」, 도쿄 전력 사료 조사실, 1997년 8월,1-41페이지.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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