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쇼의 착란
에이쇼의 착란(네 있어 짊어지는 것 벚꽃응)은, 전국시대 초기의 에이쇼 4년(1507년),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암살을 발단으로 하는 명문 호소카와씨의 본가의 혈통, 호소카와경조가(무로마치 막부 관령 호소카와씨)중홍이다.경조가가 막부의 권력을 장악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군직을 둘러싼 항쟁도 관련되고, 기나이는 긴 대립 항쟁 상태에 돌입해 나간다( 양호소카와의 란).
목차
경위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3명의 양자
묘오 2년(1493년), 제27대 무로마치 막부 관령 취직을 하고 있던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제10 대장군・아시카가의재( 후에 의윤, 한층 더 의직과 개명)를 폐립 해 당시 소년이었던 아시카가의고( 후에 의징과 개명)를 11 대장군에 옹립 했다(묘오의 정변).전제 권력을 수립한 마사모토였지만, 여인 금제인 수험도의 수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친자식은 있지 않고, 형제도 없었기 때문에 호소카와경조가에는 마사모토의 후계자가 없고, 관백・구조 마사모토의 막내동이의 징 유키, 호소카와 한 집안의 아와 수호가로부터 징원, 한층 더 경조가의 분가의 야슈가로부터 고국의 3명을 맞이해 양자로 했기 때문에, 분열 항쟁의 싹을 배태하게 되었다.오닌의 란으로 제영주가가 후계 분쟁을 일으켜 약체화를 부르는 중, 호소카와가로는 카츠모토의 후계자에게 양자 카츠유키를 추천하는 움직임은 일부에서 만났지만, 카츠모토의 친자식인 마사모토가 적남으로서 계승하는 것으로 결정되고 있어 그 결과 마사모토의 시대에는 호소카와가는 막부안에서의 지위를 보다 강고하게 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 마사모토에 혈연의 친한 후계자가 있지 않고, 지금에 와서 타영주가보다 일대 늦게 경조가에도 후계 분쟁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에이쇼 3년(1506년), 셋츠 수호가 된 징원이 친가의 아와세를 인솔해 입경 해, 그 가 재미요시지장이 마사모토에 군사면에서 중용 되게 되면, 지금까지 마사모토 정권을 지지해 온 「 내중」이라고 불리는 경조가 중신(주로 기나이 유력 국민층)과 아와세와의 대립이 깊어진다.
마사모토 암살(호소카와전의 변)
에이쇼 4년(1507년) 6월 23일, 수험도에 몰두하고, 텐구의 분장을 하는 등 종종 기행이 있던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마법을 수련할 준비로서 저택내의 유노야에 들어간 것을을, 징 유키를 껴안는 동안사람들 약사사장 타다시・코자이원장・타케다 손자7등에 꼬드겨진 우필의 토구라씨에 의해서 살해되었다(호소카와전의 변).또한 다음날, 장 타다시등은 징원・미요시지장의 저택에 바싹 쳐들어가 징 전 등을 오미에 패주시켜, 주군으로서 징지를 맞이해 호소카와경조가의 상속자를 잇게 했다.6월 26일에는, 마사모토의 명령을 받아 탄고의 일색의유를 공격하고 있던 아카자와조경이 군을 교토에 철퇴 시키려고 했지만, 일색의유나 탄고의 국민 이시카와 나오츠네등의 반격을 받고 자해에 몰렸다(양자 장경은 도망쳐 징원의 부하가 된다).
그러나 이제 1명의 양자・고국은, 일족의 셋츠분군 수호 호소카와 세이켄이나 아와지 수호 호소카와 히사시봄, 카와치 수호 하타케야마의영이라고 이야기를 주고 받아, 마사모토의 후계자를 징원으로 하는 것에 합의를 보았다.
우선 7월 28일, 야쿠시지원일(제・장충에 멸해지고 있다)의 아이・만덕환은 장충의 거성 이바라키성을 굴복시켰다.계속 되어 다음 29일, 호소카와 다카쿠니등은 코자이 겐장의 거성 아라시야마 죠를 설복했다.그리고 8월 1일, 도망처의 오미 코우가군의 국민등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급한 것 경으로 돌아온 미요시지장이, 호소카와 키요시지의 마지막 사이가 되고 있던 유 첫채를 고국세와 함께 단번에 굴복시켰기 때문에 징지는 자해 했다.다음 2일, 호소카와 스미모토는 장군에 배 알현해, 호소카와경조가의 상속자와 관령직을 이었다.
징원과 고국의 대립
묘오의 정변으로 장군직을 쫓기고 있던 전 장군 아시카가의윤은, 묘오 8년(1499년)에 서쪽 지방1의 영주인 스오우의 오오우치 요시오키를 의지해 이래 그 바탕으로 있었지만 마사모토 암살 후, 막부는 그 동향을 무서워해 에이쇼 4년(1507년) 윤 6월, 의흥추토의 윤지를 얻어 아키・이와미의 국민등에 의흥추토를 명했다.그러나 동년말, 오오우치 요시오키는 의윤을 껴안아 주변국에도 참가를 불러 상경군을 일으켜, 군세를 인솔하고 야마구치를 출발하면, 빈고국의 토모에서 해를 넘기면서 입경의 시기를 (들)물었다.
요즘, 미요시지장의 전횡에 반발하는 기나이의 세력은 호소카와 다카쿠니의 곁으로 결집하고 있었다.징 원래는 오오우치 요시오키와 화해를 연결하기 위한 교섭에 고국을 보내려고 했지만, 반대로 고국은 이가에 출분, 의윤・의흥과 묶어, 셋츠의 이타미원부나 탄바의 나이토정 타다시등의 기나이 국민을 아군에게 붙였다.
에이쇼 5년(1508년) 4월, 징원이나 11 대장군아시카가의징은 연달아 오미에 피해 고국이 입경 했다.4월말, 의윤・의흥은 이즈미노쿠니계에 도착, 마중나간 고국이 경조가의 상속자를 이었다.6월, 전 장군의윤은 계로부터 경에 들어가, 다시 장군이 되었다.고국은 우쿄 대부・관령이 되어, 오오우치 요시오키는 사쿄 대부・관령대・산성 수호가 되었다.
이 1년간에, 호소카와경조가의 상속자는 마사모토로부터 징 유키, 키요시원, 고국으로 어지럽게 바뀌었다.
양호소카와의 란
이 요란을 계기로서 경을 누른 호소카와 다카쿠니등과 호소카와 스미모토・그 자청원・미요시 씨등 아와세와의 공방이 장기에 걸쳐 반복해졌다.
- 에이쇼 6년(1509년), 호소카와 스미모토・미요시지장이 경침공을 기획하지만, 호소카와 다카쿠니・오오우치 요시오키는 협동해 격퇴하고 있다(여의악의 싸움).
- 동년 10월, 고국등이 오미에 침공해, 징원・지장은 아와에 도망했다.지장의 아이・미요시장수는 이세에 패주 했지만, 기타바타케재 부모에게 공격받아 자해 한다.
- 에이쇼 7년(1510년), 고국등이 오미에 침공했지만, 징원방을 지지하는 국민의 반항도 있어 대패했다.
- 에이쇼 8년(1511년), 징 원래는 호소카와 세이켄・호소카와 히사시봄등과(아시야 강변의 전투), 또 카와치 수호 하타케야마 쇼 준 등과(이즈미・후카이의 전투) 전투에 이르러, 하리마・비젠 수호 소나무의촌등과 제휴해 경에 침공한다.고국・의흥은 한때는 열세하게 몰려 장군 아시카가의직을 껴안아 탄바에 철퇴 어쩔 수 없이 한다.
- 그러나 이 한중간에, 아와세가 껴안기 전장군의징이 병사한다.8월, 고국・의흥군이 후나오카산 전투에 승리했다.호소카와 세이켄은 자해 해, 징 원래는 아와에 철퇴한다.
- 에이쇼 14년(1517년), 미요시지장은 아와지수군을 장악 하기 위한(해) 아와지에 침공해, 아와지 수호 호소카와 히사시봄은 이즈미의 계에 도망했다.
- 에이쇼 15년(1518년) 8월, 이즈모의 아마고씨나 아키의 타케다씨등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휘하의 국민의 배반도 잇따랐기 때문에, 약 10년 재경하고 있던 오오우치 요시오키가 스오우에 귀국한다.
- 에이쇼 16년(1519년) 5월, 호소카와 히사시봄은 키요시 바탕으로 내리지만, 지장에 살해된다.
- 동년 11월, 징원・지장등이 셋츠노쿠니 효고에 상륙, 와 하야시 타다시뢰(별명:강변 임정뢰)의 코시미즈성을 떨어뜨린다(코시미즈성의 전투).
- 에이쇼 17년(1520년) 2월, 고국이 셋츠에서 징원・지장에 져 장군의직은 징원측에 통한다.
- 고국은 오미 사카모토에 도주하지만, 오미의 롯카쿠 사다요리・교고쿠 다카키요, 탄바의 나이토정 타다시등의 지원을 얻어 5월, 경에 침공해, 징원・지장을 찢는다(도우지인의 싸움).지장은 고국에 배 알현해 조명을 청하지만, 호소카와 히사시봄의 양자・언시로의 요구로 자해에 몰린다.또, 징원을 셋츠에 추방한다.6월, 징 원래는 아와 쇼즈이성에서 병사.
- 에이쇼 18년(1521년) 3월, 고국은 대립한 장군의직을 추방해, 새롭게 아시카가 요시하루(의징의 아이)를 12 대장군으로서 옹립 했다.8월, 다이에이에 개원.이 해, 소나무의촌의 중신 우라카미촌종, 의촌을 유폐의 후암살.
- 다이에이 4년(1524년) 10월, 고국의 중신 코자이원성・야나기모토 켄지등이 아와세의 잔당을 이즈미에서 찢는다.
- 다이에이 6년(1526년) 7월, 탄바 수호 호소카와윤현의 중상 모략에 의해, 고국이 코자이원성을 모살.이 때문에 원성의 형(오빠)・하타노직 토루・야나기모토 켄지등은 아와의 호소카와 하루모토・미요시원장과 제휴해 탄바로 군사를 일으킴.고국은 호소카와윤현을 탄바에 침공시켰지만 패퇴.
- 다이에이 7년(1527년) 2월, 하타노직 토루・야나기모토 켄지등이 경에 침공, 고국・윤현은 카츠라가와로 맞아 싸우지만 져 장군 요시하루를 껴안아 오미 사카모토에 도망(카츠라가와원의 싸움).전 장군의직의 양자・아시카가의유(의징의 아이로 요시하루의 남동생)를 껴안는 청원・원장은 계에 진출해, 경의 지배를 실시한다(계공사).
- 향녹원년(1528년), 고국은 경탈환을 시도하지만, 맑음 바탕으로 진다.호소카와윤현, 청원방에 잠 돌아간다.
- 향녹 3년(1530년), 야나기모토 켄지가 하리마 출진중에 사망.고국은 우라카미촌종과 제휴해 경에 침공.
- 향녹 4년(1531년) 3월, 고국은 미요시 겐장의 반격을 받아 셋츠노쿠니 나카지마의 싸움으로 대패.
- 6월, 한층 더 고국은 텐노지의 싸움으로 원장에 져 아마가사키에 도주했지만, 잡혀 자해 해, 우라카미촌종도 토사.
- 7월, 호소카와윤현이 키사와 나가마사에 살해된다.나가마사와 원장이 대립하게 되지만,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나가마사를 총애 한다.
- 천문 원년(1532년) 6월, 청 원래는 증여나 키사와 나가마사와 묶어, 조금도 일치 단결에 계의 원장을 공격하게 한다.원장은 져 자해.청 전은 장군 요시하루와 화목 한다.이 후, 천문의 착란이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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